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화
494화
마침내 외신왕이 되었을 때,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당신은 ‘이야기의 적’이 되었습니다.]
전신의 설화가 산산이 조각나는 듯한 감각.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 시나리오에서 추방되어 ‘이야기의 지평선’으로 떨어졌을 때도 그랬으니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형의 존재가 되었어도 시나리오 바깥으로 추방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당신은 최종 시나리오의 보스 몬스터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영원히 혼자가 될 것입니다.]
[이 세계관의 누구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순간 느꼈던 고독감을 기억한다. 이 우주에서 오직 나만이 외따로 떨어진 기분. 영원히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느낌.
하지만 그 느낌 역시, 처음 마주한 감정은 아니었다.
「“······일보 기자입니다. 잠깐 시간 있으신가요?”」
「“쟤가 걔야. 살인자 아들.”」
그러니, 이 역할은 내가 맡아야 했다.
이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나였으니까.
그것이 ‘멸살법’이란 이야기의 결말을 읽은 대가니까.
「【네 일행들은 네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내 계획을 안다는 듯, ‘은밀한 모략가’는 그렇게 말했다.
녀석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는 이해했다.
「“그건 해봐야 알지.”」
그도 나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쌓아온 설화가 다를 뿐이다.
콰콰콰콰콰콰!
눈앞에 펼쳐지는 설화의 해일. 해일 위로 번지는 눈부신 개연성의 스파크들. 그 위로 성좌들의 시선이 흐르고 있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의 설화를 지켜봅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의 설화를 지켜봅니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당신의 설화를 지켜봅니다.]
······.
혼자서 실현할 수 있는 도박이 아니었다. 내가 외신왕이 되는 것은, 그저 최종장의 시작이었다.
유중혁이 싸워주었고, 일행들이 버텨주었고, 한수영이 성좌들을 끌었다.
그리고 우리를 믿는 성좌들이, 선택해주었다.
「그리고 계획은 성공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살아있는 불꽃’.
서쪽 세계의 재앙 ‘가라앉은 섬의 주인’.
북쪽 우주의 지배자 ‘위대한 심연의 군주’.
남쪽 성간을 다스리는 ‘은빛 심장의 왕’.
그리고 무엇도 아닌 곳에서 기어오는 ‘위대한 모략’.
다섯 명의 ‘왕’이 모이자, 시나리오의 부피가 급격히 팽창하고 있었다. 그들의 격을 감당하지 못한 위인급 성좌들이 무릎을 꿇은 채 설화를 토하고 있었다.
지금껏 시나리오에서 배제된 재앙의 왕들. 충만한 개연성에 의해 ‘심연을 좇는 사냥개’에게서 벗어난 그들이, 시나리오에 직접 강림했다.
‘은밀한 모략가’가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들의 무대가 열릴 차례였다.」
[으, 으어어어어―!]
공포에 질린 몇몇 성좌들이 체통조차 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 성좌의 뒷덜미를 붙잡은 ‘위대한 심연의 군주’― 999회차의 김남운이 웃고 있었다.
【벌써 가면 곤란하지. 지금부터 시작인데.】
이번 개연성 범람으로 인해 어느덧 기운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흘끗 나를 본 녀석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너, 착각 마. 널 도와주러 모인 건 아니니까.】
그러자 내 곁에 선 ‘은빛 심장의 왕’이 말했다.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알고 있어요.”
역시 이현성은 몇 회차를 살아도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 999회차의 이지혜도 움직였다.
양쪽에서 달려든 설화급 성좌들이 어떻게든 그들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썼으나 무리였다.
[서, 섬이 움직인다―!]
녹빛 이끼로 덮인 섬의 선두에서 은빛의 포신이 번뜩였다.
세계선에서 가장 커다란 전함. 완전형의 [터틀 드래곤]이 세계를 향해 불을 뿜었다.
콰아아아아아아!
전장의 한쪽이 통째로 쓸려나가는 압도적인 정경 속에서 나도, 한수영도, 심지어는 유중혁조차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선의 최전방에서, 두 ‘왕’이 신화급 성좌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함께 싸웠던 두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지옥염화]의 코로나를 전신에 두른 999회차의 우리엘. 그리고 1863번의 지옥도를 헤치며 살아남아 ‘이계의 신격’이 된 유중혁이었다.
「순간, 김독자는 오래된 전장을 떠올렸다.」
유중혁의 999회차.
성좌들의 대전장에서 유중혁과 우리엘은 등을 맞대고 싸웠다. 두 눈을 잃은 채 포효하던 유중혁과, 그런 유중혁을 지켰던 우리엘. ‘멸살법’ 전체를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 그 장면이, 지금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설화, ‘영웅과 불꽃의 전장’이 오랜 잠에서 깨어납니다!]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던 설화가 두 왕의 사이를 잇고 있었다.
【······<올림포스>를 맡기겠다.】
999회차의 우리엘이 먼저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녀의 격이 개방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성좌들이 달려들었다.
<파피루스>와 <베다>의 최상급 성좌들. 우리와 ‘마왕 선발전’에서 겨뤘던 성좌들도 보였다. ‘최후의 파라오’와 ‘우레를 먹는 새’.
[설화, ‘절멸의 불꽃’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999회차 우리엘의 검이 움직인 순간, 달려들던 위인급 성좌들의 첫 대대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창백하게 질린 화신들이 등을 돌렸고, 설화급 성좌들이 악을 쓰며 외쳤다.
[저 검을 막아! 절대 휘두르지 못하게 해!]
우리엘의 검이 불태운 길을 따라, ‘은밀한 모략가’가 움직였다. 그의 발치마다 우주의 역사가 흐르는 것 같았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그 걸음을, 누구도 감히 막아설 수 없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모든 세계선에서 가장 지독한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내의 발걸음이 떨어진 곳마다 멸망한 세계가 울었다. 그림자처럼 들러붙은 세계의 원죄가 사내를 집요하게 좇고 있었다.
「그 어떤 성좌도 그를 막아설 수 없고, 그 어떤 설화도 그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적이든 아군이든, 성좌라면 누구라도 그의 이야기에 홀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득한 경이로 얼룩진 슬픔에서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때, 사내는 어느새 포세이돈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포세이돈이 황급히 ‘은밀한 모략가’의 손아귀를 뿌리치며 격을 방출했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대노합니다!]
<올림포스>의 거대 설화가 준동하고 있었다. 포세이돈의 [트라이아나]가 강력한 설화를 두른 채 포악한 이빨을 드러냈다. 누구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신화급 성좌의 위용이었다.
하지만 같은 신화급 성좌인 나는, 포세이돈의 그런 행동이 다르게 보였다.
「포세이돈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헛되이 허공을 베는 포세이돈의 창은 전처럼 날카롭지 않았다.
오만한 신화급 성좌답지 않은 실수에 곁에 있던 제우스가 경호성을 발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스가가각!
뭔가가 포세이돈의 몸통을 베었고, 푸른색 비늘로 덮여 있던 그의 가슴에 길고 새카만 상흔이 남았다. 상흔 사이로, 거대 설화들이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커허어어억······!]
포세이돈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트라이아나]를 휘둘렀다.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 그의 [트라이아나]가 선을 긋는 어디든 그곳은 바다가 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던 그의 창극이, 처음으로 겨눌 곳을 찾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바다가 범접할 수 없는 곳.」
포세이돈의 두 눈이 새카만 심연으로 물들었다.
아마 지금 그는, 이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설화를 보고 있을 것이다.
중력의 영향이 닿지 않기에, 땅도 바다도 하늘도 무의미한 우주. 모든 것이 멸망했기에 어떤 소중한 것도 남아 있지 않은 폐허.
그 폐허의 주인이, <올림포스>의 별자리를 올려다보았다.
【어느 세계선에서도 너희는 변치 않는구나.】
슬퍼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안심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진천패도]의 칼날이 밤하늘에 닿았다.
[닥쳐라―!]
간신히 공포를 이겨낸 포세이돈이 재차 [트라이아나]를 휘둘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진천패도]가 움직였다.
언젠가 유중혁이 저와 비슷한 기술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초월좌가 별을 베기 위해 고안한 기술.
그런데 뭔가가 달랐다. 저것은 마치―
「한 인간이 세계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검술 같았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초월오의(超越奧義).
은하참(銀河斬)
이제야 실감이 났다. 「서유기」의 격전에서, ‘은밀한 모략가’가 보여주었던 힘은 그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검격보다도 아름다운 궤적.
그의 일 검에 세계가 갈라지고 있었다.
콰드드드드!
하나의 성운을 통째로 쪼개버리는 일검에, 별가루들이 흩날렸다. 그리고 그 마법 같은 빛살 끝에, 포세이돈이 있었다. 푸가각, 소리와 함께 포세이돈의 팔과 다리가 동시에 잘려나갔다.
[포세이돈!]
경악한 제우스가 외쳤다.
‘은밀한 모략가’의 전신에서 폭발하는 설화들이 전장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가 시나리오를 살아오며 느껴온 공허가 팽창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츠츳!
설화를 울컥 토한 포세이돈이 무릎을 꿇자, <올림포스>의 12 신좌들이 달려들었다. 아레스와 헤파이스토스가 포효하며 검과 망치를 휘둘러왔다. 그러나 그들 역시 [진천패도]의 검격 앞에 어린아이처럼 튕겨 나갔다.
제우스가 악을 쓰듯이 외쳤다.
[위대한 모략이여! 건방 떨지 마라! 아직 너는 <올림포스>가 이룬 신화의 파편조차 보지 못했다!]
그 말과 함께, 제우스는 어느새 신형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뻔했다. 그가 향하는 곳엔 방주가 있었다.
[아버지!]
그에게 버려진 <올림포스>의 신좌들이 온몸에서 설화를 내뿜으며 ‘이름 없는 것들’에게 갉아 먹히고 있었다.
원망 어린 표정의 디오니소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나는 그런 신좌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수영과 유중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우스를 막아야 돼.”
제우스가 향한 방주 안에는 <올림포스>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화의 거대 설화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를 내버려 두면, 이 시나리오는 다시 우리에게 불리해지게 된다.
우리는 죽은 별과 신격들의 설화로 뒤덮인 무대를 온 힘을 향해 달려나갔다.
한수영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근데 저 자식은······.”
포세이돈을 벤 ‘은밀한 모략가’가 멍하니 자리에 서서 어딘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눈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은밀한 모략가’가 제우스를 쫓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애초에 그의 목적은 겨우 <올림포스>의 절멸도, 방주의 파괴도 아니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그보다 훨씬 먼 곳에 걸린 무엇.
「최후의 벽」.
이번에야말로 그 너머를 보고야 말겠다는 듯, 그의 눈 안에서 끝없는 페이지들이 넘어가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격변합니다!]
예상치 못한 개연성의 뒤틀림에 대도깨비들이 외치고 있었다.
[잠깐! 이것은······!]
[가장 오래된 꿈이시여······!]
[<스타 스트림>의 격변으로 인해 시나리오 내용이 갱신됩니다!]
[해당 시나리오는 선택한 진영에 따라 클리어 조건이 달라집니다.]
나는 갱신된 시나리오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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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시나리오 # 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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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메인 시나리오의 제목이 사라졌다.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시나리오.
대도깨비들조차 모르는 시나리오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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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방주를 파괴하고 대도깨비들의 계획을 저지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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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하는 대도깨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기꾼’을 포기하고 이 세계의 등장인물이 된 대가를, 이제 그들도 치르게 된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습도 변하고 있었다. 마치 세계가 우리를 허락하는 듯했다.
“당신······!”
경악한 아스카 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그녀의 눈에도 이제 내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튀는 스파크 속에서,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었던 ‘이계의 신격’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시나리오 바깥의 존재가 아니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들의 설화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시나리오가, 정식으로 이 세계에 태어난 것이다.
[‘가장 오래된 꿈’이 당신의 존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 이 메시지를, ‘은밀한 모략가’도 듣고 있겠지.
정확히는 내 눈앞에 떠오른 이 메시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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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 : 최후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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