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화

512화 Episode 99. 가장 오래된 꿈 온몸을 따스하게 감싸는 희미한 빛 속에서, 혹부리 왕은 태아라도 된 것처럼 몸을 웅크린 채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꿈. 그의 ■■가 정해지기도 전의 이야기. 그는 오염된 숲속에 누워 있었다. ―입실론! 조금만 더 가면 돼. 이제 곧 마왕성이라고! 그 이야기 속에서, 그는 마왕을 토벌하는 용사였다. 세계를 지키기 위해 마왕 원정을 떠난 용사. 하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숙원을 이루지 못했다. 마왕 토벌 직전, 그는 자신의 친우를 보며 눈을 감았다. ―······길버트. 화면이 바뀌고, 이번 배경은 전쟁터였다. 그는 흑색의 야행복을 입은 무림인이었다. ―곽 사형! 마교 놈들의 본거지가 바로 저기요! 사위를 가득 채운 동료의 얼굴이 보였다. 물씬 그리움이 차올랐다. 그 생을 통틀어 그가 가장 사랑했던 한 사람. ―······난 이미 틀렸네. 사매, 먼저 가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소리와 함께, 다시 시야가 암전되었다.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범람하는 기억 속에서, 혹부리 왕의 자아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기억인가, 아니면 「최후의 벽」의 이야기인가. 이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가.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어린 헤츨링이었다. 이름 모를 괴수종이었으며. 무림의 고수거나, 중세의 기사였다. 그때마다 그는, 시나리오를 수행하는 화신이었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벽] 앞에서 들려온 것은 이름 모를 그림자의 목소리였다. ―친우여, 다음 생도 나와 함께 해주게.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뜨자, 새카만 어둠이 눈에 스며들었다. 뒷덜미를 흥건히 적신 식은땀에 오한이 들었다. ‘나는 혹부리 왕.’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진짜 이름도 따로 있었으나,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아니, 그것이 그의 이름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혹부리 왕인가.’ 새카맣게 소용돌이치는 진공 속에서, 혹부리 왕은 깊은 사색에 잠겼다. 필멸을 벗어난 이후 한 번도 떠올린 적 없는 사색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설화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을 되찾기 위해 기억을 반추했다. 「태초에 혹부리가 있었다.」 「그는 최초의 이야기꾼. 설화를 노래하는 인간.」 「그러던 어느 날, 세상에 도깨비가 나타났고.」 「도깨비는, 혹부리의 노래를 가져갔다.」 그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뿐이었다. 빌어먹을 도깨비들이, 혹부리의 노래를 가져갔다는 것. 탄생 설화를 빼앗김으로써, 그를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에서 추방시켰다는 것. [혼란스러워 보이는군, 나의 오랜 친우여.] 들려온 진언에 혹부리 왕이 기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새카만 어둠 속에 도깨비 왕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도깨비 왕!] 혹부리 왕은 으르렁거리며 자신의 격을 방출했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에서, 그가 방출한 격은 그저 희미한 스파크만을 남길 뿐이었다. 도깨비 왕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이곳에서는 싸울 수 없다. 우리가 가진 힘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니까.] [······용케도 살아있었군. 꼭두각시의 검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그리고 또 죽게 될 테고.] 도깨비 왕의 시선이 닿는 곳에, 원형으로 소용돌이치는 빛의 출구가 보였다. 두 존재의 영혼체가 느릿한 속도로 출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혹부리 왕이 외쳤다. [아니, 나의 설화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나는 이제 ‘최후의 벽’ 너머로 간다. 이 모든 세계를 상상한 나태한 신과 마주하고, 이 세계의 비밀을 아는 유일자가 될 것이다!] [세계의 비밀이 그렇게 궁금한가?]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 자신의 탄생이 궁금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존재가 불행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 자조하듯, 도깨비 왕이 말했다. [왜 존재에게 ‘망각’이라는 고마운 능력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나?] 어둠 속에서 설화의 파편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맥락을 잃어버린 이야기들이, 활자 더미가 되어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누구도 읽을 수 없게 된 이야기들이었다. 그것들을 어루만지던 도깨비 왕이, 이내 설화를 으스러뜨렸다. [이 우주엔 불필요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 그것들을 모두 없애고 최적화하기 위한 프로세스가 필요하지. 그게 ‘망각’이다.] [헛소리! 우주는 무한하다. ‘최후의 벽’에 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벽의 여백이 아무리 많다 한들, 한낱 엑스트라에게 허용될 여백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도깨비 왕은 조금씩 부서져 가는 자신의 몸뚱이를 내려다보았다. [불행하게도, ‘최후의 벽’이 선택한 주인공은 너나 내가 아니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는 곧 네가 원하는 존재와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 혹부리 왕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빛의 출구가 보였다. 황홀하고 휘황한 빛. 맹렬하게 회전하는 그 출구는 마치 어떤 세계의 마침표처럼 보였다. 혹부리 왕은 두려워졌다. [네놈은 저 너머를 본 적이 있나?] 도깨비 왕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표 이후의 모든 문장에는 의미가 없다는 듯, 무료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사족을 덧붙였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뭐?] [이 세계가 아득한 꿈의 편린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말이다.] 깊은 허망함이 담긴 말이었다. 혹부리 왕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빛이 점점 밝아지고 있음에도, 도깨비 왕의 표정은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이제 빛의 출구가 코앞이었다. 불안해진 혹부리 왕이 물었다. [······네놈은 왜 지금까지 <스타 스트림>을 이어온 거지?] 그 질문이 뜻밖이었던 걸까. 도깨비 왕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는 혹부리 왕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글쎄. 잊어버렸다.] 그 순간, 도깨비 왕의 얼굴에 여러 설화들이 겹쳐졌다. 그는 마왕을 토벌하는 용사처럼 보였고, 마교와 싸우는 무림맹의 고수처럼 보였으며, 창공을 향해 날갯짓하는 헤츨링처럼 보였다. 그는······. [네놈―] [김독자는 열지 말아야 할 문을 열었다. 이제 이 세계는 영원히 불행해질 것이다.] 그 말과 함께, 세계가 빛으로 휩싸였다. 마침내 출구에 도착한 것이었다. 혹부리 왕은 비틀거리며 그 빛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빛살을 헤치고, 조금씩 나아갔다. 이곳에 해답이 있다. 이 세계를 만든, ‘가장 오래된 꿈’이 있다. 하지만 혹부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어디선가 시끄러운 경적이 들려왔다. 코끝을 적시는 매캐한 냄새. 숨을 쉬기가 점점 버거워졌다. 빛살 속에서 그의 몸이 타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이 여백은 그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잖나, 너와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도깨비 왕의 목소리와 함께, 혹부리 왕의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세계의 도구일 뿐이다.] 아, 아······. 다리가 녹고, 몸통이 녹아내리면서도 혹부리 왕은 눈앞의 광경에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저곳에 아주 오래된 꿈이 있다. 이 세계의 모든 비밀이 있다. 영원히 찾아 헤매던 뭔가가, 그곳에 있다. 혹부리 왕은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도깨비 왕이 한 말을 이해했다. 저것이, 저것이 정말로······. 혹부리 왕은 간절히 외치고 싶었다. 이쪽을 보아 달라고. 제발, 여기에 내가 있다고. 단 한 번만 눈을 마주쳐 달라고. 그러자 그것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하지만 그 시선이 마침내 혹부리 왕에게 도달했을 때, 이미 혹부리 왕은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다시 무언가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입안에서 까끌까끌한 감각이 느껴졌다. 차오른 숨을 토해내자, 벌레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활자였다. 감각이 되돌아오고, 시야가 점차 밝아졌다. 눈앞에서 새하얀 빛을 내뿜는 활자들이 보였다. 익숙한 내용이었다. 대체, 여기는······. “독자 씨? 그러다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겠어요.”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익숙한 목소리.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말. 끔찍한 상상력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최후의 벽]을 부수면, 어쩌면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파라락, 하고 찢어진 종이들이 눈앞을 날아다녔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내 눈앞에 책을 흔들고 있었다. “······상아 씨.” 눈앞에 유상아가 있었다. 주변 광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너부러진 책 무덤과, 빼곡하게 들어찬 장서관의 정경. 희미한 칸델라의 불빛. 이곳은 지하철이 아니었다. 여기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장소였다. 유상아가 생긋 웃었다. “이젠 아늑하게 느껴지네요, 여기.” 이곳은 [제4의 벽]의 안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 “저한테 물어보셔도······ 사실 저도 막 깨어났거든요. 사서 선배님들을 좀 찾아볼까요?” 유상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나는 내게 일어난 일들을 빠르게 점검했다. 「우리는 [최후의 벽]의 모든 조각을 모았고. 마침내 벽을 부쉈다.」 소용돌이치던 ‘네모난 원’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다른 일행들은? 「걱 정마 김 독 자」 다시는 들을 수 없을 줄 알았던 목소리. 나는 반가움에 소리쳤다. “제4의 벽!” 「도 서 관에 서 는 조용 히」 저 능청까지, 틀림없이 내가 기억하는 [제4의 벽]이었다. 하지만 반가움과는 별개로, 의문은 더욱 커졌다. 대체 내가 왜 지금 [제4의 벽] 안에 있는 거지? “독자 씨?” 어둠 속에서 하나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었다. “여긴 대체 어디에요?” “······나 이상한 책 발견. 『김독자와 성의 신비』” “그런 거 함부로 보면 안 돼, 지혜야.” “그럼 이건요? 『그들에게 성경이 있다면 김독자에겐 멸살법이 있다』” “그런 걸 읽고 싶니?” 정희원과 이지혜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린다 싶더니, 근처의 책 무덤에서 두더지처럼 조그만 머리통들이 불쑥 나타났다. “아저씨!” “형아!” 신유승과 이길영이었다. 어둑한 시야 속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한수영의 모습도 보였다. “별게 다 있네. 여기가 유상아가 말하던 그 ‘도서관’인가?” 한수영은 책장에서 책을 한 권씩 뽑아서 뒤로 던지고 있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이현성이 그 책을 재빨리 낚아채 품속에 담았다. “수, 수영 씨! 책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시면······ 이게 뭔지도 모르는데!” “야, 이건 뭐야! 재밌겠네.” 그들의 뒤쪽으로는 기절한 공필두와 장하영, 안나 크로프트가 차례로 늘어져 있었다. 그런 그들의 맥을 짚는 이설화의 모습까지. 적어도 ‘마지막 시나리오’에 진입했던 일행들은 모두 모인 듯했다. 「모 두는 아니 야」 [제4의 벽]의 목소리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직, 보이지 않는 녀석이 있었다. ······설마? 「(하하하하! 유중혁! 어디선가 유중혁의 냄새가 난다! 드디어 나와 하나가 되러 온 것이냐!)」 깊은 어둠 속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 말할 것도 없이 니르바나의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잠해진 니르바나가 축 늘어진 채 바닥을 뒹굴었고, 그런 녀석의 머리를 짓밟은 새카만 전투화가 보였다. “······불쾌한 공간이군.” “유중혁.” ‘은밀한 모략가’와 아직 분리되지 않은 모양인지, 녀석에게선 여전히 희미한 스파크가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지 못했다는 이들은, 대체 누구일까. “······성좌들이 없어요.” “지구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죠?” [제4의 벽]이 우릴 이곳으로 대피시켰다는 것은, 바깥 세상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산산이 부서져 나가던 [제4의 벽]과, 그 위에서 흩어지던 문장들이 떠오른다.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이야기를 바꾸려 하는 바람에,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한 걸까? 그러자, [제4의 벽]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했다. 「읽 지도 상상 하지 도않 기에 시간 이 흐르 지 않을 뿐」 그게 무슨 말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마침내 벽을 부쉈는가, 영원과 종장의 사도여.)」 「(······결국 이런 날이 오기는 하는군.)」 도서관의 사서인 ‘꿈을 먹는 자’와 ‘시뮬라시옹’이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제4의 벽]을 향해 말했다. “나를 다시 내보내 줘.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그러자 사서들이 답했다. 「(지금 바깥으로 나가면 너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스타 스트림>은 없다. 그곳의 모든 것은 멈춰버렸어.)」 모든 것이 멈춰있다. 실제로 벽 위로 들려오던 설화들은 더이상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대신, 어디선가 거대한 태엽이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계 초침 소리 같기도 하고, 아주 느릿하고 일정한 박자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럼 다시 초침을 돌려줄 녀석을 만나고 올게.” 「(······정말로 ‘가장 오래된 꿈’을 만나고 싶은가?)」 이 모든 이야기의 종착역에 그 존재가 있었다. <스타 스트림>은 파괴되었지만, 해결해야 할 질문이 남아 있었다. 「어째서 이런 세계가 존재해야만 했는가.」 돌아보자, 일행들도 비슷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들 역시 각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었고, 보고 싶은 종막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유상아가 말했다. “같이 가요, 독자 씨.” “나도, 나도 갈래!” “아저씨가 보고 싶어 했던 에필로그가 뭔지 궁금해요.” “자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진 말자고요. 의외로 착한 도깨비 같은 게 우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몇 대 때려서 그렇게 만들면 되고.” 그에 동조하듯 비유도 한마디를 했다. [바앗!]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유중혁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그 전에, 놈을 만날 방법이 있나? 벽은 부서졌지만, 바깥 세계의 시간은 멈췄다. 시간이 멈추면 설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도 마찬가지겠지.” 「(시간이 멈추지 않은 곳도 있지.)」 니르바나가 웃으며 바닥을 가리켰다. 그렇다. 이 ‘도서관’의 시간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설마 놈이 이 도서관 안에 있는 건가?” 「(······그런 건 아냐. 이 도서관도 ‘벽’일 뿐이니까. 다만 너희들이 이야기를 완성해서, 통로 하나가 열렸다. 이제 저쪽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지.)」 니르바나는 그 말을 하며 우리를 안내했다. 왠지, 그가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도서관의 아래로 펼쳐져 있던 낭떠러지가 떠올랐다. 「이곳이 이 도서관의 끝. 모든 이야기의, 끝이었다.」 아득한 무저갱. 마치 심연처럼 드리워져 있던 계곡. 언젠가, [제4의 벽]에 처음 들어왔던 날 내가 발견한 장소였다. “······그때 거기야.” 처음 이곳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뻔했었다. 그때 니르바나는 말했다. 저곳으로 떨어지면 죽는다고. 저곳이, 바로 벽의 너머라고. 니르바나가 물었다. 「(김독자, 정말 가고 싶은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니르바나가 허공에 늘어진 밧줄을 당겼다. 도르래 같은 것이 움직인다 싶더니, 작은 엘리베이터 같은 것이 천천히 올라왔다. 「(타.)」 우리는 엘리베이터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용 특성, ‘심연을 들여다본 자’가 활성화됩니다.] 이제 정말로 내가 찾던 답이 눈앞에 있었다. 내 안에 남은 설화들도 동요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아래쪽으로 내려갔을까. 마침내 도르래 소리가 멎었다.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자, 어둠 속에서 곰팡이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바닥은 미끈하고 축축했다. 아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시설물의 흔적 같았다. 칸델라의 불빛을 앞으로 하자, 노란색 블록으로 만들어진 희미한 선이 나타났다. “여기는······.” 정희원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노란 블록 너머의 어둠 속에서 뭔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전체가 불길하게 진동했다. 마치 괴물이 달려오는 것처럼 폭력적인 굉음이었다. 잠시 후, 통로 저편에서 희미한 괴물의 두 눈이 나타났다. “······맙소사.” 중얼거린 정희원은 그 괴물을 보고서도 검을 잡지 않았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괴물이 무엇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 지하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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