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화
515화
1864번의 삶을 살아온 유중혁의 진짜 목소리였다.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의 모든 세월을 증명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말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유중혁이라고. 그가 바로, ‘멸살법’의 주인공이라고.
“나, 나는, 나는······.”
아이는 벌벌 떨면서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의 모든 세계가 무너질 것을 아는 것처럼.
[‘가장 오래된 꿈’이 자신의 꿈을 부정합니다!]
「이건 환상이야 이건 환상이야 이건 환상이야」
“환상이 아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말과 함께, 아이의 주변으로 문장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이가 읽고 있으며, 동시에 내가 읽었던 ‘멸살법’의 문장들이었다.
나를 살렸고, 결국은 나를 죽이게 될 문장들.
그 문장들 속에서 한 사내가 말하고 있었다.
「“이현성. 아직 끝나지 않았다.”」
「“걱정 마라. 내가 반드시 <스타 스트림>을 끝내겠다.”」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신유승.”」
생생한 그 문장들은 곧 이야기가 되었다. 이야기는 상상이 되었고, 상상은 다른 세계선에서 현실로 재현되었다.
그것이 또 다른 현실임을 모른 채, 소년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욕망했다.
「“다음 회차에도, 그다음 회차에도.”」
소년은 살기 위해서, 상상했다.
친척들의 눈치를 받으며, 일진들의 괴롭힘을 당하며.
아프지 않기 위해서 다음 이야기를 생각했다.
「“반드시 살아서, 이 시나리오의 끝을 볼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을 보며 위안을 받았고.
그 위안 속에서, 주인공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작가님, 유중혁의 회귀는 언제까지 계속되는 건가요?」
그의 회귀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츠츠츠······.
흘러나오는 소년의 기억을 보며, ‘은밀한 모략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던 결심들.
나와 일행들도 그것을 함께 보았다.
‘은밀한 모략가’가 빠져나간 뒤 쓰러진 유중혁이 밀려오는 기억 속에 신음하고 있었다. 신유승이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고, 이지혜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현성도, 정희원도 떨리는 어깨를 가까스로 서로에게 의지한 채 버티고 있었다.
이제 그들도 알게 되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생은, 보상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신유승이 방언처럼 중얼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부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려달라는 듯이.
“은밀한 모략가! 멈춰! 멈추라고!”
오직 한수영만이 눈앞의 스파크에 저항하며 계속해서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은밀한 모략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는 자신의 순례행이 끝나는 장소에 도착했다.」
부러지고 또 부러지면서도 매번 다시 붙었던 [진천패도]가 고요히 울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배후성이 눈앞에 있었다.」
“너였군.”
악몽이라도 꾸는 듯, 아이의 어깨가 가냘프게 떨렸다.
「당장이라도, 베어 죽일 수 있는 연약한 생명체였다.」
그의 진천패도가 다시 한번 거칠게 울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성좌들을 베어온 칼이었다. 포세이돈도, 제우스도, 여와도, 심지어는 도깨비 왕도 그의 칼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별도 그와 대적해 살아남을 수 없었다.
1864번의 삶을 거치며 도달한 복수의 기회.
[진천패도]가 천천히 움직였다.
“은밀한 모략가! 아니, 유중혁―!”
한수영도 나도 막을 수 없다.
저것은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내 손을 꼭 잡은 신유승이 울고 있었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꺽꺽거리며.
이제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나는 누구의 이야기도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
유중혁은 오랜 회귀행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런데 왜 저 검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은밀한 모략가’의 [진천패도]는 여전히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소년의 몸을 베어낼 것 같던 검은, 그저 소년의 주변을 감쌌던 알껍질 같은 보호막을 걷어낼 뿐이었다.
「껍질이 부서졌지만, 어디로도 날아갈 수 없는 새.」
소년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기분 나쁜 설화들이 아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야, 얘 또 노트에 뭐 그린다!”」
「“쯧쯧, 제 어미를 똑 닮아서······.”」
「“네가 김독자니? 혹시 어머니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니? 음······ 그렇구나.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니? 평소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니?”」
「“언제까지 입 다물고 있을 거야? 네가 말하지 않으면 세상은 너를 오해하게 될 텐데.”」
스걱.
허공을 헤매던 [진천패도]의 칼날이 정확히 그 기억의 문장을 잘랐다.
어깨를 부르르 떨던 소년의 떨림이 한결 잦아들었다.
「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진언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 소년입니까.】
‘은밀한 모략가’의 그림자 속에서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일어섰다.
999회차의 이현성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녀석이 나의 배후성이다.”
【열 받네. 겨우 이 꼬마가 원흉이었나?】
999회차의 김남운과 이지혜도 그곳에 있었다.
999회차를 견뎌낸 이계의 신격들. <스타 스트림>을 파괴하고, ‘가장 오래된 꿈’을 끝내고 싶었던 것은 유중혁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뭐? 그럼―】
‘은밀한 모략가’는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서 플랫폼의 열차를 타기 위해 밀려오고 다시 밀려 나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타고 온 열차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평범한 세계에서, 사람들을 태워 어디론가 향할 대화행 열차.
마치 우리의 존재가 보이지도 않는 듯, 우리를 지나쳐 가는 사람들.
―이번 역은 대화······.
승객들이 하차하기도 전에 지하철에 올라타는 사람들. 서로를 밀치거나 욕설을 내뱉는 사람들. 할머니 하나가 내리는 인파에 떠밀려 넘어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붙잡아주지 않았다. 그녀를 가장 먼저 목도한 이는 임산부석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품속에서 꺼낸 신문으로 자신의 시야를 덮었다. 그 신문 위로, 기사의 헤드라인이 보였다.
―범죄자의 에세이를 출간하다.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기사였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이야기했고, 잊어버린 기사.
「별거 아닌 비극이었다. 고작해야, 단 한 번의 생에서 일어난 비극.」
‘은밀한 모략가’와 이계의 신격들이 내 설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해야 십수 년도 채 되지 않는 길이의 비극을, 슬픈 눈으로 보고 있었다.
【······가엾은 아이.】
그 말에 나는 소스라치듯 몸을 떨었다.
내 비극은 그들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겪은 비극 때문에, 더 큰 비극을 만든 죄를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
【나의 신이여, 너를 만나기 위해 아주 오랜 세월을 견뎌왔건만.】
999회차의 우리엘이 어린 나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너는, 이 우주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구나.】
다시 한번 바르르 떨리는 아이의 몸.
나는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래서 우리를 필요로 했던 건가? 너무나 가혹한 구조 요청이군.】
【자신의 상상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것인가.】
뭔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칼, 칼을 찾아야 했다.
999회차 인물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999회차의 이지혜였다.
【나는 상관없어. 하지만 괜찮겠어? 당신은 이것을 위해 여기까지 왔잖아.】
그것이 누구를 향한 말인지는 명백했다.
‘은밀한 모략가’가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힘든 시간이었다.”
그런 한 마디로 일단락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가 겪은 비극이 그런 식으로 정리되어서는 안 되었다.
“왜 나였을까 생각했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은밀한 모략가’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의 증오심 어린 눈동자는 소년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소년의 설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999회차의 우리엘과 이현성이 무릎을 꿇어 아이의 몸을 안아 들었다. 이지혜와 김남운이 아이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선언하듯 말했다.
“그만 눈을 떠라, 김독자.”
식은땀을 흘리는 아이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긴 악몽과 맞서 싸우듯, 아이의 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아이의 눈꺼풀이 열렸다.
“아, 아, 아······.”
아이의 눈이 세상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망상이라 믿었던 것을 보고 있었다. 자신을 감싼 대천사와 강철검제, 망상악귀와 해상제독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정말로······.”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눈앞에 있었다.
“그래. 꿈이 아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침묵 속에서, 뭔가가 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눈물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기에, 그리고 지금 ‘은밀한 모략가’와 이계의 신격들이 해준 일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나는 한없이 괴로워졌다.
「저것이 진짜 그들의 선택일 리가 없다.」
아주 오랫동안 어떤 이야기와 함께 살아온 존재는, 결국 그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아가레스가 그랬고, 메타트론이 그랬고, 묵시룡과 도깨비 왕이 그랬던 것처럼, ‘이계의 신격’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지금의 모든 선택조차, 결국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절규하듯 외쳤다.
“그 녀석은 ‘가장 오래된 꿈’이야! 녀석을 죽여야 해. 죽이지 않으면, 네 비극은 끝나지 않아! 네 회귀는, <스타 스트림>은―”
너희는 그 ‘이야기’에 먹혀서는 안 된다.
동정은 필요 없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전혀 모르는 눈동자. 내가 읽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뿐만이 아니었다. 우리엘도, 이지혜도, 김남운도, 이현성도 마찬가지였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나는 연이어 떠오르는 그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군인.」
「가장 숭고한 대천사.」
「불의를 참지 않는 장군.」
「세상을 향한 증오로 가득 찬 악귀.」
「<스타 스트림>이라는 시스템과 대적해 온 회귀자.」
‘은밀한 모략가’와 ‘이계의 신격’들이 아이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는 악의로 가득 찬 세계.
그 세계의 설화를 노려보던 김남운이 중얼거렸다.
【<스타 스트림>이 없어도, 세상은 똑같구만.】
마치, 지금부터 그들이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이.
‘은밀한 모략가’와 이계의 신격들이 쌓아 올린 설화가, 아이를 둘러싼 현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득한 순례행의 끝에서, 회귀자는 자신이 발견한 세계를 선택했다.」
이야기의 끝에 도달한 등장인물들이, 마침내 이야기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신을 안은 채 새로운 이야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그쪽을 향해 기어갔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약속했다. ‘가장 오래된 꿈’을, 이 비극을 끝내겠다고.
간신히 바닥을 더듬던 나의 손에 부러진 칼자루가 들어왔다.
됐다. 이것만 있으면―
【김독자.】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자, 녀석이 말을 이었다.
【너의 첫 번째 시나리오를 기억하나?】
첫 번째 시나리오, ‘가치 증명’.
그 시나리오에서, ‘은밀한 모략가’와 성좌들은 처음으로 나를 보았다.
【그때 너는 사람들에게 말했었지.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은 ‘사람을 죽여라’가 아니라고.】
그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가장 오래된 꿈’을 끝내시오.
세계가 눈부신 빛으로 덮이며,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놀란 일행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당신은 ‘은밀한 모략가’와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강철검제와 대천사가 안아 든 어린 김독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오랜 꿈속에 젖어 있던 아이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꿈이 끝나는 것은 언제일까. 그것은.
「꿈이, 더 이상 꿈이 아니게 되었을 때.」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미 ‘멸살법’의 유중혁이 이곳에 도착한 순간, ‘가장 오래된 꿈’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다음 열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자신의 ■■에 도달했습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신호와 함께, 나와 일행들은 도착한 열차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곳이, 이 이야기의 에필로그다.”
나의 유년을 구한 인물들이, 문의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세계선으로 넘어갔던 1863회차의 유중혁처럼, 내가 모르는 세계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빛살 속에서 유중혁의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그는 자유로워 보였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의 ■■는 ‘가장 오래된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