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5화
헛웃음이 나왔다. 거짓말이겠지 싶어 눈을 씻고 다시 봐도 틀림없었다.
파일의 확장자는 TXT. 그러니까 이 사람 지금…… 선물이랍시고 나한테 자기 소설 파일을 보낸 거야?
[전용 특성을 획득합니다.]
[전용 스킬 슬롯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파일을 실행하자 귓가에 들려오는 메시지. 세계가 ‘멸살법’의 그것으로 바뀌었다면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멸살법의 생존자들은 모두 전용 특성을 얻고, 전용 스킬을 쓸 수 있는 몸이 되니까.
나는 속으로 조용히 ‘특성창’을 되뇌어 보았다. 일단 특성을 얻었다면, 그게 뭔지 알 필요가 있었다.
[특성창을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뭐야? 다시 한번 ‘특성창’을 외쳐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황당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특성창을 사용할 수 없다면 내가 가진 특성이나 스킬이 뭔지 알 수가 없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데, 이건 뭐 적을 알기 전에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잠시 허공을 노려보던 나는 일단 체념하고 작가가 보내준 파일부터 읽기로 했다.
[전용 특성의 효과로 읽기 속도가 상승합니다.]
특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특성의 효과 덕분인지 ‘멸살법’의 초반부를 읽는 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찾았다.
내 손가락이 멈춘 곳은 작품 초반부, 주인공이 자신이 탄 열차 칸에서 어떤 ‘행동’을 하려는 장면이었다.
「그는 3707칸의 뒷문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았다. 단단히 쥔 라이터의 줄날 바퀴가 차가웠다. 이번 생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공포에 떠는 사람들의 표정.
죄책감은 없었다. 모든 것은 한순간일 테니까.
그는 냉혹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잠시 후, 그의 손끝에서 치익― 하고 불이 솟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일순 등줄기가 스산해졌고,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그 대목을 다시 읽어야 했다. 위화감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3707이었어.”
나는 반사적으로 내가 탄 열차 칸의 번호를 확인했다.
[3807].
내가 지금 타고 있는 칸은, 프롤로그의 주인공이 타고 있던 칸의 바로 ‘뒤 칸’이었다. 희미하게 손끝이 떨려왔다.
……잠깐만. 그러면 이 ‘칸’의 사람들은 원래 어떻게 될 운명이었지?
「그는 흐릿한 창문 너머로 아비규환이 된 3807칸을 바라보았다. 저쪽은 이미 늦었나.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저 칸에서 살아남는 것은 둘 뿐이니까.」
살아남는 것은 단둘뿐. 둘을 제외하고, 이 칸의 모두는 죽는다. 그리고 나는 그 ‘두 명’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유상아를 보았다.
아마 이 사람은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독자 씨, 저기―”
나는 유상아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입구 쪽에 기대어 있던 남고생이 노약자석 앞에 서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새하얗게 염색한 머리. 교복에 붙은 명찰에 그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김남운. 역시나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저 칸에서 살아남는 건 이현성과 김남운 뿐이겠지. 상관없다. 어차피 내게 필요한 것도 그 둘 뿐이니까.」
노약자석 앞에 선 김남운이, 마치 노계를 골라내는 도축업자 같은 눈으로 노인들을 훑고 있었다.
“누가 지원할래?”
선명하게 와 닿는 목소리의 온도. 그 서늘함에 한 노인이 주눅이 들어 대답했다.
“무, 무슨 소릴…….”
“무슨 소린지 잘 알잖아? 슬슬 모두를 위한 합리적인 결정을 해야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집중되고 있었다. 마치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짐작한 얼굴들. 뜻밖에도, 얼굴을 구긴 한명오 부장이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다.
“이 어린 노무시키가 지금 뭔―”
달려드는 한명오를 향해, 김남운의 차가운 시선이 꽂혔다.
“네가 죽을래?”
“뭣……!”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아직 상황 파악 안 되나봐?”
천장에서는 도깨비가 켜 놓은 홀로그램 화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살려, 살려줘요!]
[으아아아악!]
[죽어! 죽으라고!]
이곳 열차 칸이나 태풍여고 뿐만이 아니었다. 세계 각지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실시간 영상. 그 영상을 보며 부대로 반복해서 전화를 거는 이현성이 보였다. 허무하게 울려 퍼지는 발신음 소리. 김남운이 비웃듯 말했다.
“모르겠어? 군대는 우릴 구하러 오지 않아. 우린 죽을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단호한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의 몸이 움찔했다.
“뭘 망설여? 아까 그 녀석이 말했잖아. 우린 모두 ‘공짜로 살아왔다’고. 그렇다면 여기서 제일 오랫동안 공짜로 살아온 사람이 누굴까?”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노약자석으로 향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노인들. 아마도, 지금 김남운의 말은 모두의 은밀한 욕망을 대변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면, 당연히 제일 오래 산 사람들이 희생하는 게 맞는 거잖아. 아니면 저기 있는 어린애한테 죽으라고 할 거야?”
엄마로 보이는 여인의 옷깃을 잡고 있던 아이가 뒤쪽으로 숨었다. 그런 아이를 보며 피식 웃은 김남운이 다시 한명오를 향해 말했다.
“물론 아저씨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살기 위해 동족을 죽이는 거. 그건 개새끼들이나 하는 짓이지. 그런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럴까?”
“…….”
“모두 잘 생각해. 지금까지 당신들이 알던 세계는 방금 끝났으니까.”
한명오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어쩌면 한명오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빛을 타고, 조금씩 균열이 번져가고 있었다. 막연한 도덕의 세계가 붕괴하는 광경. 균열에 쐐기를 박아 넣은 것은, 역시나 김남운이었다.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법칙이 필요한 법이야.”
김남운. ‘멸살법’의 세계에 가장 빠르게 적응을 마친 청년.
돌아선 김남운이 다시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누가 할래? 5분 안에 지원자 안 나오면 다 죽는다고.”
벌벌 떠는 노인들이 김남운을 보며 경기를 일으켰다.
“뭐,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찍는 수밖에. 자…….”
러시안룰렛처럼 김남운의 손가락이 노인들을 가리키며 움직였다.
이번에는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한명오도, 다른 사람들도…… 심지어는 이현성까지.
꽉 쥔 군인의 주먹이 허공에서 갈 곳을 잃은 채 떨리고 있었다.
아마 그 역시, 방금 뭔가를 선택한 것일 터다.
너무나 원색적인 사람들의 표정은, 싸구려 통속 소설의 문장들처럼 읽기 쉬웠다.
「5분 안에 살해 행위가 벌어지지 않는다면, 이 칸의 모두가 죽는다.」
사람들의 눈빛이 변하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죽지 않는다면, 5분 뒤 죽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눈빛들.
마침내, 김남운의 손가락이 멈췄다.
“아무래도 죽을 사람이 정해진 것 같네.”
김남운이 부들부들 떠는 노인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버둥거리는 노인을 보며, 김남운이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뭐해?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다 뒈지고 싶어?”
어떤 사람들은 김남운의 시선을 피했지만, 시선에 반응한 이들도 있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이는 백팩을 매고 있던 회사원이었다.
“……저 청년 말이 맞아. 이대로면 다들 죽어.”
회사원이 노인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홀린 듯 중얼거렸다.
“맞아. 누군가는…… 어쩔 수 없잖아. 그래야 우리가 살아.”
“아, 모르겠다!”
둘, 그리고 셋.
눈치만 보며 서 있던 사람들이 노약자석을 향해 움직였다. 비겁하게 주변을 서성거리던 남자들도. 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던 대학생도. 아이를 내팽개친 엄마와, 뒤늦게 합류한 한명오 부장까지.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 저 노인이 죽지 않으면, 죽는 것은 자신이 된다. 노인에게 다가간 사람들이 하나둘 소극적인 린치를 가하기 시작했다.
“소, 솔직히 살 만큼 산 사람들이 양보하는 게 맞잖아!”
“그냥 죽어! 빨리 죽으라고!”
언젠가, 소설 속에서 그런 구절을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사형 집행자들은, 동시에 처형대의 레버를 당긴다. 누가 사형수를 죽였는지를 숨기기 위해서.」
그리고 나는 그 구절을 다시 읽듯,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이벤트다. 저 이름 모를 노인은, 애초에 살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원래의 시나리오에서도 저 노인은 죽었을 테니까.
유상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들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독자 씨.”
내 손에 붙들린 팔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떨림을 숨기려는 듯 꼭 쥔 유상아의 주먹이 떨렸다. 내가 말했다.
“지금 가면 유상아 씨가 타깃이 됩니다.”
“알아요, 알지만……!”
두려움으로 떨리는 유상아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대로 둘 수는 없어요.”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이야기의 장르가 바뀌어도, 여전히 환하게 빛나는 사람도 있다.
“유상아 씨. 앉으세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유상아가 아니다. 유상아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번 한 번만 내 말대로 해줘요. 그 뒤론 참견 안 할 테니까.”
억지로 유상아를 자리에 앉힌 후, 크게 숨을 들이쉬며 등을 돌렸다. 곧게 허리를 펴자 날숨이 가늘게 떨렸다. 천천히 발목을 풀고, 손목을 돌린다.
사실 나서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본래 내 계획은 이게 아니었으니까.
“……독자 씨?”
나는 그녀의 부름에 답하지 않고 사람들을 보았다. 치켜든 김남운의 주먹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사형수의 죽음을 위해 협력하는 교도관들처럼, 사람들이 노인을 포위하듯 둘러섰다.
내가 줄곧 가만히 있었던 것은 김남운이나 사람들이 무서워서도, 그들의 비인간성에 전적으로 동의해서도 아니었다. 나는 단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움직여야 할 순간을. 그러니까.
콰아아앙―!
바로 지금.
“와아악! 뭐야!”
폭발음에 귓가가 먹먹해지며 열차의 선체가 기우뚱 흔들렸다. 사람들의 비명. 바로 앞 칸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이쪽 객실로 넘어오고 있었다.
시작됐다. 녀석이 움직였구나.
나는 오른발로 있는 힘껏 바닥을 박찼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사람들을 지나쳐, 노인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뭐야? 어어억!”
정면에서 부딪친 김남운이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얼핏 보면 내가 노인을 구한 듯한 상황이었지만, 내가 노린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디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살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살해하는 세계. 그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아까 곤충 채집통을 들고 있던 그 아이였다.
“잠깐 실례 좀 할게.”
나는 아이가 품속에 숨긴 채집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이가 반사적으로 한 걸음을 물러났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부탁한다.”
결국 양보한 아이가 걸음을 멈췄다. 채집통 속으로 손을 집어넣자 메뚜기의 기분 나쁜 키틴질이 손끝에 닿았다. 나는 한 마리를 꺼내어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다들 멈추세요. 그 사람을 죽여 봤자 당신들은 살 수 없으니까.”
폭발 후의 일시적인 정적 탓에, 내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들렸다. 하나둘 사람들이 내 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저 노인을 죽였다고 칩시다. 그다음은 어쩔 겁니까?”
흠칫, 놀라는 표정들이 보기 좋았다. 어디 조금 더 말해볼까.
“노인이 죽으면 도깨비가 말한 ‘최초의 살해 행위’가 인정되니까 잠깐 시간은 벌 수 있겠죠. 하지만 그다음은요?”
“어…….”
“도깨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국 여러분들은 각자 한 사람의 몫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다음엔 누굴 죽일 겁니까?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
그제야 뭔가를 떠올린 사람들이 서로를 보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공포에 질린 눈빛들. 사실 모두가 알고 있다. 저 노인은 그저 시작일 뿐이라는 걸. 흔들리는 분위기를 붙잡은 것은 김남운이었다.
“다들 뭐가 걱정이야? 다음엔 저놈을 죽이면 되지! 겁쟁이들. 미리 자기 차례부터 걱정하지 말라고! 확률은 반반이니까!”
저 김남운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런 도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살인자가 되지 않더라도 당신들이 살아날 방법은 있어요.”
“뭐?”
“그, 그게 뭡니까?”
크게 술렁이는 사람들. 김남운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잊었습니까?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은 ‘사람을 죽여라’가 아니었을 텐데요.”
―하나 이상의 생명체를 죽이시오.
시나리오의 내용에는, 처음부터 ‘사람’이라는 말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하나 이상의 생명체 살해. 그 말은 곧,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이야기. 눈치 빠른 누군가가 내 손에 쥐어진 채집통을 향해 외쳤다.
“곤충! 곤충이다!”
채집통 안에서 펄쩍펄쩍 뛰는 메뚜기와 귀뚜라미들. 사람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곤충이죠.”
나는 채집통에 손을 집어넣어 메뚜기 한 마리를 꺼냈다. 미리 보아 둔 배가 통통한 녀석이었다.
“그, 그걸 내놔! 빨리!”
“한 마리만! 한 마리만 있으면 돼!”
손을 뻗으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며, 천천히 한 발짝씩 물러섰다. 노인을 죽이려던 폭발적인 광기들이 이제 나를 향하고 있었다.
설핏 웃음이 나온다.
왜일까. 이 아슬아슬한 긴장감 속에서도, 내 심장은 왜 이렇게 즐겁다는 듯 뛰고 있는 것일까.
“드릴까요?”
나는 맹수 무리를 도발하는 조련사처럼 채집통을 흔들어 보였다. 성질이 급한 몇몇이 몸을 일으켜 나를 향해 달려들려는 그 순간,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메뚜기를 박살냈다.
[‘최초의 살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100코인을 획득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이 짜부라지는 명확한 감각이, 내 손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럼 가지세요!”
그리고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쥐고 있던 채집통을 힘껏 던졌다. 정확히는 김남운과 사람들이 몰려 있던 통로의 정 반대쪽을 향해서.
“저런 미친!”
허공에서 풀려난 곤충들이 자유를 향해 있는 힘껏 도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