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화

525화 유중혁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검을 짚었다. 그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오랜 싸움에 지친 그의 눈이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네놈을 배후성으로 선택한다면, 네놈 모습을 볼 수 있는 건가?” [성좌, ‘구원의 마왕’이 고개를 젓습니다.] “네놈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스타 스트림>의 별들은 모두 떨어졌는데, 어디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지?” 유중혁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아니,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너는······ 그 [벽] 너머에 있는 것이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설마 0회차의 유중혁이, 거기까지 눈치채고 있을 줄은 몰랐다. 유중혁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 세계는 무언가 이상했다.” 유중혁에게서 처음 듣는 노회한 목소리였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된 사내. “어린 시절의 기억도 없이, 갑자기 세상에 내던져져 삶을 살았다. 불법 작업장을 전전했고, 운 좋게 실장의 눈에 들어 프로게이머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내 여동생이라는 아이를 내게 버렸다.” 편의적으로 만들어진 삶. 비극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역경. “부모를 찾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대통령의 숨겨둔 자식도 찾아내는 이들조차, 내 부모를 찾지 못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것 따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성좌, ‘구원의 마왕’이······.] “묻겠다, 구원의 마왕. 나는 누구지?” 심장이 울렁거렸다. 결국 유중혁이 그 의문에 도달하고 말았다는 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다. 무슨 말이든― “네가 있는 그 벽 너머에, 이 세계의 비밀도 있는 건가?” [성좌, ‘구원의 마왕’이 지금 행복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행복하다.”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유중혁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그 벽 너머가 궁금하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네가 내게 베푼 호의의 정체가 궁금하다. 내 삶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지, 나는 어디서부터 태어나 왜 이곳에 왔는지 궁금하다. 만약 한 번 더 기회가 있다면―” 어디선가 시곗바늘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김 독 자」 유중혁에게 [벽]의 너머를 보여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내가 ‘가장 오래된 꿈’이라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언젠가 네놈이 말했지. 너와 배후 계약을 맺는다면,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그때는 의심스러워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면······.” 허공을 헤매는 유중혁의 손가락이, 언젠가 그에게 도달한 로그 메시지를 찾아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신의 배후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지금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밀려오는 현기증에, 사위의 흔들림이 심해졌다. 나는 [제4의 벽]을 불렀다. ‘제4의 벽.’ 「안 돼」 녀석은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유중혁이 [최후의 벽]을 넘기 위해 필요한 조건. 그것은 ‘최후의 벽의 파편’을 모두 모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4의 벽]은 유중혁에게 전이될 마음이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메시지를 전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그것은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지?” [성좌, ‘구원의 마왕’이 그것은 아주 힘든 길이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힘들다고?” 내가 유중혁에게 [제4의 벽]을 전해줄 수 없다면, 유중혁이 결말을 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네가 [벽]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귀’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회귀?” 츠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전신이 개연성의 스파크로 물들었다. 세계선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이것은, 지금의 유중혁이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라고. 하지만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세계선의 저항을 떨쳐냈다. 더 많은 개연성을 희생하더라도, 나는 녀석에게 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1864」 “1864? 무슨 의미지?” [성좌, ‘구원의 마왕’이 네가 결말을 보기 위해 회귀하게 될 숫자라고 말합니다.] 내가 살아온 모든 기억들이, 설화가 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심지어 그 회귀를 모두 살아내더라도, 네가 결말을 볼 수 있을 확률은 극히 낮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지금의 유중혁은 ‘본래의 세계선’에서 벗어났다. 그는 이제 원작의 유중혁이 아니었다. 시간 분기는 갈라졌고, 미래는 사라졌다. 설령 1864회차에 도달한다고 해도, 그가 [제4의 벽]을 가진 ‘김독자’를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있 어」 뭐? 「이번 회 차의 기억을지 우면 돼」 순간 소름이 돋았다. 「만약, ‘원작’에 남아 있었던 0회차의 기억 단편을 주고, 유중혁을 다음 회차로 보낸다면 어떨까.」 그러면 세계선은 이 유중혁을 ‘원작의 유중혁’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는 다시 원작의 세계선에 편입될 것이고, 이 생의 기억을 잊은 채 다시 1회차와 2회차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유중혁은 다시 불행해지겠지.」 「네가 왜 그것 을 결 정 하 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가능성이 낮아도 상관없다.” [화신, ‘유중혁’이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한번 생을 살 수 있다면. 그래서, 내 손으로 결말을 볼 수 있다면, 세계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면―” [화신, ‘유중혁’이 당신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별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당신의 화신이 당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이제는 말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유중혁.] 오랜만에 발해 보는 진언이었다. 가공할 스파크가 주변에 불어닥쳤다. 기파를 최소한으로 억제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커다랗게 눈을 뜬 유중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네 진짜 목소리인가?” [그래.] “······잘 들리는군.” 점점 귀가 먹어가는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늙은 유중혁의 표정 위로 희미한 주름이 번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외면하며 말했다. [너를 회귀시켜 줄 수 있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다음 회차부터는 너를 도울 수 없어.] 유중혁이 이 제안을 거절하게 할 방법. 그것은 진실을 말해주는 것뿐이었다. [너는 순수하게 혼자만의 힘으로 시나리오를 헤쳐가야 할 거야. 그 시나리오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지독할 거고, ······끝내 도달한 결말에서, 네가 원하지 않는 것과 조우하게 될 수도 있어.] 나는 유중혁을 생각했다. 3회차의 슬픔을, 4회차의 비탄을, ‘은밀한 모략가’의 절망을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회귀’를 선택한다면······ 너는, 이 회차의 기억 대부분을 가지고 갈 수 없어.] 그 말에 유중혁이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아무리 결심이 굳다고 해도, 이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주 단편적인 시나리오의 기억들만이, 네게 남아있게 될 거야.] “······.” [네게 소중한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뜻이야. 네가 기억하는 이설화도, 이현성도, 이지혜도, 그 모든 것이 전부―] “내가 잊는다고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분명히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분명히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각인처럼, 그 말은 내 뇌리의 어딘가를 치고 들어왔다. 마치 거대한 운명이 나를 덮쳐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김독자는 이것이 0회차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0회차에 ‘가장 오래된 꿈’의 흔적이 없었던 이유. 그럼에도 유중혁이 1회차와 2회차로 넘어갈 수 있었던 이유. 어쩌면 그것은. [······빌어먹을 자식.] 나는 손을 모아 내게 모인 꿈 장악력을 사용했다. 불어오는 개연성의 후폭풍에 한쪽 팔 전체가 비틀릴 것처럼 아파 왔다.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유중혁의 회차를 떠올렸다. 그가 살아갈 생애와, 내가 아는 설화를 모아 단 하나의 성흔을 빚어냈다. 이 세계의 동력이자, 유중혁의 모든 비극을 일으킬 단 하나의 성흔. [성흔, ‘회귀’가 생성되었습니다!] [당신의 성흔이 당신의 화신에게 전해집니다!] 유중혁은 만족한 듯 그 성흔을 받아들였다. [성흔 ‘회귀 Lv.1’이 발동을 준비합니다.] “아까 내가 기억을 잃게 될 거라 했지.” [······그래.] “혹시 네놈에 관한 것도 잊게 되는 건가?”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유중혁이 다시 물었다. “네놈이 알려준 간편한 정보들도?” [······그래.] “그렇군.” [후회되면 지금이라도―] “다음 회차부터는 나를 돕지 않는다고 했지.” [돕지 못해.] “도와도 괜찮다.” [도울 수 없다고.] “화신뿐만 아니라 성좌에게도 시나리오는 있다고 들었다. 어쩌면 네놈도 그렇겠지.” [······.] “회귀를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네놈을 만날 수도 있는 건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지껄이는 소리였다. 그 어떤 의미도, 미래도 헤아리지 못하는 멍청한 0회차의 말이었다. 말해지지 못한 언어와 함께, 유중혁의 귀는 사라지고 있었다. 「유중혁의 눈에 밤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태어난 근원을 궁금해하는 아이처럼, 유중혁은 [벽]이 있을 하늘을 어림하며 손을 뻗었다. 그는 언젠가 ‘은밀한 모략가’가 될 것이고. 동시에 내가 알던 1864회차의 유중혁이 될 것이다. 나를 원망하게 될 것이며, 세계의 진실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성흔, ‘회귀 Lv.1’이 발동합니다!] [당신은 성흔의 발동에 동의하였습니다.] 유중혁의 몸이,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팔, 다리, 그리고 몸통. 마지막 순간, 유중혁이 나를 불렀다. “구원의 마왕.” 무척이나 기이하고 신비로운 표정으로. “너도 어디선가 계속 살아가길 바라지.” 은빛 가루로 흩날리는 유중혁의 화신체가 이 세계선을 떠나고 있었다. [해당 세계선의 ‘덮어쓰기’가 등장인물 ‘유중혁’의 다음 회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당신의 화신이 당신의 수식언을 잊습니다.] [당신의 화신이 당신과 관련된 기억을 잊습니다.] [당신의 모든 정보가 ‘???’로 처리됩니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할 그의 기억은, 이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저 기억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오래도록 그 반짝임을 바라보았다. * “야, 유중혁! 왜 대답이 없어!” 뒤통수를 빡, 하고 내리치는 충격에 유중혁은 비틀거렸다. 등을 돌리자, 그곳에 눈살을 찌푸린 한수영이 있었다. “그래서, 그 ‘집단 회귀’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거냐고.” “갑자기 기억이 났다.” “뭐가?” 멍청한 얼굴로 돌아본 유중혁이, 한수영을 향해 중얼거렸다. “0회차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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