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화

492화 유료화 선언과 함께 채널에는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캄캄한 암전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한수영의 가쁜 숨소리뿐이었다. “이 비극을 계속 보고 싶으면―” 지금 <김독자 컴퍼니>에게 부족한 것은 ‘개연성’이었다. 개연성. 이야기의 자연스럽고 그럴듯한 흐름. 오직 수많은 성좌들의 시선과, 그들이 후원한 코인으로만 바꿀 수 있는 법칙. “너희도 대가를 지불해.” 이제야 그녀는 김독자의 모든 계획을 이해했다. 이해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일행들을 살리기 위해 그가 살아온 비극 전체를 파는 것. 마치 언젠가 그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김독자는 <김독자 컴퍼니>가 만든 비극을 팔아, 이 시나리오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크게 동요합니다!] 한수영의 선언에 성좌들은 망설이고 있었다. 한수영은 언젠가 처음으로 자신의 소설이 유료화됐던 기억을 떠올렸다. 「작가님, 내일부터입니다.」 그날도, 지금 같은 기분이었다. 앞으로의 미래를 전혀 알 수 없는 기분. 내 글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읽어줄까. 이 이야기를 팔아서, 내가 얼마나 살아갈 수 있을까. ‘빌어먹을 김독자. 나한테 이런 역할을 맡겼다 이거지.’ 지금 그녀가 팔아야 하는 것은, 소설이 아니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다음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다음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다음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다음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피와 눈물로 쓰인 문장들. 그녀가 팔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었다. 함부로 고칠 수도, 농담처럼 이야기할 수도 없는 설화들. 그럼에도 한수영은 그 설화들을 성좌들 앞에 내놓았다. 비유가 허공에서 우려 섞인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수영은 안심하라는 듯 씩 웃었다. “아무도 없어? 아쉽네. 이제부터 엄청 재밌어지려는 참인데.” 이것은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김독자 컴퍼니>에서 악역을 담당해야 하는 한수영만이, 팔 수 있는 이야기. 그녀에게 동조하듯 외신왕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슬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습군. 너희들의 이야기 따위 누가 궁금해한다는 거지?] 침묵을 깬 것은 신화급 성좌 포세이돈이었다. 멀리서 다른 신화급 성좌들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 한수영을 비웃고 있었다. [너희들의 ‘설화’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대도깨비들도 마찬가지였다. 최후를 앞둔 한수영의 선택을 실책이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츠츠츠츠츳! 성좌들이 빠져나가자 채널의 규모는 줄어들었다. 기회를 틈타 난립하는 채널들도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를 적대시하는 도깨비들이 만든 채널들. [끝내라.] 뒤쪽에서 제자리를 지키던 성좌들이 움직였다. 신화급, 또는 그에 거의 준하는 최상격의 설화급 성좌들이었다. [성좌, ‘우주의 순환을 책임지는 자’가 시나리오의 전장을 관망합니다!] [성좌, ‘연기 나는 거울’이 시나리오의 전장에 현현합니다!] [성좌, ‘천둥과 전쟁의 주인’이 시나리오의 전장에 현현합니다!] 인도 신화의 브라흐마. 아즈텍 신화의 테스카틀리포카. 슬라브 신화의 페룬까지. 줄곧 하위 시나리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다른 거대 성운들의 성좌들.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 또한 ‘설화’였다. 거대 설화들의 준동이 시작되자, 전장을 압박하는 흐름이 더욱 거세졌다. 가아아아아― 퍼거걱! 김독자를 향해 다가오는 성좌들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던 ‘이름 없는 것들’이 무차별적으로 터져 나가고 있었다. 신화급 성좌들은 각 성운의 ‘거대 설화’에 큰 지분을 가진 존재들. 그들이 개연성을 움직이자 전황은 순식간에 성좌들의 쪽으로 기울었다. 한수영은 다가오는 별들의 파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희가 보지 않는 곳에서도 우린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화면은 꺼졌지만, 여전히 음성은 남아 있었다.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채널의 모든 성좌들에게 들리고 있을 것이다. 「한수영도 알고 있었다. 모든 성좌들이 그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김독자 컴퍼니>에게는 적이 많았다. 누군가는 그들의 설화를 응원했지만, 누군가는 그들을 질투하거나 심지어는 증오했다. 근본을 찾을 수 없는 악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희로애락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설화를 오래도록 보아온 자들이라는 것.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이야기는, 이윽고 그의 일부가 된다.」 마치, ‘멸살법’과 김독자처럼. “하지만 너희가 눈을 감는 순간, 니들이 보아온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 청자를 정하지 않은 말. 그렇기에, 실은 모두를 향한 선언이었다. 이윽고 ‘이계의 신격’들의 앞 열을 전멸시킨 성좌들이 밀려들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콰아아아아아! 포세이돈의 파도 위로 제우스의 전격이 더해진 격의 세례가 밀려오고 있었다. 전기구이처럼 타버린 이계의 신격들이 죽어갔다. 아무리 <김독자 컴퍼니>라도, 지금 같은 몸상태로는 저 파도를 받아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동료들을 믿었다. “난 죽어도 연중은 안 해.” 한수영이 온 힘을 다해 [흑염]을 쏘았다. 개연성의 억제력에 의해 [흑염]의 파괴력은 평소의 사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이윽고 코앞까지 밀려온 포세이돈의 파도가 그들을 덮치는 순간. 「아주 잠깐 세상이 멈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세한 붓으로 덧칠되듯이, 이 세계를 이루는 근본적인 뭔가가 변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정지했던 세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시나리오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포세이돈의 파도와 제우스의 전격이 그녀와 <김독자 컴퍼니>를 덮쳤다. 콰드드드드드! 정확히는, 그들의 바로 앞을 막은 보호막을 덮쳤다. 탄탄하고 광활한 강철의 벽. 이현성의 설화였다. <오즈>에서 행성 전체를 감쌌던 그의 설화가 일행들을 지키고 있었다. 여전히 이현성은 관리국이 건 제약을 받는다. 그런데 어떻게? “수영 씨.” 이현성의 전신에 가공할 스파크가 흐르고 있었다 이현성뿐만이 아니었다. 관리국의 제재로 녹초가 되어가던 <김독자 컴퍼니>의 모두에게서 새파란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옥죄던 근육이 자유로워지고, 구속된 마력이 해방되고 있었다. [채널 내의 후원 지급 오류가 정상화되었습니다.]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밀려 있던 후원금이 일시 지급됩니다!] 허공에서 작게 우는 비유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양의 간접 메시지가 한수영의 귓전을 때렸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이 가진 코인의 절반을 기쁘게 후원합니다!] 거의 신화급에 다다른 성좌가 모은 코인의 절반이란 대체 어느 정도일까. 한수영은 그 액수를 짐작할 수 없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투덜거리며 막대한 양의 코인을 지불합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성운의 금고에 빠른 속도로 잔고가 쌓여갔다. [성운 금고 총액 : 83,112,540 C] [성운 금고 총액 : 162,423,800 C] . . . [성운 금고 총액 : 1,041,512,080 C] 코인의 총액은 1억을, 다시 10억을 돌파했다. 이제 한수영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 후원액을, 모조리 개연성에 지불하는 것. 츠츠츠츠츠츳! “모두 버텨!”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빙긋 웃습니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후원 상한을 초월한 양의 코인을 후원했습니다!] 파인애플 티셔츠를 입은 영감. 언젠가 한수영은 [페라르기니] 광고를 찍으러 갔을 때 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정말 이런 광고로 차가 팔릴 거라 생각해?」 한수영의 말에, 양산형 제작자는 기묘한 대답을 남겼다. 「팔려고 광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팔릴 물건을 광고하는 거라네.」 이제 한수영은,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5,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미염공 장목후’가 5,1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자신의 모든 비자금을 후원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명계 잔고의 절반을 후원합니다!] [성좌, ‘지고한 빛의 신’이 2,100,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1,500,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익히 수식언을 알고 있던 성좌들. [성좌, ‘절름발이 사기꾼’이 15,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잡배의 군주’가 450,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달걀을 세우는 모험가’가 18,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이천일류의 달인’이 4,000코인을 후원합니다!] [북두성군의 모든 별들이 300,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300코인을 후원합니다!] 알고 있었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성좌들. [수식언을 밝히지 않은 다수의 성좌들이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개연성에 힘을 보탭니다!] 그리고, 그들이 몰랐던 성좌들까지.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를 함께했던 모든 성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후원하고 있었다. 꺼져 있던 채널에 빛이 돌아오고, 중계가 시작된다. [채널, BY-9158의 중계가 재개됩니다!]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모든 코인 속에 성좌들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 설화의 끝을 보고 싶다는 마음.」 한수영 역시 그 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 못 하는 자들도 있었다. [대체 무슨 짓들을 하시는 겁니까. 설마 저 화신들을 동정하는 겁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이야기의 적」들을? 다들 정신 차리십시오! 당신들이 누구인지 잊었습니까? 성좌들이여, 더러운 이야기에 눈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터져 나오는 대도깨비의 고함. 그러자 누군가가 답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을 차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츠츠츠츠츠츠······! 가공할 개연성의 폭풍이 밀려나고, 포세이돈의 파도가 가라앉는다. 한수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이 흐르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의지가 새로운 개연성의 흐름을 받아들입니다.] 뭔가가, 변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 시나리오의 규칙 변경을 고려합니다.] 그녀와 일행들을 짓누르던 관리국의 모든 개연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불균형하게 맞춰져 있던 시나리오의 균형이 평형을 되찾고 있었다. [당신은 여전히 ‘이야기의 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김독자는 어렵다. [‘이야기의 적’은 당신에게 이해받길 원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시나리오의 규칙이 변경됩니다.] [지금부터 모든 성좌들은 최종 시나리오에서 자신의 진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한수영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세계의 껍질이 한 꺼풀 벗겨지듯, 주변 정경이 변하고 있었다. 【■■■■■■······ 가! 싸워! 여기가 우리의 전장이다!】 말을 탄 사내 하나가 한수영의 곁을 지나쳤다. 분명, 방금전까지 이계의 신격이었던 존재. ‘이름 없는 것들’이었던 존재였다. 촉수와 끈적한 진액으로 뒤덮여 있던,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불러일으키던 미지의 괴물들. 【이길 수 있어! 끝까지 포기하지 마!】 그들의 모습이 바뀌고 있었다. 누군가는 사람으로, 누군가는 난쟁이로. 각기 다른 종족이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이형의 존재가 아니었다. 【범각! 움직여! 이곳이 우리가 꿈꾸던 마지막 시나리오다!】 【마르크!】 ‘이름 없는 것들’이었던 모두가, 그곳에서는 이름이 있었다. [당신은 ‘이야기의 적’의 편이 되었습니다.] 황혼이 내리는 전장에서, 성좌들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들. 그들이 대열을 이루며 성좌들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현성을 닮은 사내도 있었고, 신유승을 닮은 아이도 보였다. 정희원이나 이길영, 이지혜를 닮은 이들도 있었다. 【제법이네, 이번 세계선에선 여기까지 왔다 이거지.】 얼핏, 한수영 자신을 닮은 소녀도 보였다. 그들 모두가, 「이야기의 적」의 편에서 싸우고 있었다. 한수영은 멍한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좇았다. 「버려진 모든 세계선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녀가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세계. 오직, 독자의 눈으로만 상상할 수 있었기에 [예상 표절]로도 읽지 못했던 세계. 「이것이 김독자가 꿈꾸던 세계였다.」 한수영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방금전까지 외신왕이 있었던 장소. 너무나 커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던 심연이 드리워져 있던 그곳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한수영, 엑스트라가 주목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 찢어진 검정색 코트 사이로, 연약하게 드러난 흰색 코트. 「“엑스트라는 주목을 못 받으니까 엑스트라지.”」 한수영은 비틀거리듯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딱히 뭐 방법이 없어. 보통은 희생하면서 주목을 끌거나, 아니면······.”」 걷고, 걷고, 또 걸어서 마침내 사내의 앞에 도착했다. 「“그들에게도, 이야기를 줘야지.”」 사내는 가만히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수영은 그런 김독자의 앞에 우뚝 섰다. 답지 않게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시야가 흐려져서 얼굴이 똑바로 보이지 않았다. “고생했어.” 그곳에 김독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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