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화
516화
본편 끝
[‘제4의 벽’이 다시 발동합니다!]
몇 번인가 세상의 빛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내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반쯤 흐려진 의식 속에서 열차 바퀴와 선로의 마찰음만이 머릿속을 메웠다.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
마지막 녀석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진정 자신이 원하던 것을 이루지도 못했는데.
「‘은 밀한 모 략가’가 원하 는 게 뭔 데?」
머릿속으로 내가 기억하는 ‘은밀한 모략가’의 모습들이 흘러갔다.
오직 원작의 텍스트를 통해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 그 아득한 세월을 견뎌오며, 유중혁은 이 끝에서 무엇을 보길 원했을까.
그가 정말로 기대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네가 원하지 않는 결말이라 해도······ 이 세계가, 실패한 회차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오직 그 말만이 저주처럼 뇌리에 박혔다.
「김 독자」
‘제4의 벽’이 내 오만함을 응징하기라도 하듯, 딱딱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네 가 판단 할 수 있 는 문 제가 아 냐」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녀석이 떠난 후에도, 빌어먹을 ‘성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휘황한 빛살 속에서 999회차의 우리엘, 이현성, 김남운, 이지혜의 모습이 흩어져 갔다.
녀석은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녀석이 직접 선택했으니, 그것이 녀석이 행복인 것일까.
비극 속에서 태어난 이는, 그것이 비극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어린 나와 ‘은밀한 모략가’의 설화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이쪽을 돌아보는 녀석은 더 이상 ‘멸살법’의 유중혁이 아니었다.
「비 극 속 에서 태 어 났 기 에 비극을 끝 낼 수 도 있는 법」
「“이곳이, 이 이야기의 에필로그다.”」
내가 읽어온 오랜 이야기의 마지막은 그렇게 끝났다.
[당신은 모든 시나리오의 ■■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은 세계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살아가는 것이었다.
‘멸살법’이 내게 알려주지 않은 이야기.
[‘가장 오래된 꿈’이 끝났습니다.]
퍼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상황에 떠밀려서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도깨비 왕은 말했다. 이 모든 세계는, 본래 ‘가장 오래된 꿈’의 꿈이라고.
「그렇다면, 꿈이 끝난 후 꿈속의 인물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999회차의 인물들이나, ‘은밀한 모략가’는 등장인물의 직위를 벗어나 스스로의 의지로 꿈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면,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꿈이 끝난 후에, 꿈속의 인물들은······.
[최종 시나리오 클리어 보상이 도착하였습니다.]
*
뺨을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 깜빡이는 지하철의 불빛 속에 김독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야, 정신 들어?”
거칠게 멱살을 잡은 한수영의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묻고 싶어.”
두통이 오는 듯, 김독자는 머리를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긴?”
“지하철이야. 이제 집에 가야지 우리도.”
그 말을 한 한수영은 어딘가 개운한 표정이었다.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열차. 창 바깥으로 어둠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독자 씨, 괜찮아요?”
김독자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일행들. 그곳엔 유상아도, 이현성도, 정희원도, 신유승도, 이길영도, 이지혜도, 장하영도······ 그리고 유중혁도 있었다.
「모두가 무사했다.」
김독자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열차 안에 다른 사람들의 인기척은 없었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이 올 때 탔던 그 열차인 듯했다.
「우린 이제 정말 무사한 걸까.」
“상처는 치료했어요. [제4의 벽]으로 돌아가면 설화 씨한테 다시 한번 맡겨야 하겠지만······.”
김독자의 맥을 짚던 유상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일행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그러나 코앞의 김독자를 보고도, 누구도 선뜻 입을 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뜻밖에도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중혁이었다. 그는 김독자에게 다가오는 대신 지하철의 좌석에 삐뚜름하게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우주의 설화들이 풀려나가고 있었다. 엉킨 실타래가 한 올씩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다.”
수많은 세계선에 존재하는 설화들이 일제히 환한 빛을 흩뿌리며 우주를 밝히고 있었다. 그들이 살아왔던 <스타 스트림>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이 저주하고 원망했던, 그러면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세계가, 마지막으로 가장 환한 빛을 뿜으며 사라져가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보는 김독자의 손을, 신유승이 꾹 잡았다.
“이제 다 끝났어요.”
뭔가가 벅차올랐는지, 갑자기 이현성이 울음을 터트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던 곰 같은 사내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런 이현성을 보며 코끝이 시큰해진 정희원이 입술을 깨물었고, 이지혜는 눈물을 떨구기 싫은지 고개를 들었다.
“정말, 끝났다.”
끝났다. 그토록 길고 장대했던 이야기가, 드디어 끝났다.
김독자는 멀어지는 유성우들을 바라보았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런 김독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한수영이 말했다.
“네가 읽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야. 넌 아무것도 몰랐잖아.”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일행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김독자와, 김독자의 설화를 바라보았다.
「읽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던 세계.」
살기 위해 무언가를 읽어야만 했던 어린아이.
그 어린아이에게 그들은 몇 번이나 구해졌다.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읽어야 했던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냥 읽기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독자 씨는 직접 그 이야기를 바꾸려 했잖아요. 나는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정희원의 말이었다.
‘멸살법’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세계의 끝에 도달하지 못했던 이.
그녀가 옅게 웃으며 김독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때요. 지금이 원하던 결말 맞아요?”
김독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흐려진 시야 속에서 몇 번이나 눈을 닦아야 했다.
「그가 이룬 세계의 정경을, 스스로 보기 위해서.」
천천히 눈을 뜬 김독자의 망막 위로, 지하철의 까만 유리창이 비쳤다.
그 유리창 위로 일행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우주를 배경으로 한 사진처럼.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세계의 결말.」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신유승과 이길영이 김독자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김독자는 그런 신유승과 이길영을 힘껏 끌어안았다. 누군가가 물었다.
“행복해질 수 있겠죠?”
역을 떠난 열차의 진동만이, 침묵 속에서 간헐적으로 울려 퍼졌다.
아마도, 이 열차는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지나온 역을 다시는 방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새로운 종착점으로 나아갈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감상에 빠져 있는 사이,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 것은 뜻밖에도 이지혜였다.
“······그런데 우리가 살던 세계선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일행들의 시선에, 이지혜가 머쓱하게 볼을 긁으며 말했다.
“그게, 그렇잖아요. 도깨비 왕의 말이 맞다면 이 세계는 ‘가장 오래된 꿈’의 꿈인데, 그 꿈이 끝나버린 거면······.”
실제로 [최후의 벽]이 부서졌을 때, 그들이 살고 있던 세계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그렇다면, 다시 열차를 타고 그 세계로 돌아가도―
[괜찮아. 우리 세계는 정상이야.]
“아, 그렇구나. 역시······ 그럼 다행······ 엥?”
이지혜는 김독자를 보았고, 이현성을 보았으며, 정희원과 유상아를 보았다. 그러나 누구를 보든, 그들 또한 이지혜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대답한 거 누구죠?”
그리고 모두가 동시에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솜털 뭉치 하나가 동동 떠 있었다.
[바앗?]
일행들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에바앗.]
허공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비유는,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들 알고 있었으면서 뭘 놀라?]
*
일행들은 비유에게 설명을 들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세계선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멈춰 있던 세계의 시간이 다시 쓰여지기 시작했거든. 비록 거대 설화들이 한꺼번에 붕괴하며 세계관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이대로 두어도 자연스레 멸망하기까지 몇천 년은 더 걸릴 거야.]
지하철의 창밖으로, 그들이 살던 세계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다. 굳어 있었던 세계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폐허 속에서, 우리엘이 천천히 눈을 떴다.」
「흑염룡이 자신의 꼬리를 만 채 잠들어 있었고.」
「근두운 속에 휘감겨 있던 제천대성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좌들이 살아있었다.
해상전신도, 고려제일검도······ 모두, 살아 있었다.
비록 예전과 같은 광휘는 잃어버렸지만, 그들은 여전히 세계선 위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런 성좌들을 보며 비유가 말했다.
[<스타 스트림>은 아직 남아 있어. 채널 시스템은 붕괴했고, 성좌들도 예전처럼 강한 힘을 내지는 못하지만, 워낙 커다란 설화였으니까 완전히 부서지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릴 거야.]
몇몇 일행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한숨이었다. 이지혜가 다시 물었다.
“근데 꿈이 끝났는데, 어떻게 세계가 계속되고 있는 거야?”
[거기까진 나도 잘 모른다고 했잖아. 한 번 말하면 좀 알아들어.]
“······뭐, 다행이긴 한데. 근데 너 언제부터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거야? 게다가 버르장머리도 없네. 아저씨! 비유 봐! 저게 징그럽게 지금까지―”
김독자가 비유를 바라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비유가 다시 시치미를 뚝 떼며 입을 열었다.
[아바앗?]
일행들이 실웃음을 터트렸다. 이지혜가 씩씩거리며 뭐라고 외치려는 순간, 김독자가 손을 뻗어 비유를 말없이 안았다.
처음 시나리오가 시작될 때만 해도 작았던 솜털 뭉치는, 이제 한 품에 안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 광경을 보던 유중혁이 말했다.
“······어쩌면 마지막 기적인지도 모른다.”
기적이라니, 유중혁에겐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유중혁이 가장 믿지 않는 단어였으니까.
그럼에도 유중혁의 그 말로 인해, 일행들의 표정이 풀리고 있었다.
“그럼 진짜로 모든 게 해결된 거네요.”
“이제 다 같이 살 엄청나게 커다란 집만 사면 되겠다!”
아이들의 목소리에 한수영이 핀잔을 주었다.
“우리 성운 이제 거지야. 저놈이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죄다 탕진했다고.”
“돈은 다시 모으면 되잖아요! 우리가 누군데!”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이길영을 보며, 일행들도 웃었다. 그 웃음이 끊어질까봐 불안한 사람처럼, 누군가 재빠르게 물었다.
“다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그 말에 신유승과 이길영이 서로를 바라보며 외쳤다.
“한강!”
“바다!”
“피자!”
“치킨!”
서로 드잡이질을 벌이는 아이들 사이로,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나, 예전에 살던 곳에 가보고 싶어.”
장하영의 말이었다.
“예전에 살던 곳······.”
그 말에 유상아의 표정이 흐려졌다. 유상아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살았던 곳은 남아 있지 않다. 멸망이 찾아오기 전 그들의 이야기를 간직하던 장소는,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마법일까. 갑자기 창밖으로 비치던 정경이 뒤바뀌었다. 우주의 풍경이 흩어지고, 대신 그것을 채운 것은.
“진짜 기적인 건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서울의 풍경이었다.
이름이 사라졌던 노선표 위에 다시 역의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 역은 ‘홍제’입니다.]
장하영의 걸음이 문쪽으로 움직였다. 부서진 터미널의 정경 너머로, 그녀가 살았던 동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지하철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정희원이 물었다.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래도 가볼 거야?”
장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희원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구나 그렇듯, 결과를 알면서도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래, 그럼 이따 공단에서 다시 만나.”
열차의 문이 열리고, 장하영이 걸어나갔다. 현실감이 없는 표정으로 주변을 보던 장하영이 불현듯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김독―”
그러나 장하영의 말이 들려오기도 전에, 열차는 다시 출발했다.
그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물끄러미 노선표를 보던 이지혜였다.
“나도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그녀가 가려는 곳이 어디인지 안다는 듯, 정희원이 물었다.
“언니가 같이 가줄까?”
“혼자 갈게요. 그러고 싶어요.”
싱긋 웃는 이지혜의 표정은 가벼웠다. 머쓱하게 올라갔던 정희원의 손이 다시 내려갔다.
“금방 다시 봐요.”
이지혜가 내렸다. 멀리서, 그녀가 다니던 학교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다시 지하철의 문이 닫혔다. 정희원이 물었다.
“또 어디 가고 싶은 사람?”
그러나 더 이상 대답하는 일행들은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돌아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상아가 물었다.
“나머지는 모두 같이 내릴 거죠?”
“이 열차 환승 안 되나? 종로에서 내려서 걸어가야겠네.”
한수영이 투덜거리며 노선표를 살폈다.
그들이 향할 곳은 광화문. [공단]이 있는 장소였다.
“사람들한테 할 이야기나 다들 생각해 둬. 정말 다 알려줄 수는 없잖아.”
[다음 역은 ‘종로3가’입니다.]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말했지만, 정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돌아가면 그들은 새로운 일상과 마주해야 할 테니까.
「열차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은 유상아가 “으쌰” 하며 플랫폼 바닥을 내딛었다.
뒤를 돌아보자, 이현성과 정희원도 풀쩍 뛰어 안전선 밖에 섰다.
“뭐해요? 안 오고.”
그리고 세 사람이 남았다.
“김독자.”
한수영과 유중혁 둘 중 누가 먼저 그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수영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을 이었다.
“같이 내릴 거지?”
[누군가가 스킬 ‘거짓 간파 Lv.???’를 발동―]
그러자 김독자가 씩 웃었다.
“그럼. 내려야지.”
[‘거짓 간파’가 ‘김독자’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했습니다.]
“가자.”
한 걸음 나아간 김독자가 둘의 등을 팡, 하고 쳤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주춤거리며 앞으로 밀려났다. 인상을 쓴 한수영이 김독자를 향해 뭐라고 중얼거렸고, 유중혁도 칼자루를 쥔 채 눈을 부라렸다. 김독자가 말했다.
“······이제 시나리오 끝난 거 알지? 지금부터 도검 휴대는 불법―”
“멍청한 소릴 하는군.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김독자.”
“맞아, 아직 tls123이 누군지도 알아내지 못했고―”
서서히 문이 닫히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목소리 사이로, 새로운 세계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김독자가 즐거운 듯이 웃었고, 아이들이 떠들었다.
새로운 세계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문이 닫히려는 마지막 순간, 한수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아직 그곳에 무언가를 남겨두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찜찜하고 묘한 얼굴로.
그러자 유중혁도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김독자뿐이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 한수영과 유중혁이 동시에 으르렁거렸다.
“뭘 보냐?”
“네놈이야 말로―”
그리고 문이 닫혔다. 침묵 속에서 지하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맞이한 역을 떠나, 다시 무한의 궤도로 진입하고 있었다. 노선표에 적혀 있던 역들의 이름이 하나둘 사라져갔다.
멀리서, 투닥거리는 유중혁과 한수영의 모습이 보였다. 밝게 웃으며 김독자의 손을 잡는 아이들과, 차양막을 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상아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정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4의 벽’이 물었다.
「정 말 괜 찮 겠 어?」
다음 순간, 허공에서 투명해져 있던 내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실체화된 내 몸이 이내 지하철 위에 완전히 드러났다.
[현재 당신이 보존한 기억은 ‘51.00%’입니다.]
나는 쓰게 웃었다.
“이 방법밖에 없었잖아.”
허공을 올려다보자, 밀려 있던 메시지 로그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당신은 ‘최종 시나리오’를 클리어했습니다.]
[당신은 이 세계의 비밀을 모두 아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현재 ‘가장 오래된 꿈’이 부재중입니다.]
[꿈이 계속되지 않으면 세계의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메시지였다.
[당신은 ‘가장 오래된 꿈’의 자리를 대신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꿈을 계속 이어가시겠습니까?]
이 꿈을 멈춘다면, 세계는 영원히 동결될 것이다.
「잔혹한 일이었다. 가까스로 행복해질 수 있게 된 세계가, 영원히 멈춰버리게 된다는 것은.」
비극으로 시작되었으나, 이미 태어난 우주였다.
그럼에도 그 우주에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원하는 역에 도착했다.
「유 승이 와 길 영이 가 슬 퍼할 거 야」
“알아.”
「너 는 그 들을 기만했 어」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어.”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일부는, 분명 그들과 함께 내렸으니까.”
언젠가, 1863회차에 다녀오며 내가 ‘은밀한 모략가’에게 받았던 스킬.
「【스킬은 어떻게 하겠는가? 새로운 스킬은 획득하지 못했을 텐데.】」
「“스킬은 획득하지 못했습니다만······ 이런 형태의 보상 수령도 혹시 가능합니까?”」
「【가능하다.】」
그때 내가 받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스킬’은 아니었다.
[현재 ‘책갈피’ 스킬이 발동 중입니다.]
[‘가장 오래된 꿈’의 가호로 해당 스킬의 활성화 시간이 무제한으로 변경됩니다.]
[현재 6번 책갈피가 활성화 중입니다.]
[6번 책갈피에 등재된 등장인물은 ‘거짓 종막의 연출가’입니다.]
거짓 종막의 연출가, 1863회차의 한수영.
[해당 인물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전용 스킬 ‘아바타 Lv.???’를 활성화 중입니다!]
[당신은 49.00%의 기억을 사용해 아바타를 생성하였습니다.]
[현재 세계선의 영향으로 아바타와의 연결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해당 아바타는 자율적인 의사를 가지고 활동할 것입니다.]
“······이게 맞는 거야.”
나는 희미해진 기억의 일부를 더듬으며 비틀거렸다.
‘또 다른 나’는, 자신이 아바타인지 모르는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일행들과 함께 커다란 집에서 살아갈 것이다.
길영이와 바다를 가고, 유승이와 피자를 먹을 것이다. 이지혜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볼 것이고, 이현성과 정희원에게 꽃다발을 안겨줄 것이다.
유상아와 함께 집을 고르고 다닐 것이고, 유중혁과 tls123을 찾아다닐 것이다.
한수영이 쓴 소설을 읽을 것이다.
나는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나는 구원을 받는 쪽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그런 그들을 위한 나의 작은 속죄다.
「후 회 하 게 될 거 야 너 는 그 들을 다시 는 만날 수 없어」
나는 말 없이 웃었다.
“하지만 볼 수는 있잖아.”
아주 오래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거면 돼.”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열차의 후미를 바라보았다.
이제, 일행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항상 그 문장이 싫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누구보다 그 문장이 현실이기를 바랐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은 ‘가장 오래된 꿈’이 되었습니다.]
스러지는 먼 불빛이 나를 기억하는 성좌들처럼 보였다.
그렇게, 나의 끝나지 않는 항해가 시작되었다.
[당신의 ■■는 ‘영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