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화

486화 4부 마지막 화 시나리오를 확인한 일행들은 얼빠진 얼굴들이었다. 너무나 쉬운 클리어 조건이었다. 지금껏 우리가 겪어온 어떤 시나리오보다도 더 쉬웠다. 우리는 그저 대도깨비의 말에 따라 방주에 탑승해, 이 세계선을 떠나기만 하면 된다. “독자 씨······.” [무엇을 망설이는 거지? 그대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시나리오는 없다.] 허공에서 떠들어대는 대도깨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많은 성좌들은 너희를 ‘씨앗’으로 선택하는 것을 반대했지. 그 별들의 흐름을 거슬러, 우리가 너희들을 선택한 것이다.] 파랗게 질린 입술을 깨문 비형이 그들의 사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야기의 왕’은 왜 갑자기 이런 시나리오를 제시한 것일까. 지금의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저들의 말을 들으면 일행들의 생존이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는 ‘최후의 벽’에 기록될 것이다. 그들이 증오했던 다른 설화들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일행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여러분.” 말문을 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쉬운 방법이 눈앞에 있었다. 이 방법을 선택하면, 내 작전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일행들은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계의 신격’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저 배를 타고 다른 세계선으로 넘어가서, 아무것도 없었던 일처럼 새로운 이야기를 살아가면 된다. 우리의 설화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선의 지배자가 되면 된다.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의 최고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편안하게 시나리오의 향락을 누리며,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독자 씨.” 눈이 마주친 유상아가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가 흔쾌히 큰 집을 살 수 있을까.」 이지혜가 [쌍룡검]에 매달린 키링을 굳게 쥐었고. 「웃으며 지혜의 졸업식을 축하해줄 수 있을까.」 신유승과 이길영이, 서로의 옷깃을 붙들었다. 「길영이와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고.」 「유승이와 함께, 한강에 가서 피자를 먹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유중혁이 나를 보았다. 「마치 벽에 적힌 낙서를 지우듯, 우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굴 수 있을까.」 이미 멸망은 일어났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죽은 아가레스와 메타트론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묵시룡의 재림을 없었던 일로 할 수 없고, 유중혁의 지나간 회차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이 모든 세계는, 이미 우리의 일부였다.」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김독자, 뭘 망설여?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잖아.” 어느새 다가온 이현성도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것처럼. “제 생각도 독자 씨와 같습니다.” 우리가 쌓아온 설화들이 우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겨질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구의 사람들. 어머니와 ‘방랑자들’. 우리의 이야기를 함께 했지만, 지금 이곳에 있지는 않은 존재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설화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제4의 벽’이 강하게 진동합니다!] 언젠가 ‘은밀한 모략가’는 말했다. 【다시 만날 때는, 네가 그 ‘벽’의 제대로 된 주인이 되어있길 바라지.】 장하영에게는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있고, 유상아에게는 석존에게 물려 받은 ‘윤회의 벽’이 있다. 아가레스와 메타트론은 ‘선악을 가르는 벽’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벽’은, 그 벽에 쓰여질 설화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제4의 벽]에 쓰여야 할 설화는 무엇인가.」 [제4의 벽]은 말했다. 내가 바로 ‘최후의 벽’의 마지막이라고. 「이 모든 설화의 대미(大尾).」 말문을 떼며 마지막으로 일행들을 보았다. 이것이 혹시나 틀린 선택이 아닌지 점검한다. 모른다.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독자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아저씨, 죽을 때는 같이 죽는 거야. 알지?」 「부끄러운 연명보다는 정의로운 최후가 낫습니다.」 일행들의 목소리가 내게 용기를 주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른 설화가, 내게 진언을 허락했다. [우리는 방주에 타지 않겠다.]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던 이야기의 마침표가 어렴풋이 보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도깨비들이 경직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세계선의 모든 성좌들이 오직 나 하나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시선들을 하나하나 감각하며 나는 아득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김독자는 ‘멸살법’에서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나는 ‘멸살법’의 모든 회차를 읽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기억했다. 하지만 그런 나도, 유일하게 읽지 못한 것이 있었다. 「에필로그」.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 내가 읽어 온 모든 설화들이 모이고 있었다. 하늘을 흐르는 성류들의 이야기가 이 세계선으로 집약되고 있었다. 멀리서 준동하는 성좌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그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대도깨비들이 묻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것 같은 얼굴도 있었고, 당황한 얼굴도 있었다. 사실 어느 쪽이든 중요하진 않을 것이다. 그들에겐 모든 것이 그저 ‘설화’일 테니까.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겐 <스타 스트림>의 뜻일 테니까.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마지막 ‘거대 설화명’을 제시합니다.] [당신은 제시한 ‘결’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 1. 멸망한 세계선의 방랑자 2. 절망한 별빛의 지배자 ······. + 우리가 완성한 마지막 ‘거대 설화’의 이름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결’의 선택지들을 바라보았다. 하나 같이 거창한 이름의 선택지였다. 「그리고 어떤 것도 그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을 수 없었다.」 [나는 너희가 제시한 설화명은 받아들이지 않아.] [성좌, ‘구원의 마왕’이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선택지를 거부하였습니다.] 츠츠츠츠츳!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결’은 완성하지 않겠다.] 허리춤에서 천천히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았다. 아마도 이 검을 처음 쥐었을 때부터 이 순간은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설화들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유중혁이 [흑천마도]를 뽑았고, 한수영이 왼손의 붕대를 풀었다. 정희원이 [심판자의 검]을 들자 이지혜가 [쌍룡검]을 겹쳐 쥐었다. 유상아가 연화대를 펼쳤고,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이 울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무장성채]를 펼친 공필두와, 그 성채의 꼭대기에서 초월좌의 격을 발산하는 장하영이 보였다. 모두를 보호하듯, 이현성이 내 앞에 섰다. 그들이 행동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이야기할 수 있었다. [너희들 중 누구도 이 세계선을 버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너희가 만든 이야기의 멸망을 제대로 봐라. 너희가 만든 세계가 어떤 끝을 맞이하게 되는지······ 똑똑히, 봐라.] 전신에서 폭발한 설화의 격이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타고 뻗어 나갔다. [멈춰라!] 대경한 대도깨비들이 움직여 내 격을 받아냈다. 나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설화의 파동을 날려 보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들의 행동에 반응합니다.] [<관리국>의 개연성이 발동합니다!] 몸 전체를 옥죄어오는 강렬한 스파크에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화신체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우리가 만든 모든 설화들이 포효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직 이름이 없는 당신의 거대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야기의 ‘결’을 결정하는 것은 그전까지 쌓아온 기와 승과 전이었다. 그것이 아닌 다른 무엇도, ‘결’을 결정할 수는 없다. 나는 눈앞의 스파크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눈부신 후폭풍의 파형 속에 던져 넣었다. [당신의 행동에 <스타 스트림>이······.] [정해진 ‘결’의 가능성이······.] [■?■■······■?■■?] 내 눈앞에서 정해진 활자들이 부서지고 있었다. 읽을 수 있었던 문장들이 부옇게 낀 먼지처럼 읽을 수 없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 먼지들이 걷혔을 때, 내가 본 것은 파괴된 방주의 선두였다. 콰아아아아아! 나도 알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야기의 왕’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혹부리들의 왕이 당신의 행동에 즐거워합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내가 내린 최선의 답이었다. 「원작에는 없었던 ‘결’을 찾을 방법.」 「뒤틀린 개연성을 해소하면서, 모두를 살려낼 방법.」 정해진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조로는 이 세계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 결국 기승전결이란 정해진 ‘끝’의 양식이다. 그것은 ‘최후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김독자는 주어진 ‘결’을 거부했다.」 세계에 거대한 파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당신의 행동으로 정해진 ‘시나리오’의 규칙이 붕괴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일부 플롯들이 붕괴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긴급 시퀀스가 발동합니다!] 주변의 풍광이 변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 나를 자신의 ‘결’에 끼워 넣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모든 것은 다시 시나리오가 된다.」 아마 대도깨비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혹은 알면서도 저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 거대한 ‘시나리오’ 안에서는 이야기꾼조차 그저 시나리오의 일부일 뿐이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행동을 기꺼이 여깁니다.] [<스타 스트림> 최후의 설화가 깨어납니다!] 시나리오에 벗어나는 시나리오도 결국은 시나리오인 것처럼. 하지만 모든 것이 결국 시나리오일 뿐이라면, 어떤 시나리오를 살아갈 것인지는 내가 선택할 것이다. 그러니까······ 잘 봐라.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독자 씨!” 주변에 서 있던 동료들이 나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찌릿거리며 변화하는 화신체. 내 화신체 위로 자라나는 불길한 배제의 감각. 나는 이것이 무슨 시나리오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막내야.] 눈앞에서 펼쳐지는 전장의 풍광. 우리의 맞은 편으로 성좌들이 소환되고 있었다. 우리의 적들, 우리와 함께 싸웠던 동료들도 보였다. 안나 크로프트. 중국의 페이후. 인도의 란비르 칸. 일본 연합의 아스카 렌.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 <황제>를 비롯한 거대 성운의 성좌들이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 아래에 현현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성좌들이 모이고 있었다.」 모이고 또 모인 별들이 우주 전체를 밝힐 듯 타오르고 있었다. 이 광활한 우주에 한점의 어둠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나를 비추고 있었다. 「그것은 <스타 스트림> 최후의 전장.」 츠츠츠츠츠츠츳! 이곳은 바로 1863회차의 유중혁이 싸웠던 그 ‘무대’였다. 들끓는 이계의 신격들, 그리고 ‘외신왕’과 맞섰던.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 싸울 적은, ‘외신왕’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성좌, ‘고려제일검’이······!] 깜빡이는 별들 속에서, 간접 메시지들이 들려왔다. 우리엘과, 흑염룡의 진언. 일행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눈자위를 가득히 채우는 혼돈의 감각에 현기증이 일었다. 먹먹해진 귀를 막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99 ― 이야기의 적> 분류 : 메인 난이도 : 측정불가?■ ■?■?■?!■?■?■■■■■■······. + 시나리오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내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시나리오에 실패하면 <스타 스트림>은 멸망한다는 것을. 그리고 잠시 후, 모두가 기다린 ‘클리어 조건’이 떠올랐다. 눈앞에 천천히 떠오르는 그 조건을 읽어 나가는 순간, 왜인지 모르게 ‘멸살법’의 문장이 떠올랐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일행들이 무어라 외치며 나를 보고 있었다. 멸살법의 작가는 말했다. 이 끔찍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세 가지 방법. 나는 생각한다. 「방법이 세 가지라고 해서, 세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일행들을 보며,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 클리어 조건 : ‘이야기의 적’, 외신왕 김독자를 살해하시오. + 마침내, 이 세계의 에필로그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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