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화
493화
Episode 94. 끝의 시작
저렇듯 뻔뻔하게 웃는 낯짝이라니. 독한 말을 쏟아붓고 싶었다. 또다시 이런 짓을 벌이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한수영.”
그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떨구니 김독자의 발목이 보였다. 양산형 제작자가 만들어 준 전투용 정장이 넝마가 되어있었다.
외신왕이 되어 성좌들과 싸운 김독자의 전신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처투성이였다.
“······괜찮아?”
이 와중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김독자를 보며, 한수영은 이 감정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의 답에 만족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의 시선. 들끓는 간접 메시지를 들으면서도 한수영은 아직 등줄기가 서늘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암전되어 있었던 채널이 눈앞에 선연했다.
「만약, 조금만 실수했더라도」
성좌들이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생각했던대로 개연성이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일행들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
방금까지 그녀가 떠안고 있던 것은 수정 가능한 원고가 아니었다.
한 발짝이라도 잘못 딛으면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부담감.
김독자는, 언제나 이런 기분 속에서 시나리오를 수행해 왔던 것이다.
반쯤 비틀거리는 한수영을 김독자가 부축했다. 한수영은 그 손을 쳐내려다가 대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시는 나한테 이런 거 시키지 마.”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었어.”
그 말을 들으며, 한수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넌 독자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잖아.”
「김독자가 원하는 ‘끝’은 무엇일까.」
모든 세계를 적으로 앞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수영이 생각했던 것은 그 질문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그녀는 그 질문의 답에 도달한 것이리라.
“이게 네가 생각하던 끝이야?”
“그 끝의 시작이지.”
그들을 지나쳐 전장을 달려가는 이들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이계의 신격’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갖게 된 존재들.
【모두 밀어붙여!】
【개 같은 성좌 새끼들!】
알 것 같은 얼굴도 있었고, 전혀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김남운을 닮은 이도 있고, 이지혜를 닮은 얼굴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김남운도 이지혜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끝나버린 이야기의 엑스트라였다.
「그 모든 존재들이, 이 세계선의 결말을 바꾸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 버려진 세계선의 모두가 여기에 모였다.
【가! 모두!】
그들의 진군을 보며 한수영 역시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해진 결말에 항거하기 위해 모인 그들 모두가, <김독자 컴퍼니>의 편이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 전원이 ‘이야기의 적’이 되었습니다!]
일행들이 뒤쪽에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들 또한, 마침내 김독자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설화, ‘예상 표절’이 <김독자 컴퍼니> 전원에게 자신의 이해를 공유합니다!]
[설화, ‘별의 구원자’가 <김독자 컴퍼니> 전원에게 자신의 생각을 나눕니다.]
모든 설화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행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계의 신격들이 뒤집어쓰고 있던 끔찍한 마스크가 흘러 내리는 것을, 그들 또한 보고 있을 것이다.
한수영은 그런 일행 하나하나를 살피다가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한 사람.
“이 자식은 어디 간 거야?”
그러고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누구보다 성좌들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는 녀석. 일행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녀석이, 아까부터 전장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김독자가 말했다.
“저기.”
“뭐?”
그 말에, 한수영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콰아아아앙!
전방에서 폭음이 일어나며 짙은 먼지구름이 퍼졌다.
아스가르드 측 성좌들이 이계의 신격들을 짓뭉개고 있었다.
[······징그러운 놈들이.]
성좌들이 전장을 가로지를 때마다 수십 개체의 ‘이름 없는 것들’이 죽었다.
이전이었다면 괴물이 죽어가는 것으로 보였을 광경이, 이제는 구체적인 인간의 죽음으로 보였다.
팔을 잃고, 다리가 잘리고, 내장을 흘리는 ‘이름 없는 것들’.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김독자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이계의 신격’들은 하급 개체들이 대다수. 가끔 상급 개체인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신화급 성좌들의 집중 포화를 받고 이미 쓰러진 상태였다. 지금의 전력만으로는 성좌들의 전력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저토록 압도적인 전력 격차에도, 이들은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계의 신격’들의 최전선에 뭔가가 있었다.
츠츠츠츠츳!
전장을 휩쓰는 검푸른 검격.
검의 궤적이 지나간 자리마다 황금빛 잔상이 남았다.
[크아아아악!]
방금전까지 ‘이계의 신격’을 짓밟던 성좌 하나의 목이 날아갔다.
이어서 둘, 다시 셋. 핏줄기 대신 솟구치는 설화의 세례를 맞으며, 새카만 신형이 연이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거······!”
최전방에서 싸우는 ‘이계의 신격’들 중 아주 강력한 개체가 하나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역시 마지막 시나리오니까 강력한 놈들이 나오는구나’라고만 생각했다.
날카로운 꼬리를 휘두르며 성좌들을 종잇장처럼 베어버리는 ‘이계의 신격’.
그런데 알고 보니 녀석이 휘두른 것은 꼬리가 아니라 새카만 도검이었다.
[특성, ‘철혈의 패왕’이 발동합니다!]
성좌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산의 꼭대기엔 피의 옥좌가 있었다.
옥좌의 주인이, 세상의 모든 별들을 오시하고 있었다.
“이 검술······ 당신, 유중혁이군요.”
안나 크로프트가 이를 갈며 검강을 발출했다.
안나 크로프트, 전술 싸움에서는 결코 패하지 않는다는 미국 최강의 화신.
“대륙 최강은 나다!”
이어서 페이후의 긴 창이 허공을 격하고 날아들었다.
페이후, 일대일 격투의 달인이자 중국 최강의 화신.
“직접 싸우는 것은 처음이군요. 하지만 제가 이깁니다.”
마지막으로 란비르 칸의 수장(手掌)이 움직였다.
칼리의 손이 움직이듯 현란한 그림자를 남긴 그의 손바닥에서 이내 백여 갈래의 파형이 쏟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아―!
다시 한번 전장에 폭음이 터졌다.
그 폭음 너머에서도 설화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생과 사의 동료’의 특수 효과로 일부 설화가 공유 중입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도검이 난무하고 배가 갈라진 성좌들과 이계의 신격들이 드러눕는 정경 속에서, 한수영은 호사가들의 오래된 물음을 떠올렸다.
세계 최강의 화신은 누구인가.
[모두 저놈부터 죽여! 저놈만 죽이면 뚫린다!]
이제 한수영은 확실하게 그 답을 말할 수 있었다.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세계 최강의 화신은, 유중혁이다.」
자존심 따윈 내팽개친 성좌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깨가 갈라지고 허벅지가 터져도, 유중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최전방에서 밀려드는 성좌들의 군세를 막고 있었다.
지난 과거의 일부를 기억해 낸 유중혁이었기에 가능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화신 유중혁은 현재 ‘이야기의 적’입니다.]
“어떻게 저 자식이 먼저······.”
유중혁은 어떻게 한수영이나 다른 일행들보다 먼저 김독자에게 가담할 수 있었을까.
신화급 성좌들의 가세와 함께 유중혁의 전장이 밀려나고 있었다. 유중혁의 모습이 가까워질수록, 녀석의 주변을 둘러싼 혼돈의 탁기도 명확히 보였다. ‘이계의 신격’들에게서 보이는 혼돈의 힘.
「유중혁은 ‘은밀한 모략가’와 하나가 된 적이 있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유중혁이, 누구보다 빠르게 김독자의 편이 될 수 있었던 이유.
한수영이 분통을 터트렸다.
“개자식들이, 나한테는 말도 없이―”
「유중혁도, 김독자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깊은 증오는 때로 깊은 이해와 맞닿는다.
「이 비극은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속여야만 성립할 수 있었다.」
유중혁은 누구보다 성좌들을 증오해왔기에, 김독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망설임 없이 행동했던 것이다.
「그래야, 성좌들에게 이것이 ‘이야기’임을 감출 수 있으니까.」
파츠츠츠츳!
어느새 근처까지 물러선 유중혁이 검을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렵다.”
무심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던 유중혁의 눈이, 한수영과 마주쳤다.
유중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늦었군.”
“닥쳐.”
세 사람이 나란히 섰다.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거센 울음을 터트렸고, 김독자의 검은 날개가 두 사람을 보호하듯 활짝 펼쳐졌다.
한수영은 [흑염]을 충전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은지 모르겠네.”
그들의 뒤로 일행들이 달려왔다.
“독자 씨! 수영 씨!”
“형아―!”
무릎을 꿇은 이현성이 방패로 일행들을 보호했고, 그 옆에서 정희원이 검을 바로 잡았다.
신유승과 이길영을 태운 키메라 드래곤이 포효했다. 유상아의 연화대가 회전하며 일행들의 곁을 감쌌다. 이지혜의 전함이 일행의 창공을 지켰다.
“장전!”
포신이 전함 끄트머리에서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전함 위에 요새를 구축한 공필두가, 맡겨 두라는 듯 지상으로 포대를 겨누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별자리가 환하게 빛을 발합니다!]
스파크 속에서 푸른 태양처럼 빛나는 비유가, 땀을 뻘뻘 흘리며 <김독자 컴퍼니>를 향해 쏟아지는 코인을 받고 있었다.
충만하게 빛나는 개연성이 그들을 가호하고 있었다.
말없이 곁을 지키는 일행들을 향해,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모두 고맙습니다.”
그 한 마디에, 일행 모두의 표정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정희원은 입술을 꽉 깨물었고, 이현성이 그렁그렁한 눈을 닦았다.
한수영도 느끼고 있었다.
「처음부터 김독자는 희생할 생각 따윈 없었다.」
아마 김독자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이 세계의 결말에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그가 혼자서 희생할 때 일행들이 겪을 상처를 알았을 것이고.
모두가 함께 싸우는 대가로 그들이 겪을 파멸을 읽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김독자는 이 시나리오를 택했다.
시나리오를 바꾸는 시나리오. 정해진 결말을 따르지 않는 시나리오. 모두가 함께 종막에 도달할 수 있는 시나리오.
한수영은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도 좋다고 생각했다.
언어에 배인 모든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김독자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의 끝에 다다른 이제야, 김독자는 마음을 연 것이다.
「그렇기에, 한수영은 이게 끝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야긴 나중에 하고.”
장하영이 입을 열었고.
“다들 마음 놓고 싸워요. 내가 아무도 안 죽일 거니까.”
이설화가 말을 맺었다.
“온다!”
성좌들의 진군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숫자가 조금 늘었을 뿐이다! 당황하지 마!]
[일개 소수 성운에 불과하다!]
시나리오의 격변 속에서,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다만 한수영은 주먹을 휘둘렀다. 권장에서 뻗어 나간 [흑염]이 화신들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유중혁의 [파천검도]가 안나 크로프트와 페이후의 검격을 받아냈고, 장하영의 [파천붕권]이 곁에서 밀려오던 성좌들의 무리를 밀어냈다.
[‘심판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정희원의 [지옥염화]가 전방에서 밀려오는 별들을 불태웠다. 허공을 격하고 날아드는 암기를 막아내는 것은 이현성의 강철 방패였다.
“모두 숙여요!”
충전을 끝낸 이지혜의 거북선이 불을 뿜었다. 눈부신 폭발과 함께 전방의 적들이 쓸려나갔다.
“저 함선부터 떨어트려!”
주변에서 기회를 보고 있던 화신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공필두의 포탑이 굉음을 뿜었다.
“크아아아악!”
[한심한 놈들!]
몇몇 성좌들이 추락하는 화신들을 딛고 날아올랐다. 거북선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선 성좌들은, 충전한 마력을 거북선을 향해 쏘았다.
[죽······!]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성좌의 화신체가 절반으로 찢어졌다.
키메라 드래곤이 포효하며 거대한 아가리로 성좌의 몸통을 뜯었다.
“형! 뒤!”
이길영의 황충들이 날아드는 성좌들을 막아섰다.
일행들은 조금씩 전진했다. 그들이 걸어온 세월처럼 아주 조금씩, 별들의 빛이 닿지 않는 길을 걸어 나갔다.
한수영은 생각했다.
아마 다른 모든 별들의 눈에, 그들은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괴물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오히려 그쪽이 더 신나는 일이니까.
“김독자! 방주를 부숴!”
구름처럼 몰려든 성좌들의 너머로 그들이 지키는 방주가 보였다. 지금도, 부서진 방주의 선두에서 성좌들이 밀려 나오고 있었다.
모두 이 세계선을 떠나기 위해 [방주] 속에 잠들어 있던 별들이었다.
[‘이야기의 적’이 방주를 향해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적’은 세상의 모든 설화를 파멸시킬 것입니다!]
저 방주를 부숴야만, 성좌들의 유입을 끊을 수 있었다.
“빨리!”
[개연성의 충돌로 시나리오가 격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마지막 시나리오의 조건을 수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방주의 앞을 막아선 성좌들이 있었다.
[성좌, ‘우주의 순환을 책임지는 자’가 전장에 개입합니다!]
[성좌, ‘연기 나는 거울’이 시나리오에 개입합니다!]
[성좌, ‘천둥과 전쟁의 주인’이 시나리오에 개입합니다!]
지금껏 사태를 관망하던 신화급 성좌들이었다. 그들을 넘어야만 방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개개인의 힘은 충분했지만 총전력이 밀렸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격노합니다!]
전방에서 ‘이름 없는 것들’을 도륙하던 포세이돈과 제우스가 가세하자, 어느새 일행들은 동그랗게 포위된 채였다.
쿠드드드드드!
시체들의 바다를 가르고 회수되는 창을 보며, 유중혁이 짓씹듯 말했다.
“······포세이돈.”
아무리 <김독자 컴퍼니>라고 해도 저들 모두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대도깨비들의 표정에도 아직 여유가 있었다.
분했다. 이토록 충만한 개연성이 있음에도, 왜 저들을 넘을 수 없는가.
한수영은 외쳤다.
“야! 우리 쪽 성좌들은 언제 와!”
오기로 했던 이들이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엘도, 자신의 배후성도, 명계 부부도, 그리고······.
김독자가 물었다.
“꼭 성좌여야 돼?”
“뭐?”
김독자가 씩 웃었다. 한수영이 싫어하는 그 미소였다.
“이제 이 전장엔 성좌들만 올 수 있는 게 아냐. 누구 덕분에 개연성이 생겼거든.”
그 순간, 한수영은 뒷덜미가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김독자 컴퍼니>에게 투입되었던 어마어마한 개연성이 한꺼번에 빠져 나가고 있었다. 이만한 개연성을 한꺼번에 사용해야만 불러올 수 있는 뭔가가 오고 있었다.
「모든 성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
바닥에 끌리는 염화의 불길.
억겁의 설화를 불태운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그 어떤 별도 감히 비견할 수 없는 밝기의 ‘살아 있는 불꽃’.」
비명을 지르며 타오르는 별들의 반대편에서, 새파란 바다가 밀려왔다.
서쪽의 파도. ‘가라앉은 섬’이 떠오르고 있었다.
「서쪽 세계의 재앙, ‘가라앉은 섬의 주인’.」
[크아아아악!]
파도에 휩쓸린 성좌들이 순식간에 설화 더미로 해체되었다.
이어서 북쪽의 하늘이 새카맣게 암전되더니, 그곳에서 성좌들이 소나기처럼 추락했다.
「북쪽 우주의 지배자, ‘위대한 심연의 군주’.」
날뛰는 악동처럼 별들의 머리를 터트리며 ‘이계의 신격의 왕’이 웃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후폭풍을 막아낸 것은 이현성에게 강림한 존재였다.
「남쪽 성간을 다스리는 ‘은빛 심장의 왕.’」
그리고 무엇도 아닌 곳에서 다가오는 존재가 있었다.
그의 걸음걸음마다, 거대한 [진천패도]의 칼날이 밤하늘을 긁으며 천공의 별들을 떨어트렸다.
【오랜만이구나, 포세이돈.】
유중혁과 똑같이 생긴, 얼굴에 긴 상흔이 남은 사내.
태연히 다가가 포세이돈의 목을 틀어쥔 ‘은밀한 모략가’가 웃었다.
【널 죽이는 것은 이번이 스물여섯 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