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화
491화
김독자다. 이건 분명 김독자의 문장이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한수영은 다음 문장을 썼다.
「뭐야, 멀쩡하네.」
작가라고 자신의 문장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수영은 그렇게 밖에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읽어낼 것이다.
김독자는 그녀가 아는 최고의 독자니까.
툭.
가볍게 부딪치는 노크 소리가 김독자의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곳곳에서 부딪치는 병장기 소리에 귀가 아팠다. 일행들이 분투하고 있다. 여유를 부리고 있을 새는 없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
「······■■■■■」
벽에 적힌 문장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까의 소통이 그저 희박한 확률의 우연이었던 것처럼.
「야! 알아볼 수 있게 적어!」
장하영의 도움이 있었음에도, 김독자의 메시지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자신의 힘을 개방합니다!]
츠츠츠츠츳!
너무 많은 문장들이 맥락 없이 벽 위를 떠돌고 있었다.
모두 자신과 일행들이 김독자에게 한 말들이었다. 어떤 문장은 또렷하게 보였고, 어떤 문장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수영아.”
“······알아.”
한수영은 장하영의 말을 들으며 다시 한번 손을 벽에 가져다 댔다.
떠도는 문장들을 조합해 어떻게든 김독자의 메시지를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설화, ‘예상 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대상은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활자와 활자를 잇는 것은 맥락이다. 맥락이 없는 바다에 펼쳐진 활자들은 마치 처음부터 읽지 못하게 만들어진 책 같았다.
「“퇴근하겠습니다.”」
「“등산 가면 보조 배터리 주신다고요?”」
한수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맥락 없는 문장들을 어떻게든 연결해보는 것이 전부였다.
말이 안 되는 문장에 맥락을 부여해 의미를 만든다. 전개가 아닌 것을 전개처럼 보이게 배치한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이어도 언제나 의미가 빈 부분이 있었다.
“김독자! 말해! 계획이 뭐냐고! 지금부터 우리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건데!”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포효하는 외신왕이 성좌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피를 흘리는 일행들이 후폭풍 속에서 스러져 갔다.
한수영은 이를 악물었다. 김독자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으로도 좋다. 중요한 것은 김독자의 의도를 읽는 것이다.
일행들에게 계획을 전하지 않은 채 움직인 의도.
외신왕을 택한 김독자의 생각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둘, 단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만약 멸살법이 유료였으면 나는 지금까지 얼마를 쓴 거지?」
「통장에 2천만 원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방이 두 개면 나머지 방에는 보통 뭘 넣는 거지?」
“······넌 바깥에서 만났으면 절대 친구 안 했어.”
메모처럼 내던져진 단어들. 한수영은 단어와 문장들을 모았다.
훌륭한 작가는 먼저 훌륭한 독자여야 한다.
한수영은 그런 것을 읽는 법을 알고 있었다.
「돈은 대체 어떻게 버는 거지」
때로는 자신이 읽어낼 수 없는 문장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저 페이지를 넘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그 페이지로 돌아왔을 때 그 문장을 다시 읽을 수 있도록.
[대상은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겨서, 다음 장을 넘기고 또 넘겨서, 그 이해 불가능한 문장에 대한 단서를 필사적으로 그러모으는 수밖에 없다.
「내 인생에는 돈 벌 개연성이 없나?」
츠츠츠츠츠······!
멀리서 정희원이 무릎을 꿇는 것이 보였다. 달려온 이설화가 그녀를 부축했고, 유상아와 이현성이 그녀를 향해 날아드는 병장기를 막아섰다.
[관리국의 개연성이 당신의 시나리오 개입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김독자의 말이 맞다. 모든 게 다 개연성 때문이다.
김독자가 가난했던 것도, 그들이 이런 꼴이 된 것도.
[관리국의 개연성이 당신의 몸을 구속합니다!]
츠츠츠츠츳!
이 세계에서 개연성은 곧 힘이다. 더 그럴듯한 개연성을 가진 쪽으로 시나리오는 흘러간다.
[당신의 성운은 지나치게 많은 개연성을 위반하였습니다.]
한수영도 알고 있었다. 이 후폭풍은, 그동안 운 좋게 넘겨왔던 위기들의 대가였다. 이렇게나 많은 일행들이 있었음에도, 아무도 잃지 않고 마지막 시나리오까지 왔다.
반면, 이곳까지 온 다른 화신들은 그들보다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어째서 저들만······.」
「이건 불공평해.」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김독자 컴퍼니>는 지나치게 많은 개연성을 어겨왔다.
희생이 필요한 모든 곳에 희생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오직 한 사람만이 반복해서 희생해왔다.
“김독자.”
그는 몇 번이나 죽었고, 다시 살아났다.
죽었어야 할 존재를 살리기도 했다. 부활 특성을 이용해서, 혹은 명계를 방문하면서. 미래를 바꾸면서.
「그래서 김독자는 이야기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독자 컴퍼니>가 쌓아온 거대 설화에는, 개연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수영이 벽을 긁듯 문장을 그러쥐었다.
새로운 문장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당분간 성운 금고는 네가 맡아.”」
그것은 얼마 전 한수영과 김독자가 나눈 대화였다.
「“······뭐야, 다 써버려도 난 모른다?”」
시스템을 통해 받은 금고 관리 권한.
짠돌이 김독자가 웬일인가 싶었다.
그때는 돈 관리가 귀찮으니 떠넘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성운의 잔고를 확인하시겠습니까?]
하지만, 김독자가 정말 그런 이유로 누군가에게 ‘금고’를 넘길까.
한수영은 홀린 듯 금고를 열었다.
「“많이도 모았네. 쪼잔한 자식. 이렇게 아껴서 뭐 하려고?”」
「“다 쓸 곳이 있어.”」
금고 속에 쌓인 막대한 코인들. 세상의 모든 별들이 탐낼 금은보화가 그곳에 있었다. 이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후원 단위이자, 시나리오를 움직이는 동력.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설화 중 하나는 [코인]이다.」
하지만 이제는 코인으로 화신체를 강화하는 것도,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 살 만한 것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늘 궁금했다. 녀석이 악착같이 코인을 모았던 이유가.
[코인을 ‘거대 설화’의 성장에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이제야 한수영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사용한다.”
[성운에 비축되어 있던 143,245,199코인을 개연성으로 지불합니다!]
쿠구구구구구구!
그녀의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살코기를 탐하는 맹수처럼 주변 설화들이 달려들었다. 황홀한 금빛이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코인의 설화를 탐식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몸집을 불립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의 대비가 더욱 뚜렷해집니다!]
자본을 먹은 거대 설화는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설화의 세부를 더욱 충실하고 강력하게, 화려하게 구현한다.
쿠구구구구구구!
거대 설화의 저력이 관리국의 개연성에 저항하기 시작하자, 대도깨비들과 성좌들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정희원의 검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고, 이현성의 방패가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다. 신유승과 이길영이 소환한 괴수종과 충왕종들이 몰려오며 후미의 성좌들을 물어뜯었다.
“발사!”
이지혜의 전함이 발포를 시작하자 달려들던 전방의 화신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승산이 보이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관리국의 개연성이 제재의 수위를 높입니다!]
과도한 개연성의 사용에 천공에 새카만 균열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시나리오 무대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몇몇 대도깨비들의 입에서 설화가 흘러내렸다. 이번 싸움은 저들에게도 생사를 건 사투인 것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결말을 만들기 위해, 도깨비들은 이 시나리오에 직접 뛰어들어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다.
츠츠츠츠츳!
“흑염룡!”
거친 [흑염]이 한수영의 주변을 감쌌다. 날아드는 공격들을 걷어내며, 전방을 향해 [흑염]을 쏘아 올렸다. 바로 곁에서는 장하영이 무림의 스킬들로 한수영의 등을 지키고 있었다.
왜 김독자는 이 역할을 자신에게 맡겼을까.
자신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
그런데 김독자는 자신에게 이 역할을 맡겼다.
스스스스스······.
장하영의 벽이 다시 흩어지고 있었다. 힘을 모두 소진하여 다시 돌아가는 벽.
관리국의 제재에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잠깐 닿은 듯하던 김독자는 다시 멀어져갔다. 이야기의 흐름은 대도깨비들에게 다시 넘어가고 있었다. 한수영이 소리를 내질렀다.
[당신의 ■■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도 잃지 않는 이야기.
모든 시나리오의 끝에서, 커다란 집에 모두가 함께 모여 사는 이야기.
그 소박한 꿈을 위해 일행들은 싸웠다.
하지만 개연성이 부족해서,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그 순간, 한수영의 머릿속에 빛이 번쩍였다.
부족한 개연성.
「김독자가, 자신도 유중혁도 아닌 한수영에게 이 역할을 맡긴 이유」
[성좌, ‘해상전신’이 화신 ‘한수영’을 바라봅니다.]
투두둑······.
자상을 입은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한수영은 어깨를 붕대로 대충 감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리치는 스파크 너머로 드리워진 아득한 <스타 스트림>의 별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성좌들이 이 세계의 마지막을 보고 있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진행에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관리국과 신화급 성좌들의 횡포를······!]
한수영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 너흰 성좌들이니까······.”
김독자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녀석도 성좌니까.
어떻게 해야 시나리오가 더 재미있어지는지, 어떻게 해야 더 긴장감이 생기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독자니까.
「그래서 김독자는 일행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수영은 손을 꾹 쥐었다. 모든 코인을 사용했기에 그녀는 빈손이었다.
하지만 김독자가 그녀에게 남긴 것은 코인이 아니었다.
“······첫 번째 시나리오가 시작될 때 너희가 말했지. 우리보고 공짜로 살아왔다고. 그러니 앞으로는 대가를 지불하라고.”
김독자가 남긴 것은.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화신 ‘한수영’의 말에 집중합니다.]
[성좌, ‘외눈 미륵’이 화신 ‘한수영’의 말에 집중합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 전체였다.
“그 말, 너희에게 돌려줄게.”
한수영의 신호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비유가 채널을 차단했다.
성좌들의 채널이 암전되었다.
[채널 BY-9158의 모든 송신화면이 차단됩니다.]
[성좌, ‘천제의 풍신’이 갑작스런 암전에 당황합니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다음 장면을 보고 싶어합니다!]
세계가 암흑에 빠지자, 다른 시나리오 지역에서 채널을 보고 있던 성좌들이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독자 컴퍼니> 채널의 구독좌들은, 모두 비유의 채널을 경유해야만 한다. 다른 채널에 소속되어 있던 구독좌들도, 이 순간만큼은 비유의 채널을 통해서만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이야기는 이제 유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