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화
490화
모든 도깨비는 ‘대도깨비’를 꿈꾼다. <스타 스트림>의 도깨비가 올라갈 수 있는 이야기의 정상.
그리고 정상에 오른 자들도 여전히 꿈을 꾼다.
비형은 거대한 방주의 전경을 차지한 [최후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벽의 대부분은 여백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비형의 역정에 대도깨비들의 통신 라인이 조용해졌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하늘에서, 비형은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외신왕이 된 김독자의 모습.
그날의 지하철에서부터 마지막 시나리오에 이르기까지. 김독자가 ‘구원의 마왕’이 되고, ‘빛과 어둠의 감시자’가 되는 동안 비형은 상급 도깨비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대도깨비가 되었다.
「시나리오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은 이야기꾼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실수다.」
도깨비의 본분은 많은 성좌들의 시선을 이끌어 ‘최후의 벽’에 새겨질 이야기를 남기는 것.
때문에 도깨비는 결코 시나리오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그곳에서 피어나는 설화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고, 화신들의 고통에 이입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럼에도 비형은 그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그들의 설화를 보며 오래전에 잊었던 몇 가지 감각을 깨우쳤다. 하나의 설화가 끝나고 다음 설화가 찾아오는 순간의 설렘. 자신이 짠 시나리오 안에서 성좌들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을 볼 때의 벅참.
비형은 김독자에게 ‘시나리오’를 배웠다.
[저들은 시나리오를 잘못 수행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시나리오라는 건 가역적인 흐름입니다. 많은 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흐름이란 말입니다. <스타 스트림>의 다른 성좌들도―]
[자네가 키운 설화라고 애지중지하는 모양인데, 더 큰 이야기의 흐름이란 게 있네.]
비형은 소리를 지르려다가 참았다. 모든 대도깨비들이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어먹게도, 지금 비형은 그 대도깨비들의 막내였다.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대도깨비 ‘가랑’이 입을 열었다.
[자네처럼 젊은 도깨비는 저런 결말이 신선하게 보이겠지. 하지만 나는 저런 설화들을 많이 보아왔네. 먼 우주의 역사에 <스타 스트림>을 원망하고 부수려 했던 자가 하나뿐이었는 줄 아는가?]
대도깨비 가랑.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깨비 중 하나이자, 누구보다 ‘도깨비 왕’에 가까운 도깨비.
[무수한 멸망이 있었다네.]
그 어조에서 새어나오는 회한을, 비형은 제대로 헤아릴 수 없었다.
[모든 멸망이 같은 멸망은 아닙니다.]
몇몇 대도깨비들이 경고하듯 비형을 노려보았다. 비형은 움츠러들지 않으려 노력하며 가랑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현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가랑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 저들이 꿈꾸는 ■■는 다른 설화들과는 조금 다르지.]
그 발언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지켜보던 대도깨비 온새가 끼어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가랑은 손을 들어 그를 막으며 말을 이었다.
[그 다름이 위험한 걸세. 모든 설화가 반드시 다음 설화의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니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떤 설화는 시나리오 전체를 망가뜨리기도 한다네.]
가아아아아아아!
‘이름 없는 것들’의 비명.
한때는 모두 다른 시나리오의 참가자였던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절규하며 성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이계의 신격’을 이끄는 외신왕 김독자가 있었다.
「이야기의 적」.
비형이 알기로, 어떤 재앙에도 그런 호칭이 붙은 적은 없었다. 그런 호칭이 붙을 거라는 언질조차 듣지 못했다.
김독자의 저항을 보며 가랑이 말을 이었다.
[모든 시나리오의 시작에서 주인공은 세계의 일탈을 겪지. 나타난 적과 싸우고, 갈등을 겪고, 무언가를 희생하며 승리를 쟁취한 후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 보상을 받아.]
비형도 알고 있는 이론이었다.
모든 하급 도깨비들이 제일 먼저 듣게 되는 시나리오의 낡은 법칙.
[고루하지만 그것이 시나리오의 핵심이야. 그 순환을 지켜야 다음 시나리오가 만들어질 수 있고, 다시 그다음 세계선이 열릴 수 있는 것일세. 갈등은 봉합되고, 상처는 치유되고, 세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사해야 하네.]
먼 산등성이의 자락이 무너지며 폭발하고 있었다. 모여드는 성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비형도 알고 있었다. 본래, 이 ‘마지막 시나리오’는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세계의 멸망이 찾아오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
저 ‘외신왕’이라는 가상의 적은 오직 그것을 위해 존재했다. 서로 반목하던 별들은 강력한 대적의 강림에 힘을 합치고, 그에 맞서 싸운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겠지만 갈등은 해결된다. 세계는 평화로워진다. 호사가들은 그 역사를 노래하고 전승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다. <스타 스트림>은 계속된다.」
그것이 바로 도깨비들이 추구하는 ‘시나리오’의 정체였다.
시나리오는 순환되고 반복되어야만 한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최후의 시나리오’에 열광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무엇인지, 시나리오가 어째서 계속되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성좌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공급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정해진 전개를 거부합니다!]
그들에게 정해진 시나리오를 거부하는 자들.
그리하여 <스타 스트림>의 존재 자체를 무너뜨리려 하는 이들.
[화신, ‘한수영’의 ■■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
끝을 끝이라 말하지 않는 모순의 ■■이 그곳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주의 이야기꾼이 아닌 인간 작가가 정한 결말이었다.
<스타 스트림>의 순환을 거부하고, 영원한 싸움을 택한 존재들.
콰아아아아아아아!
폭음 속에서, 마침내 대도깨비 가랑이 선언했다.
[이번 세계선은 여기서 판을 접도록 하지.]
그때까지 침묵을 고수하던 대도깨비들도,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대도깨비들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형이 뭐라고 나서기도 전에, 곁에 있던 바람이 말했다.
[비형, 미안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네. 이번은 자네가 참아야 해.]
바람의 표정을 본 순간, 비형은 깨달았다. 이곳에 모인 대도깨비들은 우주 제일의 이야기꾼들이었다. 시나리오를 지배하고, 별들을 농락하며 이 세계관을 관장해 온 지배자들.
그런데 이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만든 ‘이야기’가 두려워진 것이었다.
[메인 시나리오 강제 집행에 남은 개연성을 모두 사용하겠습니다.]
시나리오 강제 집행은 도깨비들이 행사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스타 스트림>의 흐름을 강제로 제어하는 만큼 말도 안 되는 개연성이 필요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일종.
특히나 그것이 마지막 시나리오에 행사되는 만큼, 그 양은 상상을 불허했다.
츠츠츠츠츠츠츠!
관리국의 개연성이 움직이자, <스타 스트림>의 모든 하늘이 눈부신 스파크로 뒤덮였다. 세계선의 어디에도 어둠이 발을 붙일 곳은 보이지 않았다.
[저들은 ‘악’으로 끝나야 합니다.]
대도깨비들의 뜻에 동조하는 거대 설화들이 그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멸망한 신화의 성전’이 관리국의 의지에 따릅니다!]
[거대 설화, ‘신새벽의 도래’가 흐름에 동조합니다!]
[거대 설화, ‘불멸의 올림포스’가 관리국의 뜻을 존중합니다!]
비형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대도깨비들이 써 내려가는 최종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대도깨비들의 당신에게 의결을 강요합니다!]
그는 아직 이 결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비형!]
바람의 외침에도 비형은 대답이 없었다.
[<스타 스트림>이 대도깨비들의 개입에 반발합니다!]
허공의 스파크는 곧 대도깨비들에게도 전이되었다. 가공할 후폭풍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대도깨비들이라고 해도, 시나리오에 개입하는 것은 이만큼이나 큰 대가를 요구한다.
[나 ‘대도깨비 가랑’은 정식으로 시나리오에 관여할 것을 선언한다!]
가랑의 발언을 시작으로 대도깨비들이 선언을 이어갔다.
[나 ‘대도깨비 녹수’는 정식으로 시나리오에······]
[나 ‘대도깨비 하람’은······.]
열 명이 넘는 대도깨비들이 모두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정식으로 시나리오에 개입한다는 것. 그것은 그들이 ‘이야기꾼’의 방관자적 직위를 내려놓겠다는 의미였다.
잠시 후,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대격변을 일으킵니다!]
[<스타 스트림>이 메타적인 개입을 용인합니다.]
[이제부터 ‘이야기꾼’은 시나리오의 방관자가 아닙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대도깨비’들의 선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일부 성좌들이 ‘대도깨비’들의 만행에 강한 질타를······!]
비형은 그런 대도깨비들을 바라보았다. 반발하는 성좌들의 메시지들을 무시하면서까지, 이 세계를 종결지으려는 그들의 의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써왔는지도 모른다.
멀리서, 그런 대도깨비들을 응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비형은 그 시선과 마주했다.
외신왕이 되고, 「이야기의 적」이 된 김독자. 시나리오 외부의 존재가 된 그의 말은, 이제 비형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왜일까. 비형은 그 순간 김독자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대도깨비들은 아직도 저 녀석을 잘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독자가 어떤 존재인지.
시나리오에 정식으로 개입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등장인물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비형은 묵묵히 그 시선을 받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당신의 ■■이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마침내 비형도 자신의 ■■를 결정할 차례였다.
*
대도깨비들의 개입과 함께, 시나리오의 균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비호하려는 대상은 「이야기의 적」입니다.]
[관리국의 개연성이 당신의 행동을 억제합니다!]
한수영을 비롯한 일행 모두가 개연성의 후폭풍에 휘말리고 있었다.
새파란 스파크가 일행들의 전신을 족쇄처럼 휘감았다.
“수영 씨, 이거!”
“이 개자식들이······. 이대로 시나리오를 끝낼 속셈이야.”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고요히 분노합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거대 설화들이 관리국에 저항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상대는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거대 설화’였다.
[지금이다! 머리를 공격해!]
이름 없는 것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성좌들이 마침내 김독자를 향해 포화를 쏘기 시작했다.
“김독자!”
한수영이 외쳤지만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당신은 대상을 비호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비호하려는 대상은 당신이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씨발, 개소리 하지마.”
대도깨비가 남긴 말이 저주처럼 떠올랐다.
인간은 한평생을 바쳐도 하나의 존재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수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현성이, 정희원이, 이지혜가, 다시 신유승과 이길영이, 마지막으로 전함 위의 동료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들 중에 김독자가 아닌 이들은 없다. 이곳의 모두는, 적어도 한움큼씩은 김독자의 생에 대한 지분이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부족했다.
‘이 자식 어디 갔어?’
한수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아아아아아아아!”
몸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정희원이 움직였다. 후폭풍이 그녀의 근육을 파열시키고, 혈관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피칠갑이 된 몸을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심판자의 검]을 굳게 쥔 채, 한 걸음 한 걸음 김독자를 향해 움직였다. 김독자를 베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카가가가가각!
날아드는 성좌의 날붙이를 튕겨낸 정희원이 울컥 피를 토했다.
그의 뒤를 이현성이 따랐다.
쿠드드드드!
외신이 된 김독자가 후폭풍 속에서 성좌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 김독자를, 동료들이 스파크 속에 넝마가 되어가며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김독자를 지킬 수 없다고?”
[설화, ‘예상 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별의 구원자’가 ‘구원의 마왕’을 찾습니다.]
[설화, ‘벌레의 왕’이 ‘구원의 마왕’을 찾습니다.]
[설화, ‘멸망의 심판자’가 ‘구원의 마왕’을 찾습니다.]
그 모든 설화들이 김독자에게 감응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김독자를 부르짖고 있었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이해를 못해서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지켜줄 수 없는 것이라면······.
[다수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의 비극에 탄식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관리국의 농간에 항의하며······!]
한수영의 입가에 피가 맺혔다. 과열된 머리에 현기증이 일고 의식이 가물거렸다.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짚은 것은 그때였다.
곱슬거리는 금발이 눈앞을 지나친다 싶더니, 뭔가가 일행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마치 투명한 벽이 그들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김독자 컴퍼니>를 보호합니다!]
벽을 각성한 장하영이, 한수영을 부축하며 김독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기, 나보다 구원의 마왕 좋아한 사람 있어?”
츠츠츠츠츳!
「독자 씨, 이제 잃어버린 물건 이야긴 안 하겠습니다. 지겨우신 것 같아서······.」
「형, 나 여기에 있어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걱정 마요, 아저씨 두고는 아무 데도 안 갈 거니까.」
뿔뿔이 흩어진 문장들.
<김독자 컴퍼니>가 쌓아온 설화들이, 하나의 테마로 엮이고 있었다.
[‘최후의 벽’의 조각 일부가 세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대도깨비들이 경악합니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자신의 조각을 끼워 맞춥니다.]
한수영은 장하영에게 의지한 채 외신왕이 된 김독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벽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무뚝뚝한 벽.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첫 번째 ‘테마’가 공개됩니다!]
그 벽은 그 너머에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곳에 있었다. 이 세상엔 벽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서로가 다치지 않고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한수영은 불가능의 벽 위에 자신의 첫 문장을 썼다.
「멍청아.」
자신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멍청한 한 마디였다. 하지만 한수영에겐 다음 문장을 쓸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벽이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벽 위로 그녀가 쓰지 않은 다음 문장이 떠올랐다.
「■■■······ 한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