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화
517화
에필로그
Epilogue 1. 제로의 세계
새카만 창 너머로 은하의 정경이 비쳤다. 나는 차가운 창가에 이마를 기댄 채, 그 어두운 풍광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뒤를 돌아보면, 여전히 그 자리에 그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김독자는 마침내 울음을 그쳤다.」
“안 울었어, 자식아.”
「거짓말도 했다.」
“······그 내레이션 언제까지 할 건데? 이제 이야기는 다 끝났어.”
[제4의 벽]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약간의 힘을 얻어, 나는 창가의 후미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이제 그곳에 내가 보고 싶은 것들은 비치지 않는다. 내가 살았던 지구는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그곳에 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바타’ 스킬이 활성화 상태입니다.]
[세계선 분리로 인해 ‘아바타’와의 연결이 해제되었습니다.]
[당신의 아바타는 임의의 자아 프로세스로 삶을 계속할 것입니다.]
49 퍼센트의 나.
[해당 아바타는 당신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입니다.]
녀석은 자신이 아바타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저 김독자로서 일행들과 이후의 삶을 살아가겠지.
「왜 4 9 퍼센트 야?」
“50퍼센트로 딱 나누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
「왜 4 9 퍼센트 야?」
똑같은 질문. [제4의 벽]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
“이미 알고 있잖아.”
「너 답 지 않 았 어」
“아니, 이게 나 다운거야.”
한심하고, 철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기적인 ‘김독자’다운 일.
「2%.」
그 숫자는 내가 일행들을 더 잘 기억하고 있다는 증명이었고, 내가 아바타보다 일행들이 기억하는 ‘김독자’에 가깝다는 기만이었다.
누구도 이곳의 나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리하여 일행들의 이야기가 끝이 나더라도······ 적어도 나는, 영원히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였다.
「후 회해?」
덜컹거리는 지하철의 가벼운 소음이 들려왔다. 휑한 지하철의 정경. 누구도 잡아주지 않는 손잡이들이 맥없이 흔들렸다.
「쓸 쓸 해하 지 마」
“쓸쓸하지 않아.”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런 상황은 전에도 겪었다. ‘구원의 마왕’이 되고, 이야기의 지평선에 처음 떨어졌을 때도 그랬다. 어쩌면 그때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지금 나는 시나리오 이탈 패널티 따위는 입지 않으니까.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제, 다시는 일행들을 만날 수 없다.」
“······나는 계속 이 지하철에 머물러야 하는 거야?”
「머 물 러?」
“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지 묻는 거야.”
[제4의 벽]은 그게 무슨 뜻인지 가늠하는 듯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이 곳에 ‘출입’의 개념은 없 어.」
“뭔 소리야?”
「여 긴 꿈 의 성소(聖所). ‘가장 오래된 꿈’이 잠드 는 곳.」
녀석의 말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깨달았다.
‘멸살법’과 관계된 모든 세계선은 ‘가장 오래된 꿈’의 꿈이다.
「모든 세계는 이곳에서 태어난 꿈.」
스팟, 하고 지하철의 모든 창문이 일제히 화면으로 뒤바뀌었다.
처음에는 지하철의 특정 구간에 삽입된 타스 광고인 줄 알았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시나리오의 풍경들. 하지만 광고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츠츠츠츠츠······.
아득한 두통. 우주에 흩어진 세계선의 풍경이 흐르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는 ‘가장 오래된 꿈’이었다.」
나는 떨리는 걸음으로 창을 향해 다가갔다. 수면처럼 가볍게 떨리는 화면은 언제든 내가 망가뜨릴 수 있을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김독자는 두려웠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의 모든 ‘이야기’는 독자가 읽기에 비로소 존재한다.
「그가 보지 않으면, 세계는 멈춘다.」
끊임없이 세계를 바라보고, 꿈을 꾸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오래된 꿈’이 짊어진 무게.」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모두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볼 수 있는 쪽이 당연히 낫다.
게다가 나는 모든 세계선을 관음할 수 있는 궁극의 성좌가 된 셈이니까······.
“제4의 벽.”
「왜」
“‘가장 오래된 꿈’도 성좌의 역할을 할 수 있었잖아. 그치?”
전대의 ‘가장 오래된 꿈’은 내가 살았던 회차에 ‘성좌’의 자격으로 메시지를 보냈었다. 비록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무의식이었지만, 그 무의식이 시스템에 개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맞 아」
“그럼 내가 살았던 세계선에 다시 ‘성좌’로 접선하는 것도······.”
「가 능할 거 라고 생 각 해?」
“안 되냐?”
「되고 안 되고 의 문 제가 아 니야」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잠시 생각하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하면 안 되겠지. 알고 있어.”
나는 나와 일행들이 어떤 고생을 하며 이 결말까지 도달했는지를 떠올렸다.
성좌들을 없애기 위해서, <스타 스트림>의 시스템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싸워왔다. 그리고 해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다시 <스타 스트림>을 부활시킨다면······.
「다행 히 하 고 싶어 도 못 하는 상 태 야」
“왜? 나는 이제 ‘가장 오래된 꿈’이잖아. 내가 상상하면 그대로 실현되는 거 아냐?”
「가 장 오래 된 꿈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통 제 할 수는 없 어」
츠츠츳, 하고 가볍게 튀어 오르는 스파크.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가장 오래된 꿈’으로서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상태인 듯했다.
「아 직 너 는 꿈 에 대 한 장악 력이 부족 해」
······하긴. 그리 쉽게 통제할 수 있다면, ‘꿈’이라 불리지 않겠지.
언젠가는 가능해질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보기만 하는 건?”
순간, 내 안에 깃든 뭔가가 꿈틀거렸다.
내가 지배하지 못하는 ‘나’. 거대한 무의식이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무의식은 다른 세계선을 향해 뿌리를 뻗었고, 그 뿌리를 통해 세계의 이야기들을 길어 올렸다.
암전된 시야 속에 세계선의 풍경이 만화경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그가 너무나 그리워하는 세계의 정경.」
멀리서 [공단]의 불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곳으로 향하는 일행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누구의 얼굴에도 어둠은 보이지 않았다. 어깨를 나란히 한 사람들의 중심에, 흰 코트를 입은 또 다른 김독자가 서 있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호흡이 가빠왔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밀려오는 구토감을 참은 채로, 나는 고개를 흔들며 눈을 떴다.
현기증 속에 바닥을 짚었을 때, 나는 홀로 지하철에 남아 있었다.
「왜 ? 보 기 싫 어?」
보고 싶었다.
일행들의 행복한 얼굴을, 마침내 시나리오의 지옥을 벗어난 그 표정들을.
내가 너무나 원했던 그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하지만 볼 수가 없었다.
그걸 보고 나면, 나는 반드시 돌아가고 싶어질 것이다.
“······내가 봐야만 하는 거지? 내가 보지 않으면, 세계는 움직이지 않는 거지?”
「너 는 이 미 보 고 있 어」
“뭐?”
「의식 은 무 의식 의 일 각일 뿐. 너 는 이 미 대 부분 의 세계 선들 을 보고 있 어」
“그럼······.”
「무리 할 필요 없 어 김 독 자」
[제4의 벽]은 나를 향해 안쓰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무 것도 하 지 않아 도 돼. 네 무의 식 이 이미 보고 있 으니 까」
그저, 모든 것을 잊고 눈을 감아도 된다. 어떤 죄책감도 없는 순수한 아이처럼, 꿈속에서 뛰어놀기만 해도 좋다. 비극을 다시 곱씹으며 상처를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고, [제4의 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럴 수는 없어.”
나는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저 모든 세계선은 나의 죄업이었다.
내가 만들었고, 내가 파멸시켰다.
“나는 봐야만 해.”
그리고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계선들이 창 위로 떠올랐다.
‘멸살법’의 무수한 세계선들. 내가 읽어서 태어난 누군가의 비극들이 그곳에 전시되고 있었다.
······어쩌면, 일행들의 이야기보다 먼저 보아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지, [제4의 벽]이 말했다.
「아 주긴 밤이 될 거 야, 김독 자」
그렇겠지. 나는 웃었다.
“걱정 마. 잘할 수 있으니까.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거든. 죽을 때까지 즐겁게 볼 수 있어.”
「언 젠가 네가 제 일 좋아 하는 이 야기를 증 오하 게 될 지도 몰 라」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화면 속에 떠오르는 정경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것이, 내가 치를 대가겠지.”
천천히 창을 누르자, 화면 위로 내 지문이 새겨졌다.
[세계가 당신의 시선을 받습니다.]
[당신의 의식에 하나의 세계선이 생명력을 얻습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몸은 바닥으로부터 한 뼘 반 정도 두둥실 떠올라 있다.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듯한 느낌.
웅성임에 깜짝 놀라 곁을 돌아보니,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내가 보이지 않는 듯 내 몸을 통과해서 지나갔다.
하나 같이 피로에 젖은, 퇴근길 직장인들의 얼굴.
······이곳은.
주변을 둘러보자 주황색의 3호선 라인이 보였다. 놀랍게도, 나는 지하철의 플랫폼 위에 서 있었다. 천장에 설치된 LED 패널 위로 현재 시각과 지하철 정보가 떠오르고 있었다.
[PM 6:55]
시나리오 시작까지 정확히 5분 전.
곧이어 안내음과 함께 불광행 열차가 도착했다.
하나둘 열차에 오르는 사람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을 말린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어디에 있든 시나리오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과 함께 지하철에 올라타 그 모든 비극을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곳에, 김독자가 아주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불광행 3434열차. 3707칸.
멍하니 지하철 창밖을 내다보는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잠시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모든 세계선은 결국 한 사람의 회귀를 통해 반복된다. 그러니 이야기의 시작에서 놈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계의 주인공.」
당연하게도, 유중혁은 나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무심한 눈길로 지하철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곧 시나리오를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침착한 얼굴. 그런 녀석을 보며 나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넌 정말 대단한 놈이구나.
이미 시나리오의 끝을 본 나도, 이 풍경에 다시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릴 지경인데. 너는 이런 순간을 몇십 번, 몇백 번이나 견뎠겠지.
정차했던 지하철이 움직이고,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곧 ‘그것’이 시작될 것이다.
「3회차에서, 유중혁은 칸 안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시작한다.」
나는 내가 알고 있던 3회차의 시작을 떠올렸다. 여기가 몇 회차인지는 몰라도, 시작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주변을 관찰하자, 출입문 근처에서 수상한 거동을 보이는 한 사내가 포착되었다.
“흐, 흐으······.”
사내에게서 흘러나오는 간헐적인 신음에 몇몇 사람들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그러진 표정의 사내는 히죽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품속에 숨겨뒀던 수제 폭탄과 라이터를 꺼냈다.
「유료화가 시작되던 그 날. 유중혁이 타고 있던 3707칸에 함께 탄 이가 있었다.」
“···저거 뭐야?”
“이봐, 당신!”
「지하철 테러범, 최한규.」
깜짝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사내의 손에서 탁탁 튀기는 불똥에 기겁한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유중혁은, 그런 사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야, 뭐하는 거야. 빨리 저거 빼앗으라고.
내가 알고 있는 전개대로라면, 이미 유중혁은 지하철에 타는 순간 최한규를 제압하고 폭탄을 빼앗았어야 했다. 그런데 유중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일까, 침착하다고 생각했던 유중혁의 표정은 희게 질려 있었다.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차가 암전된 것은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튀어오르는 불꽃을 보며, 사람들의 비명은 절규로 변했다.
뭔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왜, 유중혁이 움직이지 않지?」
잠깐, 설마 이거―
[PM 7:00]
틱, 하는 소리와 함께 세계의 법칙이 바뀌고 있었다.
[제 8612 행성계의 무료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습니다.]
테러범이 피운 환한 불꽃에 유중혁의 흰 얼굴이 비쳤다.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동공. 유중혁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당황스럽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건 몇 회차지?
900번대에서 맛이 갔을 때인가? 아니면 1200번대에서?
대체 어떤 회차에, 이런 얼빠진 유중혁이―
[#BI-7623 채널이 열렸습니다.]
[성좌(星座)들이 입장합니다.]
“흐, 흐흐, 흐으으······!”
폭탄을 쥔 채 주변을 노려보는 테러범의 모습에, 사람들이 다른 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화신 ‘최한규’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유중혁은,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내가 아는 유중혁이 이렇게 행동할 리 없었다. 처음부터 완벽한 쇼맨십으로 상황을 제압하는 것이 바로 유중혁이었다. 그런데 테러범의 위협 앞에서, 유중혁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한 번도······?
뇌리에 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이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무수한 페이지들이 앞으로 넘어가더니, 이내 책이 덮였다.
‘멸살법’ 내에서도 그저 회상으로 처리되었던 회차.
어떤 이야기는, 쓰여지지 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사, 살려······ 살려주세요!”
“아아아아악!”
「이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은 ‘멸살법’의 시작.」
이 세계선은, 내가 읽지 못한 유중혁의 0회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