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화

510화 그것은 아주 오래된 약속이었다. 「“내가 너의 이야기를 끝내줄게.”」 1863회차에서,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당신의 ■■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굳게 쥐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든 시나리오를 함께해 온 검의 단단한 칼자루가 느껴졌다. 그 칼끝이 바닥과 닿으며 문장들이 떠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장들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이 세계의 끝을 궁금해했고.」 「누구보다 이 세계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나의 마지막 설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김독자?” 나는 내 귀를 막은 한수영의 손을 풀었다. 한수영의 두 눈이 흔들렸다. 한수영의 망막에 붉게 얼룩진 내 모습이 비쳤다. 뺨을 길게 가로 지른 상처. 찢어진 날개와 부러진 마왕의 뿔. 엉망진창이다. 그 엉망진창의 인간을, 한수영은 지금까지 믿고 와주었다. [선택한 것인가?] 스파크가 터져 나오는 중심에서 도깨비 왕이 물었다. 999회차의 인물들, ‘이계의 신격의 왕’들이 안간힘을 쓰며 대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막상막하의 싸움이었지만, 개연성의 후폭풍이 부는 방향으로 보았을 때 결국 불리해지는 것은 999회차 쪽일 것이다. “그래.” 나는 도깨비 왕을 향해 대답했다. “나는 ‘최후의 벽’을 넘겠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녀석을 만나겠어.” 이 모든 비극의 원흉, ‘가장 오래된 꿈’. “놈을 만나, 세계의 모든 비극을 멈출 거야.” 내 선택에 만족했다는 듯, 도깨비 왕이 웃었다. [그래, 좋다. 내 후계자가 된다면 가능한 일이지. 자, 이쪽으로 와라. 어서 <스타 스트림>의 의지를 계승하여―] “네놈 도움을 받겠다곤 안 했어.” 나는 [바람의 길]과 [전인화]를 동시에 일으켰다. 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보법 위에 백청의 전격이 휘감기며, 나의 몸이 하나의 빛무리로 바뀌었다.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나는 도깨비 왕과 이계의 신격들을 지나쳤다. 내가 목표로 삼은 곳은 [최후의 벽]의 가장 깊은 곳. [너······!] 놀란 도깨비 왕이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멀리서 [최후의 벽] 위를 질주하는 문장들이 보였다. 「심연의 흑염룡의 마지막 비늘과, 우리엘의 마지막 깃털이 떨어지는 장소.」 나는 기함하며 그 문장을 향해 달려갔다. 「페르세포네의 마지막 눈물이 떨어지는 곳.」 그 문장들이 끝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설령 이 세계의 끝을 보더라도, 저 문장으로 끝맺어서는 안 된다. 내 속셈을 눈치챘는지, 도깨비 왕이 대경하며 외쳤다. [그만둬! 너는 아직 허락받은 존재가 아니야. 너는 그 벽에 손을 댈 수도, 그 벽을 넘을 수도 없어!] 츠츠츠츠츠츳!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개연성의 후폭풍이 내 전신을 옥죄었다. 화신체를 분자 단위로 으깨어버릴 듯한 스파크에 일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최후의 벽’이 당신의 접근을 거부합니다!] 벽이 나를 거부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문장에 손대는 것을, 그 내용을 바꾸고 그 너머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곳에 도달하는 일 자체가 허락될 수 없다는 듯이. 순식간에 공간을 넓힌 벽의 문장들이 어느덧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그 문장은 김독자의 것이 아니었다.」 밀려온 광풍이 나를 넘어트렸다. 나는 애먼 공백으로 내던져진 단어처럼 비참하게 바닥을 나뒹굴며 뒤쪽으로 밀려났다. 내 등 뒤에 뭔가가 쿵, 하고 부딪쳤다. “멍청아! 혼자 그렇게 돌진한다고 뭐가 되냐?” 한수영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대꾸했다. “혼자 돌진한 거 아니야.” 그녀의 뒤로,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누구도 잃고 싶지 않다. 잃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독자 씨! 계속 달려요!” [심판의 시간]을 발동한 정희원이 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달려왔다. 이현성과 이지혜가 정희원의 옆을 사수했고, 유상아와 아이들이 그 뒤를 따라왔다. 일행의 최후미를 따라오는 것은 장하영과 사부들이었다. “이거 가져가요! 마지막 생사환이에요!” 공필두로 인해 쫓아올 수 없었던 이설화가, 우리를 향해 환단통을 던졌다. 곧바로 [생사환] 하나를 꺼내 삼켰다. 그러자 망가져 가던 화신체가 빠르게 수복되기 시작했다. [멈춰!] 도깨비 왕의 외침과 함께, 벽에 기록된 문장의 맥락 사이로 이형의 존재들이 나타났다. ‘이계의 신격’들이었다. 아직 벽에 기록될만한 설화를 얻지 못한 존재들. 【■■■! ■■■ ■■■ ■■■!】 모든 이계의 신격들이 그들의 왕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강한 힘을 갖추었음에도 도깨비 왕의 수족이 되어, 시나리오 부역자를 자처하는 존재들도 분명 있다. 콰콰콰콰콰콰! [놈들을 막아! 그러면 너희들의 설화를 ‘최후의 벽’에 남겨주마!] 사방에서 밀려오는 촉수를 발견한 사부들이 칼을 뽑았다. “여긴 우리에게 맡겨라.” 파천검성의 [파천검도]와 키리오스의 [백청강기]가 하나의 빛살로 어우러지며 벽 위에 그들의 문장을 남겼다. [거대 설화, ‘제 1무림’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무림 최강의 두 고수가, 촉수들을 막아서며 악전고투를 펼쳤다. 하지만 그들이 벌 수 있는 시간은 찰나뿐이었다. 도깨비 왕이 연 ‘맥락’ 사이로 밀려오는 ‘이계의 신격’들이 너무 많았다.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설화들이 환한 빛을 발합니다!] 사부들이 벌어준 시간을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우리엘과 제천대성의 설화를 기록하는 벽면은, 다시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답은 하나뿐. 멀어지는 속도보다 더 빨리 다가가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최후의 벽] 위에 어떤 문장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그린 존’이 벽면에 붙어 있다니······ 생각해 보면 그것을 ‘방’의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은 애초에 인간들뿐이었다.」 문득, 나는 내가 딛고 있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 또한, 다른 방향에서는 또 하나의 벽이다. 달려온 벽 위에 우리의 족적이 남아 있었다. 족적 위로 우리가 쌓아온 설화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독자 씨는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세요?”」 「내 인생의 장르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객실에 남은 사람의 숫자는 열둘이야. 채집망에 남은 곤충은 세 마리고.”」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는 유일한 독자였다.」 첫 번째 시나리오. 처음으로 지하철에서 탈출하던 그때. 「당신의 배후를 선택하세요. 선택한 배후는 당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실망하였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에 재미있어 합니다.]」 배후 선택. 별빛이 우리의 발치를 밝혀주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설화들이, 우리가 달려갈 길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식량을 독점한다는 게 정말이에요?”」 「“일어나요, 다들. 시나리오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건방진 세입자가 오셨군.”」 「“현성 씨, 지금입니다. 다 부숴버리세요.”」 금호역과 충무로의 전투를 넘어서고. 「“아홉 번째······ 하차자입니다.”」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유중혁이다.”」 ‘깃발 뺏기’의 전장들과 선지자들과의 혈투를 기억한다. 「“우스운 일이다. 이미 모든 역사가 저물었는데, 어째서 그대들은 또다시 이곳에 모인 것인가?”」 「“폭군왕이라는 놈입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예쁘고 잘생기면 첩으로 삼고, 못생기면 죽이거나 노예로 부린다고 하더군요.”」 「“독자 씨는 잡히면 노예네요.”」 「서울 7왕 중 최강은, 당연히 패왕(霸王) 유중혁이다.」 광화문에서 ‘왕들의 전쟁’을 맞이했고. 「“그러니 나는 ‘절대 왕좌’에 앉지 않을 겁니다.”」 [절대 왕좌]를 부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왕좌에 앉도록 허락하지도 않을 겁니다.”」 모든 순간이 역경이었다. 쉬운 시나리오는 하나도 없었고, 우리는 언제나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워왔다. 그 모든 비극들이, 결국엔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달렸다. 실타래처럼 하염없이 풀려 나온 설화들은 이내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형상은 곧 백호의 모습을 띄었다. 고귀한 수염과 무늬를 가진 백호가, 내 곁을 함께 달렸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왕이 없는 세계의 왕’. 나의 탄생 설화가 나를 배웅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는 길을 뚫은 백호가 우렁찬 울음을 터트리더니 어느 순간 멈춰섰다. 지금부터는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듯. 하염없는 눈으로 내가 가는 길을 좇으면서.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어느덧, 푸른 매의 형상을 한 나의 두 번째 설화가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질문의 재앙’으로 강림한 귀환자 명일상을 죽이고 얻은 설화. [설화, ‘이야기꾼을 능멸한 자’가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우리의 모든 설화가 [최후의 벽] 위에서 우리를 달리게 했다. 자신들의 설화가 나올 때마다 일행들의 표정도 변했다. 이현성이 멈칫거리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고, 참지 못한 신유승이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이것이 그들이 살아온 길이었고, 그들이 끝내야 할 이야기였다.」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피스랜드]에서 ‘야마타노 오로치’의 그림자를 사냥하고 얻은 설화. 거대한 뱀의 그림자가 우리가 달려가는 길을 떠받치고 있었다.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이야기는 없었다. 그 모든 순간을 제대로 살았기에 우리가 이곳에 있었다. 츠츠츠츠츠츳! 후폭풍이 거세어질 때마다 우리의 설화들이 힘을 잃고 스러졌다. [설화,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가 당신을 배웅합니다.] 거대한 오징어를 닮은 설화가 후폭풍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했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내질렀다. 달려드는 ‘이계의 신격’들을 뿌리쳐내고, [최후의 벽]을 향해 달렸다. 멀리서, 여전히 성좌들의 설화가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엘의 손에서 ‘업화의 불꽃’이 떨어졌다. 마지막 순간, 우리엘은 밤하늘에 빛나는 하나의 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엘도, 심연의 흑염룡도, 제천대성도 살아있다. 이야기를, 바꿀 수 있다. [‘최후의 벽’이 당신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접근 방지 프로세스’가 실행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걸음이 멈췄다. 눈앞에, 겹겹이 쌓인 얇고 투명한 벽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두터운 밀도로 만들어진 벽. 몇 번이고 내리쳐 보았으나, 개별 설화들의 힘만으로 부술 수 있는 강도가 아니었다. 사부들을 무시하고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이계의 신격’들이 보였다. 도깨비 왕이 안심했다는 듯 우리를 향해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의 별들이 저물었으나, 모든 별들이 저문 것은 아니었다.」 밤하늘의 어디선가 가는 진동 같은 것이 울려 퍼졌다. 제일 먼저 상황을 눈치챈 한수영이 눈을 거칠게 부비며 말했다. “너무 늦었잖아!” 멀리서 달려오는 열차의 선두가 보였다. 수르야의 태양 열차가, 방주의 파편들을 튕겨내며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성좌, ‘지고한 빛의 신’이 마지막 시나리오의 전장에 현현했습니다!] [늦어서 미안하군, 구원의 마왕.] 마침내 신화급의 격을 획득한 그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이 무대에 도착한 것이었다. “아뇨, 딱 맞춰 오셨습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침내, 기(起)의 조건이 충족되었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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