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화
502화
동쪽에 오딘, 서쪽에 여와, 남쪽에 오시리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거대 설화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신의 화신체가 붕괴하고 있습니다!]
저 메시지를 벌써 몇 번이나 들었는지도 잊었다. 바로 곁에 있는 유중혁의 몸도 정상이 아니었다. 한수영이나 나를 대신해서 오딘과 여와의 공격을 감당한 녀석의 전신은 이미 걸레짝이 되어있었다.
눈이 마주친 유중혁은 뭘 보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삼켰다.
[화신 ‘유중혁’이 ‘생사환’을 사용합니다!]
결국, 이설화가 준 마지막 생사환까지 사용했다. 이제 남은 생사환은 없었다.
[그아아아아아! 버텨라!]
한반도의 성좌들이 야수처럼 울부짖으며 병장기를 휘둘렀다.
김유신도, 계백도, 관창도. 한때는 서로 검을 맞댔던 모든 성좌들이 [신단수]를 사이에 두고 하나의 신화로 거듭나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서 적들을 베어내는 척준경의 모습도 보였다.
「[내가 이래서 이 땅을 저주하면서도 떠날 수가 없지. 몇 명만 뒈지면 되는 걸 다 같이 죽자고 덤벼들다니······.]」
풍백도 그의 곁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사자후를 터트렸다.
성마대전에서는 우리와 대립했던 그가, 이제는 우리를 위해 맞서고 있었다.
「[<홍익>이 후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대가 같은 건 필요 없다.]」
풍백의 바람이 요동치자 <홍익>의 성좌들이 일제히 바람을 타고 달려 나갔다.
이순신의 [유령함대]가 발포를 계속했고, 견훤의 화살이 별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하지만 적들의 숫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한반도는 어디에 있는 나라인가?]
[고작해야 위인급 녀석들이······! 벌레 같은 놈들! 모두 쓸어버려라!]
그럼에도 한반도의 성좌들은 잘 버티고 있었다.
[거대 설화, ‘신단수’가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의 힘을 격상시킵니다!]
적들에게 오딘이나 오시리스가 있다면, 이쪽에도 신화급 성좌는 있었다.
[신단수]의 힘을 증폭시키는 신화급 성좌, ‘선인왕검’.
[성좌, ‘선인왕검’이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라 말합니다.]
다른 신화급 성좌들과 달리, ‘선인왕검’은 그 존재감이 희미했다. 아마 이번 세계선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홍익>은 이번 세계선에서 거의 활약을 하지 못했으니까.
아마 <홍익>의 성좌들은 줄곧 다른 신화급 성좌들의 등살에 밀려 방주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등을 보이지 마라! 우리는 후퇴하지 않는다!]
[설화, ‘배수의 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척준경이 검을 치켜들고, 이순신이 그들을 지휘했다.
그 어떤 신화에도 굴하지 않는 신화적 역사의 주인공들이, 아득한 신화의 신들과 맞서 싸웠다.
살점이 찢어지고 전신이 난자당하면서도 무릎 꿇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한반도의 면적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백호로 변신해 싸우던 전우치가 쓰러졌다. 서애일필의 붓이 부러졌고, 이순신의 유령함대가 하나둘 침몰했다. 천명을 베고, 산과 바다를 가르던 척준경의 검도 둔해지고 있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몇 번이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일이었다.
지금부터 써나갈 설화는, 별들의 피로 얼룩진 문장들이었다.
[<스타 스트림> 최후의 거대 설화가 움트고 있습니다!]
다음 순간, 척준경의 목을 향해 토르의 도끼가 날아들었다. 한반도 최고의 무장도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모든 격을 개방합니다!]
그런 일격을 막아선 것은 전장에 강림한 우리엘이었다.
“김독자! 대천사들이 왔어!”
한수영이 외쳤다.
눈부신 섬광과 함께 전장에 강림하는 대천사들. 그 중심에서 [업화의 불꽃]을 휘두르는 우리엘이 있었다.
「[······저기, 나랑 가브리엘도 ‘김독자 컴퍼니’에 들어가고 싶은데.]」
최종 시나리오로 진입하기 직전, 우리엘은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우리의 성운으로 와서, 우리의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
「김독자가 아는 ‘원작’과 가장 많이 달라진 성좌.」
나는 우리엘이 왜 우리 이야기를 좋아해 주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저희를 돕고 싶으십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비겁하게도 그녀의 선의를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에덴>에 새로운 ‘대선’이 등장했습니다!]
화려하게 몰아치는 우리엘의 격.
이제 그녀는 ‘설화급 성좌’ 우리엘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새로운 ‘대선’?]
신화급 성좌들이 우리엘을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에덴>의 새로운 대선이자, 신화급 성좌인 ‘메타트론’을 대체할 존재.
우리엘은 <에덴>의 수장이 되어 우리를 돕기를 선택했다.
[치천사들은 모두 돌진하라!]
라파엘의 신호와 함께 대천사들이 <파피루스>와 <베다>의 설화급 성좌들과 충돌했다.
[‘가장 오래된 선’이 자신의 적수를 찾습니다!]
[멸망한 성운 따위가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 믿는가?]
여전히 건재한 오딘이, 자신의 창으로 우리엘을 가리켰다. 무엇으로도 피할 수 없다는 신창 [궁니르]가 우리엘을 향해 쇄도했다.
[꺼져.]
[업화의 불꽃]이 [궁니르]의 격과 충돌했다.
하늘을 찢어발기는 오딘의 벼락과 지옥을 불태우는 우리엘의 염화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격과 격의 대결. 한발짝도 물러나지 않는 두 신화급 성좌의 싸움에서 먼저 물러난 것은 놀랍게도 오딘이었다. 창을 회수한 오딘의 왼팔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한심하군, 오딘. 내가 돕지.]
신화급 성좌는 누구보다 위험에 예민한 존재들이었다.
변수를 싫어하는 이 세계의 가장 늙은 별들. 그렇기에 그들은 결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찰나에 시선을 주고받은 신화급 성좌들이 동시에 우리엘을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콰콰콰콰콰콰!
아무리 <에덴>의 대선이라도 받아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날개의 깃털이 찢겨 나가고, 새하얀 뺨에 붉은 설화가 튀어 올라도 검을 물리지 않았다.
[너희들은 나의 대적(大敵)이 아니야.]
언제나 하늘 위에서 우리의 설화를 지켜보았던 우리엘. 그런 우리엘의 눈이, 이제 나를 향하고 있었다.
[성운, <에덴>이 자신의 ‘거대 설화’를 준비합니다.]
“독자 씨!”
멀리서 정희원을 비롯한 일행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어쩌면 정희원은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엘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츠츠츠츠츳!
<에덴>만으로 저 모든 거대 성운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 이 방주에 깃든 신화급 성좌들의 기량은 <스타 스트림> 전체와 맞먹으니까. 그러니 저 성좌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가공할 개연성의 ‘거대 설화’가 필요했다.
[「무대화」가 발생합니다!]
말하자면, 저 모든 신화를 멸망시킬 거대한 신화가.
[나는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천천히 눈을 깜빡인 우리엘의 눈이, 그야말로 악귀처럼 불타고 있었다.
[나는 나의 수식언을 성립시킬 ‘악’을 원한다.]
그 말과 동시에, [업화의 불꽃]에서 뻗어 나온 불길이 천공의 별들을 불태웠다. 지옥의 건너편에서 뭔가가 요동치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선이 자신의 적수를 부르자,」
바로 그 순간, 이길영의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어졌다.
「지옥의 무저갱에서 몸을 웅크린 악마가 부름에 응답했다.」
불타는 하늘의 저편에서 새카만 먹구름 같은 것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스가르드>도, <베다>도, <파피루스>도 아닌 누군가가, 사악하고 음험한 기운을 품은 채 이쪽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성좌, ‘무저갱의 지배자’가 ‘만마전(萬魔殿)’을 개방합니다!]
불타는 지옥의 하늘에서 마귀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악’이 자신의 적수를 찾습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자신의 테마를 그려냅니다!]
마왕들의 부재를 대신해, 억겁의 세월 동안 숨을 죽여왔던 만마의 주인이 자신의 힘을 드러냈다.
신화급 성좌들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선악이 충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악의 대결을 지켜보던 오래된 존재가 있었다.」
신유승의 곁에서 날갯짓을 하던 [키메라 드래곤]의 몸에서 빛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미 원작에서도 본 적 있는 광경이었다. 마침내 신유승의 드래곤이 ‘고대룡’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눈부신 황금빛 광채. 온전한 ‘에인션트 드래곤’의 격을 갖춘 [키메라 드래곤]이, 창공을 향해 포효했다.
「드래곤 콜(Dragon call).」
자신의 생을 바쳐 동족을 부르는 용왕종들의 하울링.
그아아아아아아아!
어두컴컴해진 하늘의 건너편에서, 드래곤의 포효가 들려왔다. 곳곳에서 튀는 전류와 불꽃의 잔흔들. 세계의 모든 드래곤들이 [키메라 드래곤]의 부름에 응답해 날아오고 있었다.
[「무대화」의 재현율이 급격하게 높아집니다!]
용족들은 별들을 물어뜯는 대신 서로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내 화신체의 심장을 대신하는 [골드 드래곤의 심장]도 요동치고 있었다.
언젠가 ‘성마대전’에서 이미 본 적이 있는 광경.
「가장 뜨거운 지옥의 중심에서,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용이 깨어날 것이다.」
「그는 용 중의 용. 혼돈의 중심에서 태어난 모든 용들의 수장이자 세계에서 가장 늙은 증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에서 벌어지는 용들의 축제, ‘용의 제전’이 시작된 것이다.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깨달은 신화급 성좌들이 대경했다.
[이, 이 녀석들 설마······!]
[놈들을 멈추게 해!]
여기서 ‘성마대전’이 벌어지게 된다면, 어떤 재앙이 들이닥칠 것인지 모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감히, 감히 네놈들이!]
비형의 희생으로 이제 몇 남지 않은 대도깨비들이 방주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뿔이 부러진 대도깨비 ‘가랑’이 외치고 있었다.
[거대 설화의 개연성을 억제해라!]
대도깨비들이 자신의 권능을 발동하자, 방주의 신화급 성좌들도 일제히 코인을 사용했다.
[성좌, ‘12월 25일의 주인’이 ‘성마대전’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좌, ‘흙으로 사람을 빚은 대모신’이 ‘성마대전’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좌, ‘외눈의 아버지’가 ‘성마대전’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좌, ‘아비도스의 주인’이 ‘성마대전’을 원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코인이 한꺼번에 투입되자, 펼쳐지던 무대화의 개연성이 억제되기 시작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은 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코인을 지닌 존재들의 의지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오직, 단 한 존재를 제외하고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엔진 소리. 그리고 익숙한 궐련 냄새.
“오셨습니까.”
내 곁으로 척 다가선 ‘양산형 제작자’가 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설화로군.]
언젠가 미식협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이 세상 모든 설화를 사랑하는 성좌.
눈앞에서 요동치는 ‘성마대전’의 설화를 보며, ‘양산형 제작자’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생을, SSS급 아이템들을 양산하며 살아온 성좌.
[아주······ 오래 걸렸구먼.]
“죄송합니다.”
[처음 내 ■■을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좀 의아했다네. 내게 그런 ■■이 찾아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지금은 생각이 다르십니까?”
‘양산형 제작자’는 말없이 궐련을 비벼 껐다. 그는 나와 함께 ‘성마대전’의 설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가 싸워온 모든 시간들이 그곳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양산형 제작자’가 껄껄 웃었다.
[적어도 하나는 알 것 같네. 어째서 나의 설화들이, 내가 이토록 많은 코인들을 모으도록 종용했던 것인지.]
‘양산형 제작자’의 손끝에서 코인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감히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코인.
[오직, ‘단 하나의 무대’를 완성시키기 위함이었나.]
그의 생과 함께 축적된 코인들이 하늘을 향해 빨려 나가고 있었다. 그의 코인이, 무수한 성좌들의 의지와 충돌하고 있었다.
성난 신화급 성좌들이 고함을 치자, ‘양산형 제작자’가 입을 열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권위를 가진 성좌가 말했다.
[성좌들이여, 미안하지만 나는 이 무대를 볼 것이다.]
그의 모든 코인이 창공의 개연성으로 투입되자, 방주 전체가 개연성의 폭풍으로 뒤덮였다. ‘양산형 제작자’의 육신이 급격하게 노쇠하기 시작했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의 ■■는 ‘고갈’입니다.]
[부족한 개연성이 충족되었습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무대 위에 완전히 재현됩니다!]
츠츠츠츠츠츠츳!
천공에서 끔찍한 굉음이 발생했다. 폭발음과 함께 용족들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나는 한수영과 안나 크로프트를 끌어당기며 유중혁과 함께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대피했다.
마침내 이 모든 시나리오의 종장. 모든 성좌들의 멸망이 다가오고 있었다.
[‘성마대전’ 따위에 말려들지 마라! 이깟 대멸망 따위, 우린 몇 번이나 이겨내고 또 이겨내며 여기까지 왔다!]
신화급 성좌의 ‘거대 설화’들이 한꺼번에 깨어나고 있었다. ‘성마대전’의 스케일에 결코 압도되지 않겠다는 듯, 세상의 모든 ‘거대 설화’들이 포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 용은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보고 꼬리를 내리칠 것이다. 그 한 번의 꼬리짓에 별들이 추락하고 세계의 한 방위(傍位)가 사라지리라.」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
거친 용의 하울링이 들려오는 순간, 한수영이 소스라쳤다.
“김독자! 설마······!”
“맞아.”
“미쳤어? 지금 그놈을 다시 깨우면―!”
“우리가 깨우려는 건 그놈이 아냐.”
나는 한쪽에서 가부좌를 튼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유상아를 보았다. 그녀의 이마 위로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묵시룡의 봉인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석존의 후예인 그녀가 살아있는 한, 봉인된 묵시룡은 이곳으로 초환되지 못할 것이다.
당황한 한수영이 되물었다.
“그럼······.”
“모르겠어?”
하늘에서 추락하는 용족들을 보며 한수영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용의 제전’은 최강의 용을 가리는 의식. 그리고 그 의식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단 하나의 용이, ‘묵시록의 최후룡’이 된다.
언제부터였을까. 한수영의 왼팔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새로운 ‘묵시록의 최후룡’이 선출되었습니다!]
쿠오오오오오오!
마침내, 방주의 부서진 천장 너머로 거대한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지간한 거성들조차 손쉽게 찢어발길 정도의 크기.
마지막 탈피를 마친, 새카만 유선형의 외피에 황홀한 흑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최후의 방주’에 현현했습니다!]
“녀석이, 이제 묵시룡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