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화

501화 Episode 96.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최후의 방주’에 진입하였습니다!] 방주에 떨어지자마자, 정희원이 마주한 것은 성좌들의 무리였다. [당신은 ‘팔열지옥(八熱地獄)’에 입장하였습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필 떨어져도 지옥에 떨어지다니, 전생에 잘못한 게 많았나.” 확실한 것은 눈앞에 그녀를 노리는 적들이 있다는 것뿐. 서로의 몸통을 밟고 산처럼 밀려오는 배불뚝이 아귀들을 바라보며, 정희원이 소리쳤다. “우리엘!” 우리엘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엘의 가호는 여전히 그녀에게 깃들어 있었다. 정희원의 등에서 흰색 날개가 돋아남과 동시에, 그녀의 전신에 붉은 코로나가 깃들었다. [‘심판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 전방의 아귀 떼가 모조리 휩쓸려 나갔다. [악 성향의 성좌들이 당신의 냄새를 맡습니다.] 끝도 없이 몰려오는 적들. 이 「팔열지옥」이란 세계관에 기생하는 개체들인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그녀가 혼자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희원 씨!” 어디선가 달려온 이현성이 정희원과 등을 맞대고 섰다. “현성 씨도 잘못한 게 많은가 봐요?” [마왕, ‘붉은 안개의 지배자’가 당신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마왕, ‘괴완공’이 당신을 향해 증오심을 드러냅니다!] [성좌, ‘지옥 기생자’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 ‘무스펠하임의 불꽃’이 인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아귀들을 상대하다가는 마력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지옥의 성좌와 마왕들도 있었다. “뒤쪽입니다!” 어느새 그녀의 뒤로 접근한 아귀 떼가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그런 아귀를 향해 어디선가 날아든 탄환이 폭발했다. “희원 언니!” 이지혜의 전함이었다. 화색이 된 정희원이 외쳤다. “애들도 같이 있어?” “애들은 상아 언니, 설화 언니랑 같이 근처에 떨어진 거 같아요! 그리고 필두 아저씨는―” “그 아저씨까지 신경 쓸 시간 없어!” 갸아아아아아악! 지옥의 존재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암흑성]에서 상대했던 악마 백작부터, [마계]에서 조우했던 악마 공작급에 이르는 존재들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두, 다음 시나리오의 소재로 쓰이기 위해 지옥의 일부가 되어있던 자들이었다. “대천사!” “놈들을 죽이면 우리도 마왕위를 얻을 수 있다!” 그들을 향해 이지혜가 사격을 개시했다. [터틀 드래곤]의 모든 장탄이 불을 뿜자, 지옥이 지각 변동을 일으키며 곳곳에서 용암이 분사되었다. 용암 덩어리에 맞은 악마들이 녹아내렸다. 하지만 악마들의 개체수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해당 세계관은 ‘악’의 지배구역입니다.] 죽었다고 생각한 개체들이 몇 분 뒤 자리에서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지혜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장군님! 대체 어디 계세요! 성좌들은 왜 안 와!” 하지만 그녀의 부름에 그 어떤 성좌도 응답하지 않았다. 우리엘도, 해상전신도, 999회차의 이현성도. 그들은 온전히 그들의 힘으로 싸워야 했다. 츠츠츠츠츳! 허공에서 스파크가 튄 것은 그때였다. [바아아앗!] 동그란 포탈과 함께 비유가 나타났다. “비유!” 축구공만했던 비유의 몸통은, 어느새 품을 벌려 안아도 모두 감쌀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모든 도깨비는 설화를 먹고 자라난다.」 바아아앗, 하고 몸을 한껏 웅크린 비유의 전신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이내 그 스파크는 선실의 한쪽 벽면을 열어젖혔다. 두두두두두두! 열어젖힌 벽면에서 튀어나온 자동 포탑의 탄환들. “모두 괜찮나!” 공필두의 ‘움직이는 성’이 그곳에 있었다. 성흔의 진화를 거듭해, 오롯한 전투 성채의 규모를 갖춘 공필두의 [무장요새]. 그 요새의 꼭대기엔 유상아와 이설화, 그리고 두 아이들도 있었다. “언니! 아저씨! 이쪽으로 올라오세요!” 정희원과 이현성이 이설화의 손을 잡고 요새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요새의 벽면을 타고 무섭게 따라붙는 아귀 떼들을 향해 이지혜의 장도가 번뜩였다. 「어떤 별빛도 그들을 비추지 않는 세계에서, 오직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 서로를 구해냈다.」 “시작하죠.” [연화대]의 권능으로 유상아가 적들의 움직임을 제어하자, 이지혜와 공필두가 발포를 계속했다. 요새의 최첨단에 앉은 [키메라 드래곤]이 공중으로 접근하는 성좌들을 향해 브레스를 쏟아냈다. 그 아수라장을 뚫고 기어코 올라오는 적들에게 정희원의 검격이 쏟아졌다. 이현성의 [강철화]가 일행들의 피부를 보호했고, 일행들을 대신해 다친 이현성을 이설화가 치료했다. 「그 모든 조합은 아주 오래전부터 한 사람이 구상한 것이었다.」 그 속에는,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던 한 소년도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합니다!] [성좌, ‘무저갱의 지배자’가 자신의 권속들을 불러들입니다!] 츠츠츠츠츠츠······! 새카만 황충들이 몰려와 지옥의 하늘을 덮었다. 황충들은 죽음에서 회복하던 악마들의 화신체에 달라붙어 그들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악!] 피부가 재생될 때마다 뜯어먹히기를 반복하며, 영원의 고통에 빠진 악마들이 절규했다. 조금씩 줄어가는 아귀들의 세력을 보며 정희원의 눈빛에도 희망이 감돌았다. 일방적으로 불리했던 전세가 조금씩 뒤바뀌고 있었다. 이 ‘팔열지옥’을 부수는 것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시간을 끄는 것은 가능했다. 문제는, 아직까지 전장에 개입하지 않고 있는 성좌들이었다. 츠츠츠츠츠······! 그때, 지옥도의 하늘을 차지하던 별들이 한꺼번에 어딘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열지옥’의 내벽을 두드려 부순 성좌들이 모두 어딘가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성좌들의 빛이 사라지자 세계관 전체의 균형도 무너졌다. 아귀들은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하고 지옥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일행들은 그제야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걸까요?” 이설화가 물음을 던졌으나,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확실한 것은, 저 별들이 이곳에 흥미를 잃을 만큼 어디선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행들의 시선이 공필두에게 꽂혔다. 이내 끙, 하고 소리를 낸 공필두가 [무장요새]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알겠으니까, 재촉하지 말라고.” <김독자 컴퍼니> 또한 그 별들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후의 방주’ 곳곳에서 몰려온 성좌들이 블랙홀에 빨려들 듯 하나의 선실을 향해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별들이 움직이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정희원도, 이현성도, 유상아도······ 하늘의 모든 별들이 쏟아지는 듯한 그 압도적인 정경 속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광경은 아름다웠고, 전율적이었다. 「그리고 슬펐다.」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그 모든 별들이 하나의 별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서진 내벽의 균열 사이로, 방의 정경이 드러나고 있었다. 하늘을 부순 [신단목]. 그 나무를 중심에 두고 싸우는 김독자의 별들이 있었다. [막아라! 여기가 우리의 황산벌이다!] 한반도의 성좌들이었다. 팔을 잃은 김유신이 외치자, 계백이 성좌들을 향해 거환도를 휘둘렀다. 대머리 의병장이 자신의 곤봉으로 적들을 격멸했고, 서애일필이 허공에 써 갈긴 붓으로 성좌들의 격을 강화했다. 거대한 호랑이로 변신한 조선제일술사가 미트라의 거북이와 맞섰고, 자신의 화랑을 모두 불러들인 매금지존이 <황제>의 세력을 막아내고 있었다. 개중에는 처음 보는 성좌도 있었다. 나무의 중심에서 눈을 감고 있는 별. 그를 중심으로 [신단목]의 설화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성좌, ‘선인왕검(仙人王儉)’이 창세신들의 개연성을 모으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한반도의 ‘창세신’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창세신의 가호가 김독자와 한반도의 성좌들을 감싸며 수호했다. “······장군님?” 거북선을 타고 싸우는 성좌들도 보였다. 「무대화」로 넘실대는 바다의 정경. 그곳에 이지혜의 배후성이 있었다. [노량(露梁)의 그날이 생각나는군.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이오, 준경.] [나 또한 그러하다.] 으르렁거린 척준경의 검이 토르의 해머와 충돌했다. 하지만 그 둘만으로 막아서기에, <아스가르드>의 군세는 지나치게 많았다. [성좌, ‘무스펠하임의 불꽃’이 자신의 거검을 소환합니다!] 이윽고 정희원과 같은 지옥에서 찾아온 성좌들까지 가세했다. 아무리 척준경과 이순신이 뛰어난 성좌들이라도, 저들 모두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신단목]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가지의 끝에 뭔가가 맺히기 시작했다. 열매처럼 낙하하는 빛살 속에, 일행들도 잘 아는 누군가가 있었다. “대사부들!” 백청의 강기와 파천의 검격이 전장을 물들였다. 그들과 함께 장하영과 「무림」의 초월좌들이 전장을 누볐다. 마주 달려드는 일본 측의 요괴 성좌들이 보였다. 깃털 부채를 쥔 ‘텐구’들과, 물속에서 떠오른 ‘갓파’, ‘야마타노 오로치’의 권속들도 있었다. [고작 일개 화신에 불과한 놈들이······!] [신단목]에서 열매들이 끊임없이 떨어졌다. 전장을 물들이는 백청의 전격 사이로, 6번 시나리오에서 만났던 존재들이 나타났다. “김 도게자를 위하여!” [피스 랜드]의 소인들이었다. 재앙과 맞서 싸웠던 이들이, 이제 그들을 돕기 위해 이 전장에 강림하고 있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필살 병기 ‘드래곤 니들’을 꺼내 듭니다.] 성좌들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소인들이 죽어 나갔다. “아아, 아아아······!” 선실의 끔찍한 정경에,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전장의 중심, 별들의 시체들로 이루어진 산의 중턱에 가장 빛나는 별 또한 말이 없었다. 「부서진 ‘절대 왕좌’의 꼭대기에서 김독자가 침묵하고 있었다.」 유중혁과, 한수영과, 안나 크로프트가 그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피를 토하고, 설화를 그러 모으며, 자신이 가진 모든 기지를 총동원해서 성좌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세계관의 충돌 속에 창공이 격변하고 있었다.」 <아스가르드>의 오딘, <파피루스>의 오시리스, <베다>의 시바, <황제>의 여와······ 그 외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성운들의 성좌들까지 가세해, 창공은 범람한 빛으로 밝게 물들었다. 「빛을 가리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또 다른 빛이다.」 숨 막히도록 밝은 그 세계에서, 일행들은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성좌들의 별빛이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쌓아온 역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정희원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일행들 모두가 덤벼들어도, 저들을 막아낼 수는 없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더 강한 설화가 필요했다. 저 눈부신 별들을 모두 격추시킬 수 있는 설화. 저 모든 별자리를 파멸 시킬 수 있는 힘. 그러나 정희원에게는 그런 힘이 없었다. [신살]로도, [지옥염화]로도 무리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화신을 보고 있습니다.] 정희원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자신의 배후성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배후성을 무척 좋아했다. 그렇기에, 함부로 부탁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김독자를······.” 그럼에도 정희원은 말했다. “······구해줘요, 우리엘.” 그러자, 그녀의 배후성이 응답했다. [그래.] 뜨거운 불꽃이 주변의 바닥을 덮었다. 바로 등 뒤에 우리엘이 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특유의 고귀한 눈으로 자신이 보는 세계를 함께 보고 있을 것이다. 순간, 정희원은 덜컥 겁이 났다. 「만약, 이곳에서 우리엘이 죽는다면.」 우리엘은 ‘설화급 성좌’다. 아무리 그녀가 강하다고 해도, 신화급 성좌들과 대적해 이길 수는 없다. 그러자 어깨에 고운 손이 닿았다. [걱정마, 희원아.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앞으로 나서는 우리엘의 등은 자신의 것보다 작았다. 정희원은 그 등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장 오래된 선’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등으로 펼쳐진 백색의 날개가 세상을 덮으며, 우리엘의 진언이 울려 퍼졌다. [에덴이여.] 정희원은 자신의 내부에서 뭔가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조각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성마대전’ 이후로, 그녀의 안에 줄곧 잠들어 있었던 무거운 파편. [‘선악을 가르는 벽’이 본연의 힘을 되찾습니다!] 츠츠츠츠츳! 다음 순간, 주변에 하나둘 천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십, 백, 이내는 천을 훌쩍 넘긴 하급 천사와 중급 천사들. 개중에는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도 있었다. 대천사 가브리엘. 심지어는 ‘성마대전’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대천사들의 영령도 보였다. [우리엘.]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라파엘. 항상 졸린 눈으로 세계를 보던 그 천사가, 다른 모든 천사들과 함께 천천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에덴>을 계승할 텐가?] 우리엘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화신을 돌아보았다. 고고한 대천사의 표정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정희원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닿지 못했다. 우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라파엘이 선언했다. [우리엘, 그대가 이제 우리의 대선(大善)이다.] 츠츠츠츠츠츠츠······! 아득한 코로나가 우리엘의 전신을 덮었다. 찬연한 백금빛 플레이트 아머. 무수한 마왕의 머리를 베어내고 악마들의 공포로 군림했던 그 날처럼, 우리엘의 모든 격이 현현하고 있었다. <에덴> 최강의 별.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검을 쥐는 순간, 모든 천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사들이여, 최후의 ‘성마대전’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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