523화

523화 0회차에 지켜본 것도 어느새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깨달은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어떤 회차든 유중혁은 유중혁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겠다.” [화신 ‘유중혁’이 자신의 배후성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걸로 벌써 두 번째 배후 선택이 끝났다. 중간에 있었던 돌발성 배후 선택 이벤트까지 합하면 총 세 번. 그 세 번 동안, 유중혁은 한 번도 자신의 배후성을 선택하지 않았다. 물론 그중 첫 번째는, 나 때문에 선택을 못 한 거지만. 츠츠츳······. 저 녀석의 뒤통수를 갈겼던 손바닥이 아직도 아프다. 초반 시나리오에 개입해 중요 이벤트에 돌입한 화신을 기절시켜버렸으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타격이 전무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때부터 유중혁은 ‘배후 선택’에 엄청난 경계심을 보이고 있었다. 「성좌······ 갑자기 나를 기절시킬 수 있는 놈들이다. 함부로 믿어서는 안 돼.」 내 입장에선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 외에 다른 녀석들도 선택을 못 받는 건 마찬가지니, 그렇게 나쁠 건 없기도 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왜 자길 선택하지 않냐며 불평합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화신 유중혁의 손톱을 탐합니다.] [성좌, ‘인류의 시조’가 화신 유중혁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유중혁의 행동에 의아해합니다.] 시일이 지나며 비형의 채널은 차츰 커졌고, 내가 아는 수식언의 숫자도 제법 늘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에게 인사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콧방귀를 뀝니다.] 우리엘······.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킬킬 웃습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긴고아의 죄수’에게 반갑게 인사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콧구멍을 파기 시작합니다.] 그래, 이게 ‘멸살법’이었지. 나한테 익숙한 성좌들의 모습만 떠올리다 보니 잠깐 잊고 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다른 성좌들에게 ‘구원의 마왕’은 관종이니 조심하라 경고합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제일 얄미운 건 저 자식이었다. 내가 코인 소모를 무릅쓰고 한 마디를 하려는 찰나, 비형이 입을 열었다. [패왕 유중혁, 정말로 배후성을 선택하지 않을 겁니까? 잘 생각하는 게 좋을 텐데요.] “안 한다.” [흐흠, 자, 배후성에 지원하신 성좌님들. 이번에는 특별히 저 화신에게 어필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유중혁 덕분에 다수의 ‘화신 찾기’ 집단을 갖게 된 비형은 온종일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지금이 한탕할 기회라는 걸 깨달은 거겠지. 잠시 후 내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도깨비 비형이 제공하는 특별 후원 기회!] [당신이 원하는 화신에게 아이템을 후원하세요!] 나는 무심코 확인을 누르려다가 창 아래에 작게 표시된 경고문을 읽었다. * 해당 상품 구매시 3500코인이 자동 차감됩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유 코인 : 500 C] 「바 보 김독 자」 마지막 시나리오를 깨며 <김독자 컴퍼니>의 금고를 탕진했기에, 남은 코인이 있을 리 없었다. ‘가장 오래된 꿈’의 권한으로 코인을 양산할 수는 없을까 고민도 해보았지만, 지금 내 힘으로는 효율이 떨어져 그것도 보류한 상태였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과 계약하면 당신의 흑염룡을 멋지게 만들어 줄 수······.]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자신과 계약하면 올림포스의 전설주를 특전으로······.] [성좌, ‘매금지존’이 자신과 계약하면 중급 스타터팩을······.] 허공에서 쏟아지는 성좌들의 후원 메시지. 나조차 받지 못한 초반 특전들을 주겠다는 성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원작대로였다면 3회차의 유중혁도 이 정도의 초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왜 고작 0회차가 이렇게 유명해졌냐고? 이유는 간단했다. [화신 ‘유중혁’이 성좌들의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0회차 유중혁의 간덩이가 부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딴 걸 준다는 놈들은 많아. 히든 피스 정보들을 알려줄 녀석은 없나?” [성좌, ‘매금지존’이 땀을 뻘뻘 흘리며 그런 건 잘 모른다고 말합니다.] “미래의 계시 같은 걸 보여줄 수 있는 놈들도 없나?” [성좌, ‘하늘 걸음의 주인’이 그걸 유출하는 건 불법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의 마왕보다도 못한 놈들이군.” [일부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이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합니다!] 그렇게 ‘구원의 마왕’은 본인 의도와는 무관하게 0회차에 맹렬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구원의 마왕! 미래 계시의 유출자? ―<올림포스>, 계시 유출은 개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혀······. ―마왕 협회, ‘구원의 마왕’이란 마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 ―심연의 흑염룡, ‘구원의 마왕’은 예전에 자기가 쓰던 수식언이랑 비슷하다고 주장······. <일간 스타 스트림>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을 읽으며, 나는 새삼 성좌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자각하고 있었다. 화신에서 성좌가 되는 것과, 시나리오 시작부터 성좌인 것은 이토록 다르구나. [당신의 유명세가 <스타 스트림>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일부 호사가들이 ‘사기꾼 구원의 마왕’의 노래를 지어 퍼트립니다.] [유명세 상승으로 5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어쨌거나, 내게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헤헤. ‘구원의 마왕’님. 이번 달도 채널 구독 계속하실 겁니까?]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연히 할 거라 대답합니다.] [마왕님 덕에 이번 달 매출이 크게 올랐습니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마왕님의 진명이 어떻게 되시는지······ 솔직히 마왕님처럼 개연성을 쥐똥으로 아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아, 하하하. 이건 물론 칭찬입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진명은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사실 저는 마왕님처럼 대단한 분이 제 채널에 쭉 계셔주시는 게 조금 의아하기도 합니다. 저는 딱히 대단한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 없는 표정의 비형. 나는 그런 비형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은 빚을 갚는 것뿐이라 말합니다.] * 한 번 읽은 책은 전보다 힘을 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전혀 뜻밖의 곳에서 애를 먹기도 한다. 내게 있어 0회차는 그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화신 ‘유중혁’이 자신의 배후성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유중혁의 0회차는 나의 세계선과 비슷했다. 정해진 전개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이야기. ······이쯤 왔으면, 이미 본래 0회차의 전개대로 돌아가긴 무리겠지. “중혁 씨. 바리케이드는 여기 설치하면 되겠습니까?” 강철검제 이현성. “어이 대장! 나한테도 검술 가르쳐주기로 했잖아!” 망상악귀 김남운. “사부. 이번 시나리오 끝나고 아이템 파밍 좀 다녀와도 돼요?” 해상제독 이지혜. 그리고 여기에, 본래의 0회차에는 없었을 인물 하나가 추가되었다. 「금호역을 지날 때, 꼭 그 사람을 영입해.」 어쩌면 그것은 내 욕심이었다. 이 세계에는 유상아도, 이길영도, 나도 없지만······. 적어도 한 사람, <김독자 컴퍼니>에서 영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현성 씨. 거기 비뚤어졌잖아요.”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 다른 일행들이 빠뜨린 사항들을 하나하나 점검하는 정희원을 보며, 나는 오래된 감회에 젖었다. 「“난 그때 되게 좋았어요. 같이 백화점 가서 옷도 사고, 멋지게 <에덴> 방문했을 때.”」 49%의 아바타 쪽에 많은 기억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내겐 많은 기억들이 남아 있었다. 폭풍처럼 밀려오는 기억의 페이지 위에서, 나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래서, 당신은 이렇게밖에 못하는 사람인 거야. 그렇지?”」 내가 기억하는 정희원은, 잘 있을 것이다. 그 세계의 이야기는 무사히 끝났으니까. 그곳의 나와, 일행들과 함께. 한강에 가고, 바다에 가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세뇌하듯 중얼거리며 지금 눈앞의 당면한 세계에 집중하려 애썼다. 「이 곳 도 너의 세 계는 아 니야」 알아. 「이제 김독자의 세계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세계가 꿈인 존재에게, ‘단 하나의 현실’ 같은 것은 의미가 없다. 나는 그 사실을 잊기 위해 눈앞의 광경에 몰두했다. 차라리 생각 없는 성좌가 되는 편이 좋았다. 시나리오를 즐기고,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이야기의 탐식자가 되어버리면, 그 모든 것들을 잊을 수 있었다. “오라버니! 이 미아가 해냈어요!” 그리고 다행히도, 이 이야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였다. “남들 앞에서 그런 말투 쓰지 말라고 했잖아.” “히잉.” 동생의 말투를 지적하는 유중혁을 보며 새삼 쓴웃음이 나왔다. 네 말투나 고쳐라 자식아. 아무리 프로게이머라지만 저놈도 사람이랑 대화라는 걸 했을 텐데. 어떻게 저딴 말투로 사회생활이 가능했던 걸까. 얼굴의 개연성인가? “곧 네 번째 시나리오가 시작된다. 모두 준비해라.” 유중혁은 내가 전해준 정보를 통해 조금씩 성장했다. 「김남운이 엇나가지 않도록 잘 관리해. 그놈은 널 동경하니까 그걸 이용하면 편할 거야.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없다는 걸 명심해.」 막대한 개연성을 희생해서 매번 전해준 정보들. 「극장 던전에서는 까불지 말고 차분하게 진행해. 마지막 보스는 정신계 공격을 거는 놈이니까 가기 전에 꼭 이 스킬을―」 「공필두는 초반 시나리오에서 잘 묶어두면 유용하게 쓸 수 있어. 아주 못된 아저씨는 아니니까 잘 회개시켜 봐. 힌트는―」 처음에는 의심하던 유중혁도, 내 조언이 하나둘 맞아떨어지자 내게 차츰 신뢰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긴, 누구 덕에 여기까지 왔는데. 솔직히 아직도 ‘구원의 마왕’을 배후성으로 선택 안 한 걸 보면 좀 괘씸할 정도다. “그런데 대장은 어떻게 그렇게 시나리오를 잘 알아요?” “······도와주는 녀석이 하나 있다.” “도와주는······?” 다행히 0회차의 유중혁은 아예 은혜를 모르는 녀석은 아니었다. ―다음 계시를 내놔라. 유중혁은 무려 30만 코인이라는 거금을 비형에게 지불하여 일대일 비밀 통신을 개설했다. 내가 주요 정보들을 제공하니 당연한 선택이었겠지만, 그래도 내심 기특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화신 ‘유중혁’에게 ‘계시의 편린’을 하사합니다.] 「네 번째 시나리오의 핵심은 ‘절대 왕좌’야. 명심해야 할 것은, 절대로······.」 츠츠츠츠츠······. 녀석에게 정보를 건네줄 때마다, 막대한 양의 개연성이 소진되고 있었다. 이 세계의 기본 단위는 ‘이야기’. 유중혁의 뒤통수를 갈기는 것보다 미래를 누설하는 것이 개연성을 더 많이 해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놈들이다!” 밀려오는 적들을 보며, 유중혁의 일행들이 동시에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이제 곧 네 번째 시나리오의 최종막이 시작될 것이었다. [제4의 벽]이 말했다. 「네 가 무슨 짓을 하는 건 지 알지」 파스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끝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서울 7왕들과 맞서 싸우는 유중혁의 모습을 보았다. 녀석의 손에서 번뜩이는 [진천패도]가 용맹한 울음을 터트렸다. 「네 가 아무리 노력 해 도」 0회차의 이야기는, 본래의 원작과는 완전히 바뀌었다. 이 세계선에서, 유중혁은 다른 어떤 유중혁과도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 「저 녀 석 은 벽 의너머 를 볼 수 없어」 나는 [제4의 벽]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이 세계선에는 [제4의 벽]을 얻을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은 즉, [최후의 벽]을 열 수 있는 마지막 열쇠가 없다는 뜻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0회차의 유중혁은 그 열쇠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최후의 벽]을 넘을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녀석의 불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가장 오래된 꿈’인 한, 시나리오가 끝나도 녀석의 세계선은 멸망하지 않을 테니까. 「어떤 진실은, 존재 자체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나는 녀석에게 ‘진실’을 보여줄 수는 없어도. 이 이야기의 온당한 ‘종막’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축하합니다! 화신 ‘유중혁’은 ‘절대 왕좌’의 모든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마침내 서울 7왕을 모두 물리친 유중혁이 절대 왕좌의 앞에 섰다. 밤하늘이 빛을 토하고 있었다. 서울 돔의 모든 성좌들이, 그리고 광화문에 모인 모든 시민들이 유중혁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품속에서 천천히 한 자루의 칼을 뽑아 들었다. [사인참사검]. 나는 북두성군을 대신하여 녀석에게 힘을 보태주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화신 ‘유중혁’을 바라봅니다.]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하는 일곱 개의 별자리. 유중혁이 쥔 [사인참사검]이 눈부신 광휘를 일으키며 성유물로 진화하고 있었다. [외신들이 당신의 가공할 힘에 경악합니다!] [북두성군들이 당신의 존재에 깜짝 놀라 기함합니다!]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이······.] “나는, 네놈들처럼 추한 인간들을 대표할 생각이 없다.”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네놈들처럼 추잡한 성좌들의 노리개가 될 생각도 없고. ······나는 ‘절대 왕좌’에 앉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들었던 것도 같은 말들. 유중혁의 검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이 왕좌에 앉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사인참사검. 성유물에 담긴 성좌의 연을 끊는 검. 유중혁은 그 검을, [절대왕좌]를 향해 끊임없이 내리쳤다. 내리치고, 내리치고, 또 내리치고. 이내 쩌저저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타 스트림>의 밤하늘이 백야처럼 밝아졌고, 범람하듯 메시지가 터져 나왔다. 시나리오의 뒤틀림으로 인한 개연성 후폭풍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 범람하는 후폭풍을 막아냈다. [세계선이 당신의 지나친 간섭에 불만을 갖습니다!] [해당 ‘덮어쓰기’는 당신의 장악력을 넘어선 행위입니다!] [당신의 설화 일부가 소실됩니다!] 지금의 유중혁은 0회차였다. 회귀자가 아니니 미래의 정보도 알지 못했고, [전승]을 통해 지난 회차에서 사용했던 기술들을 복원시킬 수도 없었다. 앞으로의 시나리오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녀석은 나처럼 [책갈피]를 쓰지도 못하고,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김독자는, 그 부족한 부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알고 있었다.」 유중혁은 회귀하지 않을 것이고. ‘은밀한 모략가’가 되지 않을 것이며. 세계선을 떠도는 불행한 순례자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유중혁이 온당히 맞아야 할 끝을 볼 것이다. [화신 ‘유중혁’이 최초의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화신 ‘유중혁’의 새로운 설화가 생성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중혁. 그 유중혁의 배후에서 백호의 형상을 띤 설화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 나를 지켜주었던, 바로 그 설화였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탄생하였습니다.] 부서져 나가는 오른손의 엄지 사이로, 환희에 찬 유중혁의 얼굴이 보였다. 이 이야기에 ‘김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김독자가 정말로 만들고 싶었던 이야기.」 천천히 눈을 감자, 눈앞에 페이지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미 누군가가 낙서처럼 흔적들을 남겨 놓은, 오래된 페이지. 「그 순간 김독자는 결심했다. 원작에는 없었던 그 이야기를, 자신이 직접 써보기로.」 나는 그 페이지 위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그리고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시간이 흘렀다. 5번, 6번, 7번, 8번······. 시나리오가 넘어갈 때마다 내 손가락이 하나씩 사라졌다. 사라진 손가락은 시간이 지나며 다시 자라났으나, 예전보다 크기가 줄어 있었다. 나는 그 손가락으로 계시를 썼다. 원작의 유중혁이 원했던 끝. 내가 보고 싶었던 결말. 내가 실수했던 것과 새로이 알게 된 것들. 그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가 되어, 곧 설화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마침내, 0회차의 유중혁은 시나리오의 최종장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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