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화
503화
묵시록의 최후룡.
‘성마대전’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대재앙이자, <스타 스트림>의 가장 끔찍한 멸망.
[「무대화」의 재현율이 한계치를 돌파했습니다!]
먹구름 사이로 내리치는 천둥이 이전과는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아스가르드>의 오딘, <파피루스>의 오시리스도 입을 벌린 채 경악했다.
“흑염룡!”
묵시룡의 시선이 아주 짧게 한수영의 얼굴에 머물렀다.
「원작과 다른 성좌는, 우리엘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원작에서는 망상악귀 김남운의 배후성이었던 녀석.
‘절대악’을 대표하는 악룡들의 수장이자, 성운 <흑운>의 지배자.
녀석이 고개를 들어 천공을 향해 울었다.
이 세계의 최종장을 알리는 그 포효에, <스타 스트림> 전체가 흔들렸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의 ■■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원작에서 녀석의 ■■이 무엇인지 읽었다.
1863회차에서 잠깐 유중혁의 편이 되었을 때, 녀석에 관한 서술이 나왔다.
「이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지독한 우울을 앓는 악룡.」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을 15세라 믿는 이유는, 그렇게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수천수만 년에 달하는 아득한 생이 고독한 용을 그렇게 만들었다.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기 위해서, 녀석은 늙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화신들을 괴롭히거나 괴상한 장난들을 쳤다. 최후의 장난으로 ‘절대악’을 배신했다. 유중혁의 편에 서서, <스타 스트림>을 조롱하며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에 도달했습니다!]
이번 세계선에서는 어떨까.
녀석은 이 공허한 우주에서 자신의 ■■를 찾아냈을까.
[성좌, ‘심연의 흑염룡’의 ■■는 ‘순수(純粹)’입니다!]
‘심연의 흑염룡’이 나를 보며 웃었다.
자신이 찾아낸 역할이 썩 마음에 든다는 듯, 흑염룡의 어린아이 같은 눈동자가 세계를 멸망의 밤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충만한 개연성이 최종 시나리오에 ‘묵시룡’을 재현하였습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시나리오와 완전한 합일을 이루었습니다!]
묵시룡의 재현에 신화급 성좌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되는······!]
묵시룡의 설화에 대해 모르는 성좌는 아무도 없다.
‘최초의 꼬리짓’으로 <스타 스트림>의 한 방위를 날려버릴 대재앙.
[막아라! 꼬리짓이 시작되기 전에 놈을 처치해!]
대경한 신화급 성좌들이 허둥대며 명령했다.
나도, 한수영도, 유중혁도 그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신화급 성좌들 중, 정말로 ‘묵시룡’을 제대로 겪어본 이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때 함께 싸웠던 신화급 성좌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방주’에 숨어, 묵시룡이 해방되던 그 순간에도 모든 것을 유희처럼 관망하던 놈들이었다. 그 공포를, 두려움을, 목숨을 건다는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던 놈들이었다.
곁에 있던 유중혁이 물었다.
“네놈은······ 줄곧 이 순간을 준비했던 건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처음 시나리오를 시작하던 순간부터 나는 줄곧 계산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을 몰살하려면, 얼마만큼의 설화를 쌓아야 할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인간의 생은 짧았고, 별들은 불멸했다. 시작지점이 다르니 공평한 싸움이 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나는 유중혁 같은 회귀자가 아니었다. 1863회차에 달하는 생을 쌓아, 놈들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설화를 모아 대적하겠다는 생각 부터가 틀렸던 거야. 전설급이든 신화급이든, 아무리 많은 설화를 모아도 순수한 격으로 저들을 누를 수는 없어.”
“그래서 생각해낸 게 이거란 거군.”
나는 고개를 그덕이며 [신단목]을 등진 채 함께 싸우는 김유신과 계백을 보았다.
「김독자는 ‘무대화’에서 싸움의 해답을 찾아냈다.」
「무대화」. 비록 가상(假像)이지만 개연성이 커질수록 현실이 되는 힘.
‘마왕선발전’에서 수르야를 물리쳤을 때 그 힘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기간토마키아’에서 <올림포스>를 물리쳤을 때 계획의 초안이 잡혔다.
‘성마대전’을 겪고, ‘서유기’를 이겨내면서부터는 확신이 생겼다.
「그들이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이겨낼수록, 그들이 가진 ‘거대 설화’의 재현력은 더욱 강해진다.」
그날의 공기. 그날의 감정.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멸망을 마주한 인간들이 느꼈던 공포.
「그날, 그들이 느꼈던 공포를 이제 성좌들이 느낄 차례였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묵시룡의 ‘최초의 꼬리짓’이 시작되었다.
콰콰콰콰콰콰콰!
묵시룡의 꼬리짓은 세 개의 충격파로 나뉘어진다.
1단계 ‘전격파’, 2단계 ‘염열파’, 그리고 실질적인 꼬리짓이자 3단계인 ‘혼돈파’.
[크아아아아아아― 내가 막겠다!]
언젠가 나와 함께 전격파를 막아냈던 토르가 앞장섰다. 이전에도 함께 충격파를 감당한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완전한 오판이었다.
[토르―!]
새카맣게 타버린 토르가 허공에서 추락했다.
그때 토르가 전격파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나와 디오니소스, 그리고 스승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토르를 돕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으아아아아아―!]
겁에 질린 성좌들이 등을 돌려 달아나는 순간, 모든 신화급 성좌들이 자신의 격을 개방했다. 어마어마한 후폭풍과 함께, 천공의 모든 별들이 일제히 점멸했다.
폭발한 전격파가 고운 안개 입자처럼 사위를 덮었다.
시야가 개었을 때, 묵시룡의 전격파는 상당 부분 상쇄되어 있었다.
[······고작 이 정도인가?]
츠츠츠츳······!
전격파를 받아낸 것은 <아스가르드>의 수장, 오딘이었다. 그가 자랑하던 고풍스러운 수염이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다. 옷도 완전히 녹아내려 나신이 된 오딘은, 전격파로 흉측하게 일그러진 피부를 드러내며 웃었다.
[겨우 이 정도로······!]
스스스스슷······.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곁에 있던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먼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충격파를 상쇄할 개연성을 감당하다가 생을 다한 성좌들.
오딘의 눈이 커졌다. 허공에 하릴 없이 퍼지는 잿빛 가루.
방금의 일격으로, <아스가르드>의 절반이 소멸했다.
쿠오오오오오오오!
<베다>도, <파피루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여와!]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오시리스가 뒤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그곳에는 이미 <황제>의 세력을 이끌고 선실에서 철수하는 여와의 모습이 있었다. 전황이 불리함을 깨닫고, 그는 이미 퇴각을 준비했던 것이다.
“공필두.”
내 말과 함께, 공필두의 성채가 움직였다. 황제의 세계관으로 향하는 길목을 정확히 막아선 [무장요새]의 포탑이 불을 뿜었다.
“너흰 못 가.”
그와 동시에, 묵시룡의 두 번째 충격파가 터졌다.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른 ‘염열파’의 불꽃이 창공의 성좌들을 녹이고 있었다.
[관리국!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건가!]
오딘의 비명에, 대도깨비 가랑이 설화를 꾸역꾸역 토하며 손을 위로 들었다.
[······좋다. 네놈들이 ‘무대화’를 이용한다면.]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츠츠츠츠츠츠······!
「무대화」의 권능이 발휘되고 있었다.
강력한 스파크의 기운에 뒤를 돌아보자, 유상아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상아 씨!”
그녀의 곁에서 회전하던 연화대에 균열이 일었다.
꾸역꾸역 피를 쏟는 유상아가 면목이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나는······ 나오지 못했지만······ 다른 하나의 일부가.”
석존이 ‘환생자들의 섬’에 봉인한 대존재는 둘.
하나는 전대의 묵시룡.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자신의 테마를 드러냅니다!]
[이계의 존재가 ‘벽’의 봉인을 뚫고 세계에 재현됩니다!]
츠츠츠츠츠츳!
허공을 일그러뜨리며 검은 안개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 암무의 건너편으로 보이는 셀 수 없이 많은 눈들. 석존에게 봉인되어 영원의 암흑 속에 갇혀 있어야 했을 <스타 스트림>의 청소부.
[■■■■■■■■!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이여!]
나는 도깨비들이 하려는 짓을 깨달았다.
저놈들은 내가 ‘성마대전’에서 묵시룡을 막았던 방법을 쓰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타 스트림>의 최악 최흉을 대변하는 두 개의 재앙이 부딪쳤으니」
[하하, 하하하! 너희들은 결코 종장에 도달할 수 없다. 너희는 결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도깨비들의 머리가 폭발했다.
그들의 설화를 빨아들인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이 거칠게 요동쳤다.
묵시의 힘을 얻은 흑염룡과, 대도깨비의 설화를 얻은 이계의 신격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세 번째 충격파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묵시룡의 꼬리가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느릿하지만 확실한 속도로 떨어지는 재앙.
마음이 급해진 여와가 허공을 향해 고함쳤다.
[대체 무엇들 하고 있는가! 복희! 신농! 제곡! 빌어먹을 삼황오제(三皇五帝)여, 언제까지 심연의 잠에 빠져 있을 셈인가!]
쿠구구구구구!
여와의 진언이 오래된 <황제>의 성좌들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제껏 나타나지 않았던 ‘신화급 성좌’들의 가호가 여와의 화신체 위로 덧씌워졌다.
어마어마한 격의 증폭에 공필두의 [무장요새]가 밀려나고 있었다.
막아야 했다.
여기서, 저들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돌아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거대 설화, ‘서유기’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성운 <황제>의 거대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거대한 이무기로 변한 여와가 자신의 불꽃을 입에 물었다.
기세를 모아 <황제>의 성좌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바로 그 순간.
쿠르르르릉!
하늘에서 뇌전이 내리치며 여와가 비명을 질렀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통천하의 정경이 펼쳐지며, 황금빛 호랑이 가죽을 걸친 존재가 내 앞을 지켰다.
콰콰콰콰콰······!
황제의 아득한 신화급 성좌들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최후의 방주’에 현현했습니다!]
이제, 나의 형제가 된 별.
[‘미후왕’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필마온’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투전승불’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든 손오공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제천대성’이 당신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가거라, 막내야.]
먼 하늘에서 묵시룡의 꼬리와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이 충돌하는 것이 보였다. 저 충돌로 인해 벌어질 결과를 알고 있었다.
「모든 별들의 파멸을 꿈꾸었다. 정말 그리 되길 원했는가.」
1863회차의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돌아선 제천대성이 <황제>의 성좌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유중혁과 한수영이 나를 들고 달렸다.
공필두가 뭐라 뭐라 외쳤고, 이설화가 품속에 들어있던 모든 환약들을 꺼냈다. 이현성의 강철이 우리들을 덮은 것이 먼저였는지, 새하얀 섬광이 세계를 덮은 것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전신이 뜨거운 고열에 녹아버릴 것 같다 싶더니, 그다음에는 차가운 한파에 노출된 것처럼 추워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선실 바깥에 너부러져 있었다.
붕괴한 내벽들 사이로 마구잡이로 흘러나온 설화들이 고통스럽게 별들의 최후를 노래했다.
‘소품 보관실’의 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반쯤 열린 그 문 너머로, 잿빛 가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어쩌면, 저 안에 있는 모두는―
스슷.
작은 인기척과 함께, 한수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독자?”
나는 문을 향해 기어갔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가까스로 문의 언저리에 도달했을 때, 나는 누군가가 그곳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찢어진 백색 깃털이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다.
입을 열려는 나를 대신해, 우리엘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독자······.]
진언은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향해 우리엘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하얀 손이, 내 뺨과 눈가를 어루만지듯 스쳤다.
망가진 우리엘의 날개 너머로, 적측 성좌들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그 끔찍한 재앙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은 별들이 있었다.
[‘무대화’가 종료되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의 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심연의 흑염룡’의 거체가 보였다. 그 위로 달려드는 거대 성운의 성좌들과, 대천사들의 날개를 뜯는 악마들.
수많은 적들이 우리엘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에······!”
나는 문을 열고, 검을 쥐고 우리엘을 대신해 녀석들을 베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맞은편에서, 단단히 문고리를 붙잡은 우리엘이 손을 놓지 않았다.
비명에 가까운 정희원의 외침이 들렸다.
“우리엘! 나와! 거기서 빨리 나와―!”
[괜찮아.]
이어질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우리엘이 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너희는, 이 이야기를 여기까지만 본 거야.]
선실의 문이 닫혔다.
[당신은 <스타 스트림>의 그 어떤 별도 이룩하지 못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문 너머의 이야기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고, 또 누군가가 절규했다. 방주가 기우뚱하더니 굉음을 내며 어딘가에 충돌했다. 나는 바닥을 엉망으로 나뒹굴었다. 현기증 속에서 바닥을 짚었을 때, 진동은 어느새 멎어 있었다.
몸을 일으킬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격벽을 따라 이어진 곳엔 새로운 장소가 있었다.
방주가 충돌한 무언가와, 방주의 내부가 연결되어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별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어떤 별들도,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은 오직 한 존재뿐이었다.
[‘이야기의 왕’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란 광물 같은 것이 파괴된 방주의 경사를 따라 굴러떨어졌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 보석이야말로 우리가 방주에서 줄곧 찾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도 일행들도, 그 보석에 집중할 기력이 없었다.
“······.”
방주에서 내린 우리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이의 벽. 방주에서 흘러내린 설화들이 그 벽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김독자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 벽이,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의 끝. ‘최후의 벽’이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