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화

489화 달려가는 정희원의 모습이 보인다. 칼날 위를 미끄러지는 달빛처럼 ‘이름 없는 것들’ 사이를 미끄러져 나가는 정희원. 그녀가 찾은 해답이 그곳에 있었다. [화신, 정희원의 ■■은 ‘구원’입니다.] 모두에겐 각자의 ■■이 있다. 마침내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도, 각자의 결말을 선택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정희원!” 화려하게 궤적을 긋는 [심판자의 검]. 일행들은 그 검격을 보며 정희원의 뒤를 쫓았다. 유상아와 함께 하늘로 도약하려던 이길영이 문득 멈춰선 것은 뒤에 남겨진 소녀 때문이었다. “신유승······.” 우뚝 선 신유승이 울고 있었다. 제자리에 서서, 어디로도 가지 않은 채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신유승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설화, ‘별의 구원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오직 신유승만이 가지고 있는 설화. 저 빛나는 별빛으로 연결된 성좌와 화신. 그 설화가 내뿜는 빛이 너무나 아름답고 찬란해서, 이길영은 저도 모르게 신유승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길영은 신유승이 부러웠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이해’라는 말을 이해하기에도 벅찬 나이였다. 그것 때문에 박탈감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나이가 변명이 되는 것이 좋았다. 「아직은 네가 모를 수도 있어. 그건 괜찮은 거야.」 「네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너한테 의지해서 미안하다, 길영아······.」 「야 꼬맹이, 까불지 말고 뒤로 가.」 안심했다. 심지어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이런 세계여서, 내가 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의지할 수 있고, 어리광 피울 수 있고, 내가 어린애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유승이 있었다.」 어리광 피우지 않는 어린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항상 별을 바라보는 소녀였다. 이길영 역시 별을 바라보았다. 이길영도 좋아하는 별이었다. 그 별이 얼마나 슬픈 빛을 가지고 있는지, 마음을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려고 할 때 어떤 색깔로 변하는지 이길영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유승처럼 잘 알지는 못했다.」 “언제까지 멍하게 있을 거야? 가자.” 멍하니 고개를 돌린 신유승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 보며, 이길영이 신유승의 손을 잡아챘다. 두 아이는 달리기 시작했다. 꽉 잡은 작은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나는 신유승만큼 독자형을 이해할 수는 없어.’ 신유승은 성좌 ‘구원의 마왕’의 화신이다. 그 누구도 그 사이를 갈라놓을 수도, 개입할 수도 없다. “너만 형 걱정하는 줄 알아? 너만 슬픈 줄 아냐고.” 끌려오는 신유승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이길영은 외쳤다. 이길영은 늘 신유승보다 어려 보이는 게 싫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난 한강 싫어. 바다가 더 좋아. 그리고 피자보다 치킨이 더 좋아.” 자신 또한, 저 별에게 구해졌기 때문이다. “PC방이랑! 폰 게임이랑! 그리고······!” 멀리서 그가 좋아하는 별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것은 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저 하늘을 지배하는 성좌들의 질투와 시기를 받은 그 별은. 【■■■■■■■■■■■······.】 즐겨 보던 웹툰에서 나오던, 무서운 대악마처럼 보였다. 촉수가 흐물거리는 머리가 이쪽을 바라보는 순간, 달리던 이길영의 다리도 굳었다. 고층 빌딩보다 더 큰 높이로 자라난 이계의 왕. 이야기의 적. 이 세계를 파멸시킬 악당. 「신유승에겐, 저 악마가 김독자로 보일까.」 “나도······.” 떨림을 이겨내며 이길영은 중얼거렸다. 저것이 자신이 아는 김독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공포. [모두 속지 마라!] [저자는 이 세계를 파멸시킬 것이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존재입니다. 그에게 당신들의 생존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사실은 그가 보고 있던 김독자는 틀렸고. 「“형은 혹시 신인가요?” “······뭐?” “아니면 ‘주인공’인가요?”」 저 도깨비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난 신도 주인공도 아냐. 오히려 늘 주인공을 부러워했었지.”」 가까스로 떨림을 멈춘 이길영이 용기를 내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득한 외신의 눈동자가 소년을 마주하고 있었다. 김독자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저 외신에게서 김독자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것은 믿음뿐이었다. ―길영아, 관계라는 건 한 가지 방식으로만 맺을 수 있는 게 아냐. 언젠가 유상아에게 신유승과 관련된 고민 상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유상아는 읽던 책을 덮으며 이렇게 말했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모두 그걸 다르게 이해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이길영은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어서 그 비유가 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이길영 또한 누군가와 소통하는 스킬이 있었다. ―사마귀나 바퀴벌레도 교감할 때의 느낌이 모두 다르거든요. [다종 교감]은 그런 스킬이었다. 자신과 완전히 태생이 다른 존재와 교감하는 스킬. 하지만 소년에겐 사람을 이해하는 스킬은 없었다. 김독자는 어떤 사람인가. 잘 모르겠다. 다만 김독자라는 사람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있었다. 머리나 몸통이 터진 사람들의 모습. 「“잠깐 실례 좀 할게.”」 그의 손에 메뚜기 한 마리를 쥐어 주던 김독자의 얼굴. [설화, ‘벌레의 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순간, 주변의 정경이 흔들리며 소년의 안에서 설화가 깨어나고 있었다. [성좌, ‘무저갱의 지배자’가 음험하게 웃습니다.] 어디선가 날아든 황충의 무리가 소용돌이치며 세상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날, 이길영은 그대로 열차가 뒤집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손안에서 죽어간 메뚜기처럼.」 그 가공할 격의 향연에 ‘이계의 신격’들이 비명을 질렀다.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이 메시지를 퍼붓기 시작했다.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 ‘무저갱의 지배자’에게 경고합니다!] [일부 마왕들이 화신의 힘에 경악합니다!] 맹렬하게 흐르는 설화가 성좌들의 시선을 아랑곳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것은 어른들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같은 [다종 교감]을 가진 신유승만이,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 「“돈도 없으면서 자식을 낳길 왜 낳아······.”」 지독한 갈탄의 냄새. 죽은 바퀴벌레처럼 누워 있던 아빠와 엄마의 모습. 차가워진 살갗을 쿡쿡 눌러보던 기억. 영정사진도 없는 장례식이 끝나고, 자신을 보던 친척들의 눈동자. 「“영미 그 계집애 그럴 줄 알았어. 내가 그 놈팽이는 안 된다고······.”」 「“그래서 쟤는 누가 맡을 거야. 첫째 형네 집은······.”」 「“우리 집은 안 된다. 애가 셋이야.”」 아주 어린 나이부터 거절당해온 삶에 대해, 이길영은 이야기할 언어를 아직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상처인지 설명하고 표현할 능력이 없었다. 상처는 드러나지도 아물지도 못한 채 썩었다. 「“시설 찾아봐. 저런 애들 돌봐주는 곳 있어.”」 이모의 손에 이끌려 서울행 열차를 타고, 개미굴 같은 서울의 지하철 노선도를 마주하며 이길영은 어지러웠다. 세상의 복잡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나 많은 굴들이 있는데, 자신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채집망의 메뚜기들이 길 잃은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얘. 그거 버려! 빨리! 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해. 징그럽게!”」 만약 그날 시나리오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자신은 어떻게 됐을까. “독자 형!” 이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독자 형! 저 여기 있어요!” 이길영은 목이 터지도록 부르짖었다. 목소리가 닿지 못해도 좋다. 김독자의 화신이 아니라도 좋다. 「“길영아. 이야기할 수 없으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하나만 기억해줘.”」 다만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말하고 싶어졌을 때, 형이 옆에 있을게.”」 독자 형은 악당 같은 게 아니라고. 그냥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구해준, 평범한 사람이라고. [죽여!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된다!] [다른 세계선의 실패자들이야! 무시하고 밀어붙여! 지금 죽여야 끝난다!] 선두에서 싸우던 ‘이계의 신격’의 열이 밀리고 있었다. 한쪽 방위가 뚫린다 싶더니, 신화급 성좌들을 필두로 한 화신들의 무리가 김독자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막아야 했다. 츠츠츠츠츳! [해당 행동은 「관리국」의 개연성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비호하려는 대상은 「이야기의 적」입니다.] 설득해야 한다. 독자 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떻게 해야. 쿠구구구구구······. 밀려오는 적 앞에서도 김독자는 벽처럼 서 있을 따름이었다. 가끔 뭔가를 말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저 말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무력하게 벽에 기대어 있는 것이 싫었다. 김독자의 편에 서고 싶었다. 이런 세계 따위 멸망해도 좋다. 김독자가 이야기의 적이라면, 그 역시 이야기의 적이 되겠다. 하지만 그가 이해하기에 김독자는 너무 어려웠다. 자신이 어린아이라는 것이 싫었다. 어른이었다면. 한수영이었다면, 유중혁이었다면, 정희원이었다면······. ······신유승이었다면. 꾹 쥔 손에 감각이 느껴졌다. 신유승이 그곳에 있었다. “······바보야. 정신 차려.” 주변을 날아다니는 황충의 무리가 가라앉았다. 신유승이 말하고 있었다. “나도 아저씨 이해 못 해.” [전용 스킬, ‘최상급 다종 교감’이 발동합니다!] “그냥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거야.” 키메라 드래곤을 함께 다루던 두 아이의 스킬이 동시에 발동했다. 서로를 가장 가깝게 이해할 수 있는 상태. 이길영은 김독자는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신유승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두 사람이 함께 읽는 설화에 세계가 흔들렸다. 아주 어렴풋이, 김독자의 얼굴이 보일 것도 같았다. 자신이 아는 김독자의 모습이, 보일 것도 같았다. [설화, ‘별의 구원자’가 설화 ‘벌레의 왕’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꼬맹이들.” 한수영이 아이들의 곁을 지키듯 섰다. 그 옆을 이현성이, 정희원이, 다시 유상아가 지켰다. 「아이들의 세계를 함께 바라보는 어른들이 있었다.」 창공에서 이지혜의 전함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함의 포신 곁에 공필두와 이설화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든 포격 준비가 되었다는 듯, 이지혜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대도깨비 온새가 물었다. [지금 그를 비호하겠다는 겁니까? 그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알면서도? 이미 저 자는 당신들이 알던 ‘김독자’가 아닙니다. 이미 모든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웃기지 마. 그게 뭐가 진실이야. 진실이 그렇게 단순해? 니들이 보여준 건 그냥 편집한 영상일 뿐이잖아. 너흰 늘 그딴 식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었지.” 한수영은 다가오는 성좌들을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이야기의 적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그놈은 우리 동료야.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 알겠냐?”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포효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전격을 충전합니다!] “건드리면 다 죽여 버릴 거니까.” <김독자 컴퍼니>를 비호하는 성좌들이 움직이자, 저 강대한 성좌들의 흐름이 일순간 정체되었다. 츠츠츠츠츳! [일부 성좌들이 화신 ‘한수영’의 말에 동조하며······!] 개연성의 흔들림을 감지한 대도깨비 하롱이 메시지를 끊었다. [우습군. 그를 지키겠다고? 그의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너희들이?] [<스타 스트림>이 대도깨비의 시나리오 개입을 경고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시나리오가 답답하다는 듯, 후폭풍을 견디는 대도깨비가 묻고 있었다. [지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가?] 김독자에게 다가왔던 화신들이 몸을 움츠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김독자에게 호의를 갖고 있던 화신들도, 적의를 갖고 있던 화신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까마득한 천공에 닿은 외신. 심연이 담긴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모두가 몸을 떨며 주저앉았다. [너희는 그가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욕망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너희는 고작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평생을 바쳐도, 하나의 존재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일행들이 김독자를 올려다보았다. 대도깨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김독자를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이 비호하려는 대상은 「이야기의 적」입니다.] 자신의 역할을 잊은 등장인물들을 일깨우듯, 대도깨비가 외쳤다. [너희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를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이 시나리오는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의 왕’이 마지막 시나리오의 향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꾼이, 그 모든 정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행들과 함께, 한수영은 고개를 들었다. 이 모든 시나리오를 총괄한 ‘이야기의 왕’이 존재하는 곳. 한수영은 아득하게 펼쳐진 [최후의 벽]을 바라보았다. 「저 벽이, 그들의 이야기가 남겨질 곳이었다.」 “시나리오가 끝나지 않는다? 좋네. 그거, 모든 독자들의 소원이잖아.” [화신, ‘한수영’이 자신의 ■■에 근접했습니다.] 한수영은 김독자를 올려다보았다. 두족류의 거대한 머리통을 계속 노려보고 있자니, 김독자를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쓰는 이야기에는 김독자 저 자식이 꼭 필요해.” 마음에 들지 않는 원고지를 뜯는 작가처럼, 한수영이 거칠게 붕대를 풀었다. [흑염]으로 물든 그녀의 설화가 새카만 잉크가 풀어지듯 허공에 번지고 있었다. 마치, 언제까지라도 쓸 수 있다는 듯이. [<스타 스트림>이 화신 ‘한수영’의 결정에 놀랍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 ‘한수영’의 ■■에 경악하며······.] [당신이 비호하려는 대상은 「이야기의 적」······.] [해당 행동은 「관리국」의 개연성으로 금지······.] 츠츠츠츠츠······!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화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한수영이 씩 웃었다. “영원히 시나리오를 끝내지 말자고.” [화신, ‘한수영’의 ■■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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