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화
520화
지난 3개월간, 한수영은 매일매일을 기묘한 예감 속에서 살았다.
그 시작은 단출했다.
―유중혁. 그거 알아?
―뭐냐.
―저 녀석, 이제 토마토 잘 먹어.
처음에는 그저 소소한 변화라 여겼다. 이제 시나리오도 끝났으니, 녀석도 하나둘 바뀌는 모양이라고. 그렇게만 생각했다.
―야, 김독자. 요즘 왜 이렇게 얼빠져 있냐?
―어? 어······.
―근데 시나리오 진짜 끝난 거 맞아? 왜 시스템이 소멸하질 않지? 너도 아직 스킬 쓸 수 있지?
―음······ 아마 없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지.
시나리오는 끝났으나, 세계는 말끔하게 원상태로 돌아가진 않았다. 마치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처럼.
여전히 사람들이 스킬이나 성흔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엄밀히 따지면, 그 소설을 쓴 ‘원작자’를 찾기 전까지는 모든 게 끝났다고 볼 수는 없겠지.
한수영도 유중혁의 말에 동의했다. 이 세계가 존재했던 것은 ‘가장 오래된 꿈’이 ‘멸살법’을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 소설을 쓴 원작자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결국 그 존재를 찾아야만 끝나는 것이다.
―tls123은 대체 누굴까? 지금까지 몇 가지 추론을 해봤지만 죄다 틀렸었잖아. 가장 유력했던 ‘가장 오래된 꿈’도 작가는 아닌 거 같고······ 김독자, 넌 어떻게 생각해?
이 의문을 해결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김독자였다.
3149편에 달하는 ‘멸살법’을 모두 읽은 독자.
그런데, 그 김독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 글쎄. 뭐, 이제 와서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싶기도······.
다른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김독자였다.
‘멸살법’을 끝까지 완주한 유일한 독자.
한수영이 아는 최고의 독자인, 김독자였다.
“말해. 너 누구냐고.”
그래서 한수영은 생각했다.
「만약 눈앞의 김독자가 가짜라면.」
“수영 씨! 대체 무슨―”
달려온 이현성의 고함과 동시에, 신유승이 한수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누나.”
이길영도 마찬가지였다. 앞을 엉거주춤 막아선 소년이, 긴장한 눈으로 한수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단도의 칼날을 본 일행들의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었다.
“언니. 해명 가능해?”
어느새 식칼을 내려놓고 자신의 쌍룡검을 쥔 이지혜가 곁에 서 있었다.
놀란 이설화와 눈을 가늘게 뜬 정희원. 그에 반해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는 유상아도 보였다.
잠시 생각하던 한수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김독자의 멱살을 놓았다. 맥없이 엎어진 김독자가 죄인처럼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녀석은 김독자가 아냐. 다른 누구도 아니고, 김독자가 그걸 기억하지 못할 리 없어.”
“뭘 말야?”
“멸살법.”
그 말에 일행들이 동시에 김독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늘 ‘멸살법’을 입에 달고 살던 김독자.
한수영은 골치 아픈 문제를 해설하는 강사처럼 머리를 짚더니, 일목요연하게 지난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방금 내가 말한 건 ‘멸살법’이 아니라 내가 썼던 소설에 나오는 내용이야. ‘멸살법’에는 일행들이 한강에서 오붓하게 식사를 하는 내용 따위 안 나온다고.”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언니도 그 소설 봤어요?”
“초반부만. 적어도 3회차에 그런 내용이 없다는 건 확실해.”
그러자 정희원이 대거리했다.
“그 정도야 착각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애초에 그렇게 긴 소설 내용을 전부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해, 김독자라면. 지금까지 너희가 어떻게 시나리오 헤쳐왔는지 다 잊어버렸어? 그 김독자가 진짜로 기억 못 할 거라 생각해?”
한수영은 으르렁거리며 김독자를 돌아보았다.
“야. 유중혁이 아스모데우스에게 죽은 게 총 몇 번인지 말해봐.”
한수영의 질문에, 김독자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한수영이 다시 역정을 내려는 순간, 김독자의 입술이 열렸다.
“한수영.”
고저가 없는 목소리. 순간 한수영의 눈동자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스쳤다. 그리고.
“미안한데, 정말로 잘 기억이 나질 않아. 요즘 나도 ‘멸살법’을 안 읽어서······.”
“이거 봐! 이 자식은 김독자가 아닌······!”
“아저씨.”
단도를 쥔 채 앞으로 나서는 한수영을 막은 것은 신유승이었다. 양손으로 도자기를 빚듯 김독자의 손을 쥔 신유승이 물었다.
“내가 한강에 와서 뭐 먹고 싶다고 했는지 기억해요?”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요리를 만들던 유중혁의 손이 멈췄다. 아직 요리는 채 완성되지 않은 채였다. 김독자는 곧바로 답했다.
“피자랑 콜라잖아.”
“형! 저는, 저는요?”
“길영이는 바다에서 치킨 먹고 싶댔지. 미안, 바다는 다음에 꼭 가자.”
그렁그렁한 눈의 이길영과 신유승이 한수영을 노려보았다.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만. 문제가 너무 쉽잖아. 겨우 그 정도로―”
그러자 이번에는 정희원이 나섰다.
“독자 씨. 내 칼 이름이 뭐예요?”
“심판자의 검. 그거 재료 모은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독자 씨, 저한테 처음으로 주셨던 물건 기억하십니까?”
“낡은 철제 방패잖아요.”
일행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심지어 공필두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어이, 충무로 시나리오에서 나한테 냈던 벌금 기억하나?”
“안 냈잖아요.”
“개자식. 지금 당장 내지 않으면─”
“아저씨, 전에 나한테 그랬잖아. 지혜야, 솔직히 김컴 멤버 중에서 지혜 네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해.”
“그런 적 없는데.”
이지혜가 젠장, 하고 중얼거렸다.
“······독자 아저씨 맞는데?”
일행들의 표정에서 피어나는 묘한 안도감.
사태를 지켜보던 김독자가 말했다.
“갑자기 왜들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김독자가 맞습니다. 한수영 넌 또 왜―”
“야, 너 ‘멸살법’이 총 몇 회차였는지는 기억해?”
“수영아.”
결국 보다 못한 정희원이 나섰다.
“뭐 때문에 이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모처럼 나왔는데 적당히 하자.”
“맞아요, 수영 씨.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오해?”
단도를 쥔 한수영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야, 유중혁! 넌 뭐 할 말 없어?”
그 말에, 묵묵히 채를 썰던 유중혁이 무심한 눈으로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김독자를 한 번 보고, 일행들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도마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한수영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저게 진짜······.”
고개를 떨어트리자, 바닥을 구르는 맥주 캔이 보였다. 한수영은 그것을 주워 캔을 땄다. 그리고 그대로 원샷. 거칠게 입술을 닦은 한수영이 말했다.
“씨발······ 그래, 나 혼자 이상한 사람이다 이거지?”
한 캔으로는 부족했는지, 한수영은 한 캔을 더 땄다.
“그래, 다들 시나리오 깨느라 힘들었던 거 알아. 생각하기도 지쳐버렸고, 이젠 쉬고 싶다는 것도 잘 안다고. 나라고 안 그런 줄 알아? 나도 쉬고 싶어.”
푸슈슛, 하는 소리와 함께 맥주 거품이 튀어 올랐다.
“근데 니들, 진짜로 저 김독자가 진짜라고 생각해?”
“한수영.”
“닥쳐. 내 이름 부르지 마.”
한수영의 뺨이 은은하게 붉어져 있었다.
한수영의 머릿속에서, [예상 표절]의 설화가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어쩌면 일행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녀가 틀렸고, 저 김독자는 진짜인지도 모른다.」
고작 멸살법의 몇몇 장면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김독자를 김독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수영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성급했다. 논리적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자신의 감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이 이토록 격렬하게 반응하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한수영은 중얼거렸다.
“내가 기억하는 김독자는······.”
재미도 없고 설정으로 가득한 소설.
무려 3천 편이나 되는 소설을 인내심 있게 읽을 수 있는 인간.
「“언젠가 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면, 다시 소설을 쓰고 싶어질지도 몰라. 그때, 내 소설을 읽어줘.”」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
「“알았어. 읽을게.”
“어쩌면 3천 편 넘을지도 몰라.”
“딱 내 취향이겠네.”
“재미없을지도 몰라.”
“네가 쓰는 데 재미가 없겠냐?”」
그런 김독자가, 다른 걸 잊어도 ‘멸살법’을 잊을 리 없었다.
알코올 때문일까. 머릿속으로 점차 열기가 번지는 것 같았다.
「만약에 이 ‘김독자’가 가짜라고 한다면, 그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원작자인 tls123의 장난? 아니면······.
“한수영. 이제 그만하고······.”
일행들의 표정을 보며 떠오르는 가설들이 있었다.
만약 도깨비 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세계는 결국 ‘가장 오래된 꿈’의 망상이다. ‘가장 오래된 꿈’이 꿈꾸고 있기에 이 세계는 존속된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꿈’은 이제 사라졌다. 은밀한 모략가와, 999회차의 등장인물들과 함께.
「그렇다면, 이 세계는 어째서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주 끔찍한 예감이었다.
결코 실현되어서는 안 되는 예감.
그리고 어쩌면, 벌써 실현되었을지도 모르는 예감.
손에 쥐고 있던 맥주 캔이 바닥을 굴렀다. 반쯤 남아있던 내용물이 새어 나왔다. 바닥을 구르는 똑같은 모양의 캔들. 내용물이 거의 남지 않은 캔을 보며, 한수영은 마치 홀린 듯이 말했다.
“만약, 저 김독자가 ‘아바타’라면.”
“수영 씨!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내가 괜히 이러는 거 같아?”
그 진지한 목소리에, 몇몇 일행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돌아본 일행들은 대개 비슷한 얼굴들이었다.
한수영.
일행들 중 유일하게 [예상 표절]과 [아바타]를 가지고 있는 화신. 김독자가 없을 때마다 성운의 실질적인 브레인을 담당한 것은 그녀였다.
그리고 그런 한수영의 판단은, 거의 틀린 적이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이현성이 김독자를 돌아보았다. 그다음은 정희원. 이어서 이지혜. 하나둘 모여든 시선이 김독자를 보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한수영의 말이 맞다면.」
그들의 마음속에 희미한 균열이 번지고 있었다. 아주 작은 의심이 만들어 낸 빈틈. 한수영에겐 충분한 틈이었다.
“만약 저게 ‘아바타’라면, 아주 쉽게 확인할 방법이 있지.”
정희원이 불길함을 느꼈을 때, 한수영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한수영!”
벼락처럼 검을 뽑은 이지혜가 달려갔을 때 한수영은 이미 김독자의 몇 걸음 앞에 있었다. 주변에 가공할 기파가 몰아치며, 신유승이 드래곤 하울링을 터트렸다. 이길영의 벌레들이 한수영의 발목에 족쇄처럼 감겨들었고, 달려온 이현성이 김독자의 몸을 덮었다. 하지만 한수영은 멈추지 않았다.
“내 소설을 읽어 줄 녀석은―”
유상아가 손에서 뿜은 실이 한수영의 허리를 붙들었고, 뒤늦게 움직인 정희원이 가까스로 한수영을 뒤에서 잡아챘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났을 때, 한수영의 단도는 이미 그녀의 손에 없었다.
“네가 아니야.”
스팟, 하고 뭔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