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화
495화
“······형, 보상 내용이 ‘최후의 벽’이래요.”
의문을 던진 건 뒤쫓아온 이길영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확실하게 아는 건 없었다.
보상이 [최후의 벽]이라······.
저렇게만 써 놓으니 최후의 벽에 도달하는 것이 보상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시나리오가 끝나면 최후의 벽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인지 그 의미가 모호하게 들렸다.
애초에 저 벽이 누군가가 가질 수 있는 개념이기는 한 걸까.
지금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확실한 것은, 이 시나리오를 끝내면 우리는 이 세계의 진실에 도달하리라는 것뿐이었다.
【가십시오.】
999회차의 이현성의 엄호를 받아 일행들이 달려갔다.
뒤를 쫓는 성좌들을 ‘은밀한 모략가’와 다른 이계의 신격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이제 방주가 눈앞이었다. 저 방주만 부수면, 우리는 이 모든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막아라―!]
그리고 다시 한번 밤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졌다. 이렇게나 많은 별들이 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성좌들이었다.
[외신왕이다! 잡아!]
내게 병장기를 겨눈 채 달려드는 성좌들. 거대 성운의 하수인으로 살아오며 제대로 시나리오도 클리어하지 않은 채, ‘마지막 시나리오’의 진출권을 획득한 이들이었다.
놀랍게도 그들 중 일부는 한때 내 채널의 구독좌였거나 여전히 구독중인 이었다. 간간이 후원을 하며 내 행동을 부추겼던 이들. 강렬한 사이다를 원하고, 내게 자극적인 전개를 종용했던 자들.
그들은 이제 나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죽여버려!]
몇몇 일행들도 우리를 적대시하는 그들의 모습에 놀란 모양이었다.
한수영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너네 아직도 하차 안 했냐?”
순간, 떠오른 것은 ‘만다라의 수호자’가 환생자들의 섬에서 했던 말이었다.
「아무리 조악한 이야기라도, 그걸 오래도록 듣고 본 존재는 그 이야기를 사랑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성마대전]이라는 시나리오의 비극을 ‘만다라의 수호자’는 그렇게 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건 [성마대전]의 이야기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피스 랜드]에서 우리가 상대했던 일본 측 출신의 성좌들이 하나둘 눈앞에 현현하고 있었다. ‘여덟 조각의 불꽃’인 카구츠치와 ‘밀물과 썰물의 조정자’인 해룡 류진도 보였다.
그들에게 맞선 것은 우리 일행의 창공을 지키는 존재였다.
[화신, ‘이지혜’가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드넓은 해상이 펼쳐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충만한 격이 주변의 무대를 잠식했다. 상대는 설화급 성좌들이었지만, 지금의 이지혜라면 저들에게 절대로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지혜는 곧장 발포하는 대신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나 역시, 그 애가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가라! 도움이 안 되면 자폭이라도 해!]
화신들의 등을 떠미는 성좌들의 모습.
동공이 퀭하게 풀린 일본 측의 화신들이 우리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칼을 뽑으려는 순간, 근처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모두 정신 차리세요! 지금 당신들이 누굴 상대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라고!”
분명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이즈미도 죽었고, 히로시도 죽었어요.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정신을 차릴 거죠? [피스 랜드]에서 있었던 비극을 모두 잊은 건가요?”
아스카 렌이 그곳에 있었다.
[화신 ‘아스카 렌’은 ‘이야기의 적’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이미 이쪽 진영을 선택한 상태였다.
[화신 ‘아스카 렌’의 특성 ‘만화가’가 활성화됩니다!]
아스카 렌의 검이 펜처럼 움직였다.
특성이 활성화되는 순간, 나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이름 없는 것들’의 설화가 움직였다. 우리의 부서진 설화들. 흩어진 문장들이 하나의 영상으로 직조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작가’ 특성을 가진 것은 한수영만이 아니었다. 한수영과는 다르지만, 아스카 렌 역시 비슷한 특성을 가진 화신이었다.
“제발, 이제 그만 해요. 당신들도 이들이 누군지 알잖아요. 이 사람들처럼 되고 싶었잖아요.”
「그것이 시작이었다.」
자신의 배후성들에게 반쯤 조종당한 채 우리를 공격하던 화신들이 하나 둘 병장기를 떨어트렸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주저앉거나 비참한 울음을 터트렸다.
“못 해······ 더 이상은 못 한다고······.”
무릎을 꿇은 화신들이 자신의 머리를 부여쥔 채 중얼거렸다. 화신들이 명령을 거부하자 순식간에 위험에 노출된 성좌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 일어나라! 어서!]
화신들은 누구보다 같은 화신의 고통을 잘 이해하고 있다.
너무나 오래 시나리오를 수행하는 바람에 흔해 빠진 악역이 된 성좌들과는 다른 것이다.
“지혜야.”
내가 말하기도 전에, 거북선의 함포가 발사되었다.
콰아아아아아!
격발음과 동시에 쓸려나가는 성좌들의 무리.
용케도 포화를 버텨낸 성좌들이 우리 일행과 부딪쳤다.
[으아아아아아아!]
방주의 선두에서 희미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방주에 잠들어 있는 신화급 성좌들이 더 깨어나게 둘 수는 없었다.
다행히 우리의 전진 속도는 느리지 않았다. 유중혁의 [파천검도]와 한수영의 [흑염]이 옆에서 나를 보조하며 착실하게 일행을 앞으로 인도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개연성이었다.
츠츠츠츠······.
성좌들의 코인으로 만들어진 개연성······.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유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채널을 통제하고 있었다.
도깨비가 된지 얼마 안 된 아이였으니, 이만한 코인을 개연성으로 교환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비유의 입에서도 설화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 다 왔어!”
이변이 발생한 것은, 한수영의 목소리가 들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관리국이 BY-9158 채널에 통제권을 행사합니다!]
츠츠츠츠츳!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본래 개별 채널은 도깨비의 소유다.
하지만 [채널]이라는 시스템은 관리국이 가진 ‘거대 설화’에 기반하는 힘이었다.
[관리국이 채널 BY-9158의 코인 후원을 통제합니다!]
갑자기 몸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순풍처럼 뒤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역풍으로 바뀌고 있었다.
멀리서 열 명의 대도깨비가 하늘을 향해 손을 모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빌어먹을 새끼들이······!”
한수영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바아아아아아아앗!]
비유가 감전된 것처럼 고통스러운 울음을 내뱉으며 추락하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달려간 유상아가 떨어지는 비유를 품에 안았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관리국의 비겁한 행동에 항의하며······!]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관리국의 처사에 격노하여······!]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같은 도깨비 새■들을······!]
······.
우리의 채널이 무너지고 있었다.
대도깨비 가랑이 말했다.
[너희들의 설화는 허락할 수 없다. ‘가장 오래된 꿈’에게 그런 설화를 바칠 수는 없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이 시나리오의 일부가 된 그들은, 관리국의 거대 설화를 행사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후폭풍을 겪을 것이었다.
[호롱, 녹수. 그대들의 희생을 기억하겠다.]
두 명의 대도깨비가 허공에서 소멸하고 있었다.
가랑의 몸에서도 설화 파편이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저 빌어먹을 대도깨비들이 얼마나 큰 결심을 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다시 한번 격변합니다!]
주변에 범람하던 ‘이름 없는 것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개연성의 비호를 받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던 이들의 얼굴이 다시 괴물의 그것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사냥개들이 온다.】
‘은밀한 모략가’의 목소리와 함께, 999회차의 왕들이 중앙으로 몰렸다.
큰 개연성을 소진하던 이들일수록 후원 중단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밀려오는 후폭풍 사이로 나타난 ‘심연을 좇는 사냥개’들이 왕의 다리와 팔을 물어뜯었다.
【아파 이 개새끼들아!】
999회차 김남운이 소리를 질렀다.
곁에서 달려드는 성좌들을 베어낸 유중혁이 외쳤다.
“김독자!”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공의 기후가 심상치 않았다. 단순히 신화급 성좌가 기후를 조정하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었다.
뭔가, 내가 지금껏 한 번도 겪지 못한 끔찍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온새, 허체. 지금까지 수고 많았다.]
두 명의 대도깨비들이 추가로 소멸하고 있었다.
「대도깨비들은, 이곳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끝내려는 것이다.」
팔뚝의 모든 솜털이 오소소 섰다.
지금까지 시나리오를 수행하면서 이만한 두려움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가장 오래된 꿈’이시여!]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하늘이 아니라 벽이었다.
이 우주 전체를 감싸고 있는 [최후의 벽].
페이지가 찢어지듯 갈라진 벽의 틈새로, 뭔가가 넘어오고 있었다.
「순간, 김독자는 이 세계의 멸망을 직감했다.」
내가 가진 언어로는 그게 무엇인지 형용할 수 없었다.
저게 대체 뭘까.
마치 어린아이가 연필로 그린 조악한 낙서 같았다. 거대한 검 같기도 하고, 창 같기도 하고, 미사일 같기도 한 저것.
확실한 것은 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이쪽으로 낙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츠츠츠츠츠츠츠!
그 비정형의 덩어리를 내보내는 틈새 사이로, 아주 잠깐이지만 누군가의 손 같은 것이 보인 것 같기도 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확실한 것은 하나뿐. 저걸 맞으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김독자는 자신의 모든 격을 개방했다.」
내가 가진 모든 ‘거대 설화’들이 동시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시야가 하얗게 물들며 눈앞에서 개연성의 대폭발이 발생했다.
*
츠츠츠츠츠츳!
비형은 하나둘 시나리오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대도깨비들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이야기꾼들은 최종 시나리오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비형의 주변에 크고 작은 하급 도깨비들이 몰려들었다.
[비형님! 이게 대체······.]
지금껏 중립을 지켰던 관리국이, 자신의 의지로 시나리오 양상 전체를 뒤바꾸고 있었다.
그 대가로 관리국의 지형도도 변하고 있었다. 설화들을 모아 둔 저장고들이 일시에 붕괴했고, 관리국의 감찰 하에 구속되어 있던 악명 높은 성좌들이 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비형은, 그 아수라장의 중심에서 한 성좌를 보고 있었다.
「추호도 자신이 주인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녀석.」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체근민 합이 10도 되지 않는 몸으로, 도깨비인 자신에게 절대 기죽지 않고 대들던 녀석. 언제나 여유 있는 척 씩 웃기나 하고, 함부로 뒈지기도 십상이던 녀석.
「이야기꾼인 그보다도, 다음 설화를 더 잘 알던 녀석.」
그 녀석의 설화 덕분에 비형은 빠르게 자신의 채널을 키울 수 있었고, 등급 심사에서 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설화가, 이제 종막을 앞두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
대도깨비가 된 비형은 창공을 가르고 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것은 ‘벽’ 너머에서 온 것이었다. 이 세계를 가르고 있는 최초이자 최후의 벽 너머에서 날아든, 아득한 망상의 파편.
비상을 준비하는 방주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남은 대도깨비들은 저 방주를 타고 탈출할 속셈일 것이다.
그리고 이 무대는, 저 파편의 추락으로 인해 끝장날 것이다.
「그 순간, 도깨비 비형은 결심했다.」
한데 모여 의식을 치르던 대도깨비들이 비형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가장 먼저 그를 붙잡은 것은 바람이었다.
[비형! 무슨 생각인가!]
비형은 대답하지 않고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지금껏 지켜 보아왔던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언제나 분신체로 마주했던 화신들. 그들이 이제는 그와 같은 자리에 있다.
비형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만 해도 작았던 그의 손바닥이, 지금은 성인 남성만큼이나 커졌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저 설화를 보아왔습니다.]
그들의 첫 만남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한쪽은 시나리오라는 비극을 파는 장본인이었고, 다른 한쪽은 목숨을 걸고 그 시나리오를 수행해야 하는 쪽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비형은 지금 움직여야 했다.
이 손으로 비극의 무대를 열었기에 해야만 하는 일.
이것은 그가 끝까지 ‘이야기꾼’으로 남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바람, 모든 도깨비에겐 ‘단 하나의 설화’를 선택할 순간이 온다고 하셨지요.]
[기다리게 비형! 이번엔 자네가 틀렸어. 저 설화는 아니야! 저 설화는―]
비형은 바람의 손을 놓으며 웃었다.
죽음을 앞두고도 늘 씩 웃는 녀석이 있었다. 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녀석은 정확히 이런 기분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나는 저 이야기를 사랑하게 된 모양입니다.]
비형은 관리국의 대도깨비들을 향해 자신의 격을 발출했다.
퍼거걱!
대도깨비들을 대표하여 관리국의 간섭력을 행사하던 가랑의 뿔이 부서졌다.
관리국이 컨트롤하던 개연성이 일제히 흩어지며 일대에 파란이 일어났다.
그 후폭풍은 비형에게도 고스란히 돌아왔다. 새카맣게 변한 설화를 토해내며, 비형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비형! 감히······!]
그는 정확히 지상을 향해 떨어지는 망상의 파편을 가로막고 섰다.
지금껏 그가 기록해 온 설화들이 울고 있었다.
이야기꾼을 지켜보는 성좌들이 그의 행동에 개연성을 실어주고 있었다.
후폭풍이 자신의 몸을 찢어발기는 고통 속에서 비형은 생각했다.
아마 그가 읽어온 설화의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모두를 살리고 싶어하니까.
그럼에도,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은 있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이야기는 없다.」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개연성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벽」에 도달할 ‘단 하나의 설화’가 되기 위해. 이것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었다.
「도깨비 비형은 자신의 마침표를 정했다.」
파스슷, 하며 뭔가가 꿰뚫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잠깐이지만 김독자의 얼굴이 보인 것도 같았다.
[당신의 ■■은 ‘희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