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화
511화
수르야의 태양빛으로, 밤하늘이 일순간 백야로 물들었다.
‘마왕선발전’에서, 그리고 ‘기간토마키아’에서 함께 싸웠던 그날처럼, 수르야의 열차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차비는 나중에!”
호기롭게 외친 한수영을 필두로, 우리는 수르야의 열차에 탑승했다.
열차의 차륜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스파크가 튀었다. 폭연을 일으키며 허공에서 크게 한 번 선회한 열차는, 이내 후미에서 소닉붐을 일으키며 투명한 장벽을 향해 돌진했다. 이현성이 소리쳤다.
“부서집니다!”
쩌저저저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벽이 연달아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겹겹이 쌓인 벽을 파괴하며 계속해서 달렸다. 성좌들의 설화가 기록되는 [최후의 벽]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깨비 왕의 고함소리와 999회차의 설화들이 난잡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성좌, ‘지고한 빛의 신’이 자신의 모든 격을 방출합니다!]
열차의 기관실에 앉은 수르야의 전신이 백열하는 태양처럼 눈부셨다. 그의 몸 곳곳에 난 상처들 사이로 설화가 떨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 역시도 이곳으로 오기 위해 이미 대가를 치른 상태인지도 모른다.
[성좌, ‘지고한 빛의 신’의 ■■는 ‘최후의 기관장’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설화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어떤 내색도 없이, 스스로의 몸을 연료로 [태양 마차]를 달렸다. 마치 그것이 지금껏 ‘지고한 빛의 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사명이라는 것처럼.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출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혼신을 불사르는 그의 투지에도 불구하고, 열차의 속도는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최후의 벽]의 중심부로 갈수록 방호벽의 밀도가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활자의 그물 같은 벽이 열차의 선두와 부딪친 순간, 정희원이 움직였다.
“나한테 맡겨요!”
“희, 희원 씨! 엑!”
정희원이 이현성의 목을 틀어쥐는 순간, 이현성의 몸이 급격히 수축하더니 이내 강철검의 형태로 변했다. 곧이어 강철검의 검신은 이내 [지옥염화]의 빛으로 새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승(承).
<기간토마키아>의 전장을 밝혔던 성화가, 이제 [최후의 벽]을 불태우기 위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
열차의 선두에서 굉장한 화염이 방출되며, 선두의 표면이 지독한 열기로 휩싸였다.
전신에서 [지옥염화]를 방출하는 정희원이,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설화고 나발이고 이제 다 끝이야!”
그녀의 검신이 빛을 발할 때마다 활자의 그물이 찢어졌다.
정희원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후폭풍의 스파크에 전신이 난자당하면서도, 자신의 검도(劍道)를 개척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희원의 삶이 만들어 낸 길. 우리는 그 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이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멀리서 [최후의 벽] 위로 문장이 전개되고 있었다.
「최후의 순간, 우리엘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의 설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이 이야기를 잊지 않는 별도 있으리라.」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우리엘과 심연의 흑염룡의 설화가 벽을 넘어 전해지고 있었다.
선악의 설화가 맹렬하게 부딪치며 우리를 비호하자, 열차의 양옆에 활자로 만들어진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포효하는 묵시룡처럼, 열차가 눈앞의 벽을 먹어치우며 돌진을 시작했다.
[멈춰!]
어느새, 우리를 쫓아오는 도깨비 왕의 모습이 보였다. 팔다리에서 설화를 쏟으며, 999회차의 인물들에게 쫓기는 도깨비 왕이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츠츠츠츠츠츠츳!
바닥에서 뻗어 나온 개연성의 스파크가 열차의 중심축을 뒤흔들었다. 기우뚱, 하고 흔들린 열차가 균형을 잃으려는 순간. 다시 한번 [최후의 벽] 위로 문장이 떠올랐다.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뇌창을 보며, 제천대성이 말했다.」
「멈추지 마라, 막내야.」
자신의 최후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제천대성이, 그 문장 속에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열차의 후미에 타고 있던 검은 코트의 사내가 일어섰다.
“유중혁!”
유중혁에게 빙의한 ‘은밀한 모략가’가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바닥의 후폭풍 사이로, 무수한 ‘이계의 신격’들이 떠올랐다. 단순히 ‘이름 없는 것들’이 아니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가가가가가가가】
【도움도움도움도움도움도움】
【잊지않았어잊지않았어잊지앟았어】
‘서유기’에서 우리를 도왔던, 또는 우리와 대적했던 ‘이름 없는 것들’이 흔들리는 열차를 떠받치고 있었다. 통천하의 급물살을 타는 배처럼, 그들이 우리의 열차를 [최후의 벽]으로 운반하고 있었다.
[당신은 ‘최후의 벽’의 핵심에 근접하였습니다.]
마침내, [최후의 벽]을 보호하던 모든 장벽이 무너졌다.
기관차의 곳곳이 파괴되었고, 수르야는 정신을 잃었는지 더 이상 설화를 발출하지 않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최후의 벽]의 진체가 보였다. 지금껏 보아왔던 그 어떤 벽보다도 두껍고 광활한 벽.
【내가 넘지 못했던 벽이다.】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이번에도 안 되는 건가.’ 그것이 58회차 유중혁의 최후였다.」
「‘실수였다. 다음 회차에서는―’ 96회차 유중혁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벽 위로, 무수한 유중혁들의 최후가 흘러갔다.
유중혁뿐만이 아니었다.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 계백이 깨어나지 않는 자신의 숙적을 흔들었다.」
「각자 하나씩 팔을 잃어버린 고려제일검과 해상전신이 등을 맞댄 채 최후의 격을 발산했다.」
세상 모든 성좌들의 최후가 기록된 벽. 우리엘이나 제천대성을 포함한 모든 성좌들의 마지막이, 벽 위에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나와 일행들은 힘이 다한 기관차에서 내려 벽을 향해 달렸다.
「저 문장들을 지울 수만 있다면. 그래서, 저 모든 비극을 멈출 수만 있다면.」
[당신은 ‘최후의 벽’의 문장에 간섭할 수 없습니다.]
[해당 문서는 덮어쓰기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코드를 해제하십시오.]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안 된다. 무력으로도 부딪쳐 봤지만, 벽을 부술 수는 없었다.】
정희원이 외쳤다.
“여기까지 왔는데 뭔가 방법을······!”
【여기서부터는 그의 몫이다.】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 안에는 나와 함께 시나리오를 수행했던 3회차 유중혁의 것도 있었다.
「네놈이 바라는 ‘결말’은 대체 무엇이지?」
이것은 그 답을 알려주기 위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1863회차를 살아도 할 수 없었다며. ······정말 아저씨가 할 수 있는 일이야?”
그 말대로였다.
나는 유중혁처럼 ‘주인공’도 아니고, 한수영처럼 ‘작가’도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도 작가도 아니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볼 수 없고, 작가도 잊고 있는 것을 기억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오랫동안 ‘멸살법’을 읽어온 그만이 할 수 있는 일.」
나는 ‘최후의 벽’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의식을 완전히 집중한 상태에서, 그 벽의 표면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벽이 환한 빛을 발했다.
마치, 언젠가의 내가 읽고 또 읽었던 화면처럼.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그 장대한 이야기의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정립되고 있었다.
아직 나는 ‘멸살법’의 최종본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불행한 꼭두각시여. 그대는 너무 빨리 왔습니다. 미안하지만 이 너머는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기억 속에서, 1863회차의 도깨비 왕은 그렇게 말했다.
「실은, 이 모든 것이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채 내게 넘어온 것이라면.」
나는 일행들과 함께 벽을 향해 달려갔다.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내가 완성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전용 스킬, ‘독해력’이 극한으로 발동합니다!]
과열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나는 눈을 똑바로 뜬 채 벽을 노려보았다.
[최후의 벽] 위로 적힌 설화들. 머릿속으로 그 설화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설화와 설화가 연결된 방식이 보였다. 설화 속에 교묘히 장치된 요소들이 보였고, 다시 그것을 둘러싼 맥락들이 보였다.
「소설 속에 등장했지만, 끝내 사용되지 않은 것들.」
그러자 그 자체로 완벽해 보이던 이야기의 틈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들. 언젠가 회수되어야 할 것들.
오직 이 이야기의 ‘에필로그’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들.
「김독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새로운 특성을 개화하였습니다!]
[특성, ‘복선 회수자’가 발동합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의 입장에서 지켜본 나만이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의 빈 틈새.
나는 광활한 벽 위에 놓인 ‘다섯 개의 틈새’를 바라보았다.
“하영아.”
“맡겨 둬.”
제일 먼저 나선 것은 장하영이었다. 장하영은 내가 가리킨 벽의 틈새에, 정확히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최후의 벽’의 첫 번째 테마가 완성되었습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벽의 조각이 끼워 맞춰지며, 문장이 흘러나왔다.
「그 이야기는 ‘불가능한 소통’에 대한 이야기이다.」
“희원 씨, 길영아!”
고개를 끄덕인 정희원과 이길영이 각각 벽의 틈새를 향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두 개로 나누어진 ‘선악을 가르는 벽’이 하나가 되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최후의 벽’의 두 번째 테마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분별할 수 없는 ‘선악’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제 유상아의 차례였다.
“유상아 씨.”
천천히 다가간 유상아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손을 뻗었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최후의 벽’의 세 번째 테마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윤회하는 비극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네 개의 빈틈이 채워지자 마지막 빈틈이 남았다.
나는 그 빈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최후의 벽]의 마지막 조각.
그것은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조각이었다.
「김 독 자」
[제4의 벽]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제4의 벽.”
녀석도 나도, 서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 손 위로, 눈부신 활자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그 활자가 말하고 있었다.
「네 이야 기를 좋아 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벽을 향해 달려가 마지막 틈새에 녀석을 꽂았다.
「그 이야기는 결말을 바꾸고 싶었던 독자의 이야기였다.」
다음 순간, 벽에서 엄청난 스파크가 발생했다.
[코드가 해제되었습니다.]
벽의 권한이 나를 향해 열리고 있었다. 유중혁도 넘을 수 없었던 벽의 비밀이, 내게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성좌들의 문장이 떠올랐다. 내가 그토록 막고 싶었던, 제천대성과 우리엘의 마지막 문장.
「날아드는 칼날이, 제천대성과 우리엘의 목을―」
나는 그 문장을 힘껏 그러쥐었다.
츠츠츠츠츠츳!
손이 불타는 것 같았다. 칼날처럼 엉겨 붙은 설화들이 내 손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버텼다. 이 문장이 이대로 끝맺도록 둘 수는 없었다.
[‘최후의 벽’이 당신의 행동을 의아해합니다.]
[‘최후의 벽’이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원한 게 아니었느냐 묻습니다.]
원하지 않는다.
이런 결말을, 대체 누가 원한단 말인가.
[멈춰! 당장 멈추라고!]
집요하게 쫓아온 도깨비 왕이 설화를 뚝뚝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녀석의 눈이 깊은 살의로 뒤덮여 있었다.
[벽을 건드려서는 안 돼! 너는 후회하게 될 거다! 이 벽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네가 바라는 것도, 보고 싶은 광경도!]
그 말은 틀렸다.
이 벽 너머에는, ‘가장 오래된 꿈’이 있다.
“혹부리!”
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혹부리 왕이 도깨비 왕의 몸을 구속했다.
[드디어 만났구나, 나의 오랜 친우여.]
[······혹부리 왕!]
[일을 계속해라, 김독자. 약속을 지켜라.]
나는 문장을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날아드는 칼날이, 제천대성과 우리엘의 목을 ㅂ」
ㅂ를 붙든 채, 다음 모음의 발생을 막았다. 푸슈슉, 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이 끊어졌다. 줄줄이 새어 나오는 설화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당신은 ‘도깨비 왕’이 아닙니다.]
[당신은 해당 설화의 전개를 멈출 수 없습니다.]
바앗,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뭔가가 내 손등을 감싼 것은 그때였다.
마치 지우개라도 되는 것처럼, 비유가 온 힘을 다해 그 문장에 몸을 부비적대고 있었다.
「이야기꾼이, 독자의 편을 들었다.」
나는 비유와 함께 온 힘을 다해 문장을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멈추지 않는 문장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칼을 꽂았다. 제발, 제발. 제발.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글자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미 쓰인 문장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결말이 바뀌고 있었다.
「날드 아는 날 칼이, 우 리대 성과 제 천 ㅂ······.」
부서진 글자들이 강렬한 스파크를 일으키더니, 일제히 내가 읽을 수 없는 것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칼■■■■우■■■■제■■■■■■■■■■■■■■■■■■······.」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무수한 ‘이계의 신격’들이 울부짖었다. 마치 위대한 신에게 경배를 올리듯, 경건한 울음이었다.
나는 설화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붙든 채, 벽의 표면이 바뀌는 것을 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신유승이 내 손을 붙들고 있었다.
“아저씨······.”
[새로운 ‘거대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거대 설화, ‘최후의 벽을 부수는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거대 설화, ‘최후의 벽을 부수는 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머릿속에서 폭발하는 메시지와 함께, 눈앞의 벽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벽에 적힌 설화들과, 우리의 설화들이 한꺼번에 뒤섞이고 있었다. 무수한 ■들이 일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것은 원처럼 보였다.
새카만 원의 너머로, 뭔가가 보일 것 같았다.
[하하하하! 그래, 이거야! 약속대로 ‘최후의 벽’ 너머를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나다!]
도깨비 왕을 밀쳐버린 혹부리 왕이 새카만 원 속으로 뛰어들었다. 절규하는 도깨비 왕의 입을, [흑천마도]의 칼날이 꿰뚫었다.
일행들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세계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최후의 벽]도, <스타 스트림>도, 모든 것이 붕괴하고 있었다.
「부서진 벽이 일행들의 설화와 뒤섞이고 있었다.」
「무엇이 설화였고, 무엇이 존재였는지 점차 알 수 없게 되어가고 있었다.」
원의 너머에서 무언가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쪽을 보았다.
「······저게, 대체 뭐지?」
조금씩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뭔가가 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최후의 벽] 위로 내가 겪고, 느끼고, 판단하는 모든 것들이 엉성한 문장으로 흐르고 있었다.
「모」
“두······!”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 벽이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벽 위에서 나는 단지 서술되고 있었다.
어떤 문장은 흐릿하게 보였고, 어떤 문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흐르던 문장이 일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렇게, 벽 위의 모든 문장들이 멈추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