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화
521화
한수영의 단도는 정확히 김독자의 어깻죽지를 스쳤다. 반사적으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 쥐는 김독자. 한수영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아바타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
<스타 스트림 시스템>이 약화 되면서, 이젠 성좌들도 다치면 설화 대신 피를 쏟는다. 그러니 저 김독자가 진짜라면 반드시 피를 흘려야 했다.
“너 진짜 미쳤어? 이게 뭔 짓거리야!”
“아저씨!”
경악한 신유승이 김독자에게 다가갔다. 이현성도, 이지혜도.
비틀거리는 김독자가 감싸쥔 왼쪽 어깨.
「정말로 한수영의 말이 맞다면.」
그리고 아주 천천히, 김독자의 손바닥이 어깨에서 떨어졌다.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마세요.”
누가 먼저 숨을 삼켰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행 모두는 똑똑히 보았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주 새빨간 선혈이.」
한수영도 그것을 보았다. 하지만.
“······잠깐만. 아직 끝난 거 아냐! 피를 흘리는 아바타도 있어.”
한수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 또한 그런 [아바타]를 만들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기억을 투여받은 아바타는 피를 흘린다.」
멀리서 채를 써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이쪽 일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입도 뻐끔거리지 않는 그의 모습이 한수영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녀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이었다.
“목을 잘라보면 알아. 아바타는 목을 잘라도 움직이니까.”
“지금 뭐라고 했어?”
서슬 퍼렇게 굳어진 정희원의 표정을 보고서야, 한수영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판자의 검]에 일렁이는 [지옥염화]의 기운. 시나리오가 끝난 후, 한 번도 발동하지 않았던 우리엘의 성흔. 정희원이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딴 짓을 하면 목이 잘리는 건 네 쪽이 될 거야.”
자신을 가리킨 [심판자의 검]을 보며, 한수영도 천천히 [흑염]의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수영은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둘을 만류하는 이설화의 목소리. 정희원의 뒤쪽에서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신유승과 이길영의 표정을 보는 순간, 한수영의 안에서도 뭔가가 끊어졌다.
「어쩌면, 여기까지 함께 온 것이 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수영은 자신이 이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때 ‘선지자들의 왕’이었고, ‘가짜 왕’이라 불리었다. 김독자가 만들어 낸 거창한 이야기의 악역에 불과했다.
한강에서 모두와 함께 피자를 먹고, 콜라를 마신다니.
애초에 이 모든 것은 한수영에게 어울리지 않는 결말이었다.
쿠구구구구!
두 개의 상반된 불꽃이 만들어 낸 대치상황이 계속되던 순간,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흐름을 끊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나 맥주 사왔는데.”
양손에 비닐봉지를 든 장하영이 그곳에 있었다.
“나 늦었다고 몰래카메라 하는 거야?”
그 목소리에 깃든 불안감에, 일행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치 이곳에 처음으로 온 목적을 환기한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들 하지.”
도마 위에 꽂힌 [흑천마도]에서 초월의 격이 산란했다. 그리고 공원 내를 지배하던 살기가 순식간에 씻은 듯 사라졌다.
“저녁 시간이다.”
대신 풍겨온 냄새가 잊었던 허기를 자극했다.
일곱 판의 피자와 치킨들이 접시 위에 세팅되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이지혜가 탄식했다.
“사부는 진짜······.”
진지한 유중혁의 얼굴을 본 일행들은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음식을 향해 제일 먼저 달려간 것은 장하영이었다.
“다들 뭐해! 빨리 안 와?”
그 광경을 본 공필두가 실소를 흘렸다. 분위기가 조금 풀리려 하자, 김독자도 입을 열었다.
“전 괜찮습니다. 수영이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해해요. 솔직히 저 최근에 좀 기억력이 나빠지긴 했거든요. 마치 중요한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아서······.”
“독자 씨, 이건 그렇게 넘어갈 일이······!”
“일단 먹고 이야기하죠. 유중혁이 누구한테 음식 만들어주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인상을 찌푸린 정희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행들은 하나둘 돗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기어코 정희원이 역정을 냈다.
“이게 진짜······.”
한수영이 보이지 않았다.
*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폭죽음. 화장실의 세면대 위로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를 바라보며, 한수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실수했다.’
자신답지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흥분했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돌아가 해명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일행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애초에 기억을 나눠준 아바타를 ‘가짜’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주머니에서 가는 진동음이 울렸다.
―수영 씨.
유상아가 보낸 톡이었다. 한수영은 다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진동이 울렸다.
―한수엿ㅇ.
“이게 진짜.”
―ㅎㅎ 오타에요.
답장하려는 순간, 누군가의 기척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심통 그만 부리고 돌아가요.”
어깨를 눌러 잡는 길고 흰 손가락. 한수영이 손을 떨쳐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됐어. 내가 가봤자 분위기만 망칠 텐데.”
“그렇지 않아요. 다들 이해할 거예요.”
“그러게 됐다니―”
“이렇게 말해주길 바라니?”
유상아의 눈매가 천천히 변했다.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개방된 틈으로, 멀리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광경을 지키듯 선 유상아를 보며, 한수영의 머릿속에 기이한 예감이 스쳤다.
“너······.”
자신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던 유상아의 표정. 어쩌면 유상아는······.
“언젠가 독자 씨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만약 이 세계의 원인이 ‘가장 오래된 꿈’이라면, 그 녀석을 없애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뭐?”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한수영은 유상아의 멱살을 잡은 채 벽에 밀어붙였다.
“너······ 알고 있는 거 전부 불어.”
여전히 차분한 유상아의 눈을 보며, 한수영은 점차 진실을 깨닫고 있었다.
「유상아는, [제4의 벽]의 사서로 활동한 적이 있다.」
일행들 중 유일하게 김독자의 내면에 들어갔던 사람.
무수한 책들이 꽂혀 있는 그 장서관에서, 유상아는 무엇을 보았을까.
“말해! 거기서 뭘 본 거잖아! 그 자식, 대체 무슨 생각하고 있었던 건데!”
“······.”
“넌 왜 말리지 않았던 거야?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내게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유상아의 말에 한수영이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절반으로 나눠서 세계를 지키는 것. 하나는 세계를 지켜볼 ‘독자’가 되고, 다른 하나는 ‘등장인물’이 되는 것.”
한수영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저 ‘김독자’는, 그래서 피를 흘리는 것일지 모른다고.
모두가 시나리오에서 해방되던 그 날, 여전히 다른 쪽의 김독자는 그 열차에 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돌아보고, 유중혁이 돌아보았던 그 날. 열차에서 내리지 않은 김독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게 이 세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 사람의 선택이라면.”
“왜 그딴 식으로 말해?”
덜덜 떨리는 손이 유상아의 멱살을 점점 더 강하게 틀어쥐었다.
유상아는 가볍게 손을 올려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이게 나라는 사람의 선택이야.”
“너나 김독자나 똑같아.”
“수영아. 정말 다른 일행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해?”
한수영은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멸살법 이야기를 하지 않는 독자 씨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정말로?”
“그러면―”
“우리와 함께했던 기억 대부분은, 저곳의 ‘김독자’ 씨가 가지고 있어.”
돗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일행들이 보인다. 빙긋 웃는 정희원과 맥주를 따르는 이현성의 모습. 취한 공필두가 노래를 불렀고 이설화가 박수를 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하영이 과장된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러니까, 그때 마계에서······.
모두가 기억하는 김독자는 다르다.
한수영에게 김독자가 ‘독자’라면, 신유승과 이길영에게 김독자는 ‘부모’였다. 이현성에게는 ‘탄피’였고, 유상아에게는 ‘회사 동료’였다. 이지혜에게도, 정희원에게도, 장하영에게도, 그리고 이설화나 공필두에게도······.
“저 사람도 독자 씨야. 얼마만큼의 독자 씨든, 저건 틀림없는 독자 씨야. 우리와 함께했던 독자 씨라고.”
멀리서 축제의 불꽃이 번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동자. 그들이 살았던 시간들이 스러지는 것이 보였다. 한수영은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일행들 사이에서 웃는 김독자의 얼굴.
저것은 분명, 김독자가 바라던 풍경이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유상아의 말이 맞았다.
김독자는 선택했고, 일행들도 그 선택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했다.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고, 누구도 더 이상의 상처를 원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의 결말이었다.
유상아가 물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를 가리는 게 의미 있는 일일까?”
무수한 회차의 유중혁에게 ‘진짜’를 매기는 것이 의미 없는 것처럼, 반으로 갈라진 김독자 중 누가 ‘진짜’인지를 말하는 것도, 의미는 없다.
유상아의 멱살을 놓으며, 한수영은 입을 열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가리자는 게 아냐.”
유상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흔들리는 망막 위에 한수영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 그 자신이, 이런 말을 한다는 사실에 동요하면서, 한수영은 말했다.
“거기에 아직 김독자가 남아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어쩌면 그 ‘김독자’를 필요로 하는 이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멸살법’만 좋아할 뿐인 그 미치광이를 원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한 사람은.
―아저씨!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일행들이 앉아있던 돗자리에서 소란이 일고 있었다. 어디선가 서늘한 피냄새가 느껴졌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유상아와 한수영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신유승이 피범벅이 된 손으로 울고 있었다.
“피가, 피가 멎질 않아요.”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김독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단도를 쥔 한수영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설마······.
“아까의 상처 때문이 아니에요. 이건―”
김독자의 맥을 짚은 이설화의 낯빛이 굳었다. 김독자의 육신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가 순식간에 거즈를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즈에 흡수된 피가 기화하기 시작했다.
파스스스······.
설화가 사라지듯 부서지는 핏방울. 이설화가 외쳤다.
“공단으로 데려가요.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