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화
488화
[당신의 ■■은 ■■입니다.]
처음 그 메시지를 들었을 때, 정희원은 떨떠름했다. 언젠가 김독자가 한 말도 떠올랐다. 모든 존재에게는 각자 다른 종막이 있다고.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그런 것이 있으리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라고?
정희원은 그 단어가 훨씬 잘 어울리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싸워온 사람.
그의 검이 되기를 망설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
동료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 언제나 자신을 가장 먼저 희생하는 사람.
「그렇기에 원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정희원은 ‘이름 없는 것들’의 파도를 헤치며 달렸다. 인근에서 터진 독액이 정강이를 적시자 살점이 검게 부풀었다. 품속에서 이설화가 준 단창약을 급하게 꺼내 바르고, 다시 달렸다. 양옆에서 공세를 퍼붓는 성좌들의 방해를 뿌리치고, 김독자의 주변을 호위하듯 감싼 이름 없는 것들을 짓밟고 뛰어올랐다.
멀리서 뭔가가 보였다.
한때는 ‘김독자’였던 것.
【■■■■■■!】
그리고 이제는 「이야기의 적」이 된 존재.
“희원 씨!”
가까스로 달려온 이현성이 정희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만―”
이현성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최종 시나리오의 전 지역 스트리밍이 시작됩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채널이 개방되고 있었다.
츠츳, 츠츠츳······!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나리오 메시지.
[다들 당황하지 마시고 시나리오에 집중하십시오. 이번 시나리오가 여러분들의 마지막 시나리오입니다. 외신왕을 사냥하면, 여러분들의 긴 여정도 끝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최후의 벽’에 기록되고, 별들의 여정은 ‘대서사시’로 남아 영원히 전승될 것이다!]
탐욕스레 외치는 대도깨비들.
그들의 눈동자가 최후의 벽에 자신들이 인솔한 설화를 남기겠다는 욕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늙은 새벽의 광휘’가 최후의 이야기를 꿈꿉니다!]
[거대 설화, ‘아스가르드의 주인’이 최후의 이야기를 꿈꿉니다!]
거대 설화들도 요동치고 있었다.
‘단 하나의 설화’로 남기 위해서, 거대 설화들은 성좌와 화신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자신의 병기를 꺼내 듭니다!]
[성좌, ‘아비도스의 주인’이 시나리오에 강림합니다!]
[성좌, ‘나일강의 괴조’가 거친 포효를 터트립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 독려에 이끌리는 것은 아니었다.
제 1신좌인 제우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디오니소스를 비롯한 몇몇 <올림포스>의 신좌들은 공격을 망설이고 있었다. 화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저 사람을 정말 죽여야만 하나요?”
그 말을 꺼낸 것은 일본 화신인 ‘아스카 렌’이었다.
“내가 본 ‘김독자’는 악인이 아니었어요.”
“맞다! 김도게자는 나쁜 사람 아니다!”
[피스 랜드] 당시 재앙을 선택했던 다른 일본인들과 맞서 싸우며, 김독자 일행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이들.
그 외에도 <황제>와 <올림포스>에 소속된 몇몇 화신들이 동조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화신들의 의견에 동조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동요합니다!]
개연성에 심상치 않은 반향이 감지되자, 대도깨비들이 재차 나섰다.
[잊지 마십시오. 그는 ‘시나리오의 적’입니다.]
[그대들은 모르겠지만, ‘김독자’는 처음부터 이 세계선을 망치기 위해 시나리오를 클리어해 왔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저 오만한 대도깨비들이 공손한 말투로 서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광활한 천공 위에 투사되는 설화의 영상들. 도깨비들의 특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이 세계선을 배신하고 ‘이계의 신격’들과 거래했습니다.]
화면 속에서 김독자와 ‘은밀한 모략가’가 거래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에 김독자의 표정은 더욱 음험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껏 김독자가 해왔던 모든 일들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구하지 않고 메뚜기를 풀어버린 일.
금호역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으나 방치했던 일······.
누군가의 가장 악한 부분만을 모은 집합이, 세상에 새로운 김독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가 뜻을 이룬다면, 이 세계는 멸망할 뿐입니다.]
이윽고 화면은 「서유기」로 전환되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
이계의 신격들에게 둘러싸인 김독자가 시나리오에 갇혀 있던 ‘이름 없는 것들’을 해방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도깨비들의 연출 때문인지 더이상 설화 속의 김독자는 성스러워보이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이 세계를 부수기 위해 악마들을 해방하는 이단의 교주처럼 보였다.
[그는 모종의 방식으로 미래의 지식을 알아냈고, 그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스마트폰을 쥔 김독자가, 일행들에게 뭔가를 명령하고 있었다.
[그가 ‘구원의 마왕’이 되었던 것도, ‘빛과 어둠의 감시자’가 되었던 것도, 모두 계획 속에 이루어진 일일 뿐입니다.]
합심한 이야기꾼들이, 김독자의 지위를 ‘주인공’에서 악당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의 설화를 야비하고 비겁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움직입니다!]
그것은 분명 이야기꾼의 본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대도깨비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이야기꾼 또한 그들이 원하는 ■■이 있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이계의 신격’의 군주가 되어 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츠츠츠츠츳!
<스타 스트림>의 여론이 급변하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아스카 렌.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안나 크로프트가 무심히 그녀의 곁을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이미 늦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들이 돌격을 시작했고, 망설이던 성좌들도 전장에 합류했다.
가아아아아아아아!
고통스런 비명을 흘리는 ‘이름 없는 것들’과 성좌들의 선두가 부딪쳤다.
「김독자와 관계된 모든 존재들이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정희원은 그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김독자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김독자를 돕지 않아도, 김독자의 곁에서 싸우는 ‘이계의 신격’들은 많았다. 커다란 두족류의 괴물들. 아기의 몸통에 거대한 꽃을 머리로 단 외신들.
정희원이 우리엘의 힘을 빌어 전력을 다한다 해도 승산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서, 김독자는 정말로 이 세계선을 끝낼 대재앙처럼 보였다.
「정희원은 김독자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정희원은 김독자가 정말로 원하는 결말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고 생각해왔다. 자신이 원하는 세계의 끝을 김독자 역시 원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저게 진짜로 그가 원하는 끝은 아닐까.」
어쩌면 그에게 동료 같은 건 없었던 건 아닐까.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알고 있다. 우리엘이 하려는 말을, 정희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김독자가 동료를 아낀다는 것도, 너무나 아끼기 때문에 저런 행동을 벌였다는 것도 알고 있다.
김독자는 스스로의 생명을 희생해 일행들을 세계의 끝으로 보내려는 속셈일 것이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다.」
마치 눈앞에 거대한 벽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벽이, 김독자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고 있는 듯했다.
“대체······.”
원하던 결말을 갈구하기에, 정희원은 이제 너무 지쳐버렸는지도 모른다.
「김독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다.」
천천히 그러쥔 검의 그립이 차가웠다. 김독자가 직접 만들어주고, 손에 쥐어줬던 검. [낙원]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신념이 되어주었던 검.
[‘심판자의 검’이 울음을 터트립니다!]
‘악’이 근처에 있을 때만 우는 검이,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대도깨비들이 조롱하듯 선언했다.
[이것이, 이야기의 적 ‘김독자’의 알려지지 않은 진실입니다.]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로 당신은 내가 아는 ‘김독자’가 맞는지.
그리고 만약 당신이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과 같지 않다면.
「내 손으로, 정말 당신을 끝내도 되는지.」
“희원 씨.”
마치 그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 이현성이 그곳에 있었다.
“함께 가겠습니다.”
말 그대로 강철의 방패가 된 이현성이 길을 뚫고 달렸다.
별들의 파도를, 이름 없는 것들의 폭풍을 뚫고 나아갔다. 정희원이 확인해야 할 것이 있듯 이현성 또한 그럴 것이다.
몇 번이고, 다시 몇 번이고 확인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콰콰콰콰콰!
두 사람은 파도를 타듯 날아올라 순식간에 김독자의 후미까지 접근했다.
다른 외신들이 모두 전방에 몰려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희원 씨!”
그녀의 손등에 그려진 혼돈의 고리 때문일까. ‘이름 없는 것들’은 그녀를 발견하고서도 본체만체 앞으로만 밀려갈 뿐이었다.
거대한 빌딩처럼 우뚝 선 김독자가 그곳에 있었다. 새카만 진액이 뚝뚝 떨어지는 거체.
정희원은 자기도 모르게, 그 외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낯설었다.
언젠가 잠든 김독자의 손을 꾹 잡아본 적이 있었다.
귀환자로 돌아와, 일행들이 마련한 방에서 종일 기절해 있던 김독자의 손. 그 손의 감촉은 어땠던가.
그녀의 기척을 느낀 듯, 외신왕이 거대한 머리를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쿠구구구구구······.
거대한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새하얀 입김.
“김독······.”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희원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거대한 아가리가 그녀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시나리오의 개연성이 움직입니다!]
[당신의 모든 설화들이 경고합니다!]
거대한 외신왕의 검은 눈에 그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저런 표정은 짓고 싶지 않았다. 김독자를, 저런 눈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다르게 이미 손은 움직이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
[심판자의 검]이 다가오는 촉수를 베어냈다. 불구대천의 적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의 검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울컥, 하고 터져 나오는 촉수에서 설화가 흘러내렸다.
「“독자 씨, 그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죠?”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낫냐는 이야기라면, 그렇습니다.”」
그녀도 잘 아는 설화였다.
「“저도 그래요.”」
비틀거리며 그 이야기를 듣는다. 세상에서 김독자와 정희원만이 기억하는 그 이야기가, 그녀의 정신을 붙잡았다.
흐려진 눈앞을 걷어내자 주변의 정경이 보였다. 꽤 많은 촉수들을 베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별다른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김독자는 더욱 더 자라나 있었다. 이것이 고작 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김독자는 홀로 광활히 존재하는 하나의 벽 같았다.
【■■■■■■■■■■■■■■■■■■■■■■■■······.】
그 어떤 문장을 써넣어도 채울 수 없는 하나의 벽. 그 벽 앞에서 정희원은 절망했다.
[최후의 벽]이 다 무엇인가. 그녀는 겨우 한 사람의 벽조차 넘지 못하는데.
멀리서 이쪽을 향해 소리치며 다가오는 한수영이 보였다.
한수영이라면, 이 벽을 넘을 수 있을까.
―넌 작가라서 좋겠다.
<김독자 컴퍼니>의 휴일.
산 중턱에 드러누운 정희원은 한수영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좋기는.
―아니, 왜. 글 잘 쓰는 사람은 말도 조리 있게 잘 하잖아.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현성한테 연애편지라도 쓰게?
―그게 아니라.
정희원은 말없이 김독자 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만으로도, 한수영은 정희원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는 듯했다.
동료들 앞에서 쩔쩔매는 김독자. [노동자의 휴일]이라는 장난 같은 시나리오를 미련하게 수행하고 있는 사내를 보며, 한수영은 이렇게 말했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어.
정희원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한때 김독자였던 것을 바라보았다.
정희원은 한수영처럼 작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김독자처럼 성실한 독자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한수영처럼 쓸 수도, 김독자처럼 읽을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희원이 아무것도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건 아니었다.
―잘 쓰지 못하면 어때. 네 말마따나 넌 소설 쓰는 사람도 아니잖아.
분명 이 세계는 ‘멸살법’이라는 소설일지도 모른다. 어딘가의 작가가 쓰고, 누군가가 읽는 소설 속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소설은 삶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에겐 이 세계의 다음 문장을 쓸 자격이 있었다.」
천천히 검을 내린 정희원이 물었다.
“······독자 씨, 그때 기억하죠?”
김독자가 듣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다만 정희원은, 광활한 벽 위에 그녀가 낸 아주 작은 흠집 위로 손을 올렸다. 그 흠집 사이로 정희원과 김독자가 함께 거닐던 풍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장을 입고, 천국의 계단을 오르던 두 사람이 있었다.
“난 그때 되게 좋았어요. 같이 백화점 가서 옷도 사고, 멋지게 <에덴> 방문했을 때.”
그녀는 이 세계가 좋았다. 모든 게 멸망하고 있었고, 보이는 것은 폐허뿐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세계였기에, 정희원은 자신의 가치를 찾았다.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아. 이 세계가 더 좋다고. 우린 그런 사람들이잖아.”
김독자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희원은 촉수에 난 상처를 벌렸다. 그 상처를 잊지 말라는 듯, 그 상처만큼의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듯.
“그래서, 당신은 이렇게밖에 못하는 사람인 거야. 그렇지?”
정희원은 김독자를 이해했다.
「그녀가 김독자를 죽이지 않으면, 이 세계는 멸망한다.」
거대한 외신왕의 눈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뜻에 동조하듯 고개가 움직이는 것도 같았다. 정희원은 그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죽여.”
흐려진 시야를 그대로 둔 채, 몸을 떨었다.
김독자의 구원은 잔혹하다. 칼끝으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처럼, 그에게 구명 받은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웃기지 말라고 해······ 이게 무슨 구원이야······.”
정희원의 몸이 벽 앞에 기대듯 비틀거렸다.
아무도 서로를 구하지 않는 세계. 오직 피해자만이 존재하는, 심지어는 그 피해자들의 상처가 전시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녀에게 건네진 상처투성이의 손.
「김독자는 언제나 그곳에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손을 내미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손을 잡는 사람에게도 용기는 필요하다.
상처투성이의 손을 잡을 용기. 포기하지 않을 용기.
그것으로 자신이 치유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 손을 잡으면 더 커다란 상처를 입을 것을 알면서도, 다시 한번 살아가기 위해 그 손을 붙잡을 용기.
「어떤 구원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이에 의해 완성된다.」
꾹 짚은 외신의 표면에 정희원의 손바닥이 남았다.
정희원은 그 자국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자신의 검을 쥐었다.
그러자, 정희원의 귓가에 메시지가 들려왔다.
[화신 ‘정희원’의 ■■이 완성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녀는 마치 손을 잡듯 자신의 검을 굳게 쥐었다.
[당신의 ■■는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