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화
485화
“다들 준비 끝나셨죠?”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공기는 맑고 상쾌했고, 일행들의 표정도 어둡지 않았다. 그들의 복장이 전투복이 아니었다면, 어디 소풍 간다고 해도 믿을 만한 얼굴들이었다.
「그랬기에, 김독자는 순수하게 기뻤다.」
“준비야 진즉에 끝났죠. 그보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건 독자 씨 같은데.”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정희원이 내게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내가 잠시 생각하며 입술을 달싹이는 동안, 이지혜가 끼어들었다.
“난 그냥 안 들을래. 보나 마나 또 위험하니까 안 가도 된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할 거잖아.”
“그러게, 언제는 안 위험했다고.”
“이번에는 진짜입니다. 진짜로 위험하다고요······!”
내 성대모사라도 하는 듯, 이지혜가 나긋나긋 소리쳤다.
아니, 내가 언제 저런 식으로 말했다고······.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이번엔 진짜로······.”
“저 봐, 내가 저럴 줄 알았다니까. 백 코인 내놔요, 언니.”
침울한 얼굴로 동전을 내미는 정희원.
그 광경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한수영이 말했다.
“넌 학습이라는 걸 좀 해야 해.”
“뭔 학습.”
“그런 식으로 일행들한테 다짐받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번 그러면 사람들이 뭔 생각할 것 같냐? 아, 저 인간은 우리가 맹세한 것들을 아주 싸구려로 생각했구나. 지금껏 우리가 다짐했던 것들을 모두 거짓부렁으로 봤구나!”
“그런 생각으로 말한 건 아니었어. 여러분, 혹시나 오해하셨다면 진심으로 죄송······.”
이지혜에게 백 코인을 넘겨준 정희원이 물었다.
“근데 작전은 뭐예요? 어제 수영이랑 한참 짜는 거 같던데.”
“딱히 없습니다.”
그 말에 정희원이 의심스럽다는 듯 재차 고개를 들이밀었다.
“진짜?”
“지금까지와는 다르니까요. 이번에 있을 마지막 시나리오가 무엇일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이상한데. 뭔가 숨기는 거 있죠?”
“없는데요.”
[등장인물 ‘정희원’이 ‘거짓 간파 Lv.5’를 발동합니다!]
[당신의 발언이 거짓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어쭈, 이제 막 거짓말까지 하네.”
······[거짓 간파]는 또 언제 배운 거지, 젠장.
나는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당장 자세한 이야기를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말을 하면 뭔가가 틀어져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여러분들은 평소처럼만 하시면 됩니다. 어떤 시나리오가 찾아오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선택해주세요. 성공하기만 하면, 우리 모두 살아남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우리 모두’에는 독자 씨도 포함되는 건가요?”
나는 유상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시나리오 다 끝나고 큰 집에서 다 같이 살 수도 있는 거고요?”
“그렇습니다.”
“나 아직 졸업식 못했는데, 다 같이 졸업식도 와줄 수 있는 거지.”
“맞아.”
“형, 그럼 저랑 같이 PC방······!”
“갈게.”
[등장인물 ‘정희원’이 ‘거짓 간파 Lv.5’를 발동합니다!]
[당신의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의 표정에 안도가 스쳤다.
나는 일행들의 얼굴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유상아, 정희원, 이현성, 이지혜, 이길영, 신유승, 이설화, 공필두, 장하영, 한수영······.
“끝났으면 출발하지.”
그리고 유중혁까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두 다른 이야기들이 있었다.
여전히, 내가 모두 읽지 못한 이야기들이었다.
“출발해 아저씨. 아직 시나리오 진입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비장해질 필요 없잖아.”
이지혜의 말에 나 역시 동감이었다. 아직 마지막 시나리오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자, 창공의 높은 곳에서 포탈이 나타났다.
[‘99번 시나리오’로 통하는 포탈이 생성되었습니다!]
비형이 만든 포탈이었다.
“갑시다.”
우리는 포탈로 발을 내밀었다. 순식간에 주변의 경계가 무너지더니, 주변의 풍경이 재생성되었다.
뒤로는 드넓은 <스타 스트림>의 장관이, 앞으로는 우리를 기다리는 도깨비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 여기 전에 왔던 곳인데.”
‘게이트 오브 스타스트림’. 최종 관문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자, 모든 도깨비들의 총본산인 <관리국>의 본거지.
[<김독자 컴퍼니>. 입장 자격 확인되었습니다.]
“······이번엔 직통이네.”
도깨비들은 딱히 복잡한 절차도 없이 우리를 통과시켰다.
[절대다수의 성좌들이 당신들의 ‘마지막 시나리오’ 입장을 지켜봅니다!]
[다수의 성운들이 당신들의 업적을 몹시 부러워합니다!]
우주의 암흑 사이로 성좌들과 성운들이 우리를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의 등장에 긴장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성운이 최종 시나리오 지역에 입장하였습니다!]
다시 눈을 뜨자, 소용돌이치는 은하의 정경이 보였다.
수많은 별들이 환류를 거듭하며 오로라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이었다.
오래전 ‘신화급’에 도달한 별들, 혹은 그 존재의 가호를 받는 무리들.
그러나 별들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대신, 멀찍이 떨어진 고궁의 하늘 위를 소용돌이칠 뿐이었다.
“저거······.”
별들이 춤추는 거대한 고궁. 그 너머로 끝을 모르는 아득한 벽이 펼쳐져 있었다.
“저게 ‘최후의 벽’이에요?”
나는 그 벽을 응시했다.
오만한 벽이 마치 여기까지가 이 세계선의 끝이라는 듯, 모든 것의 전경으로 펼쳐져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곳에 기록되기 위해 존재했다.」
[‘이야기의 왕’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왕’이 당신을 호출합니다.]
전신의 솜털을 곤두세우는 찌릿한 감각. 느낄 수 있었다. 저 ‘벽’의 중심에, <스타 스트림>이라는 거대한 설화를 움직이는 존재가 있었다.
일행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시종일관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은 유중혁뿐이었다.
“성좌들이 보이지 않는군.”
유중혁의 말대로였다. 천공에 맴도는 별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직접 모습을 현현한 성좌는 단 하나도 없었다. 마치 우리가 올 줄 알고 모두 어딘가로 도망가기라도 한 것처럼.
대신 우리를 맞이한 것은 대도깨비들이었다.
[대도깨비 ‘허체’가 시나리오에 현현하였습니다!]
[대도깨비 ‘하롱’이 시나리오에 현현하였습니다!]
[대도깨비 ‘하람’이 시나리오에 현현하였습니다!]
[대도깨비 ‘호롱’이 시나리오에 현현하였습니다!]
[대도깨비 ‘녹수’가 시나리오에 현현하였습니다!]
하나하나가 드높은 격을 지닌 도깨비들이 한꺼번에 나타나자, 나로서도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왔는가, <김독자 컴퍼니>.]
일전에 우리를 영입하기 위해 <성마대전>에 난입했던 대도깨비 허체였다.
그는 굉장히 아니꼬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너희는 ‘마지막 시나리오’의 자격을 얻었다. 시험은 필요 없으니 ‘방주’로 들어가면 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지.]
“······방주?”
내 물음이 떨어지기도 전에 고궁의 중심에서 거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고궁의 중심부가 열리며 궁의 기저에서 뭔가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거대한 배.」
그 배를 보는 순간, 기시감이 뇌리를 스쳤다.
「성마대전에서 본 적이 있는 배였다.」
<성마대전>에서 우리를 구했던 배.
묵시룡과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격전에서 우리를 대피시킨 <에덴>의 방주도 저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 본 방주보다 훨씬 더 크고 견고해 보인다는 것.
마치 부서진 벽의 조각을 깎아낸 듯한 선체가, 희고 검은빛을 동시에 내뿜고 있었다.
그 선체를 보며 대도깨비 허체가 말했다.
[본래 이 세계선은 ‘최후의 세계선’으로 선택되었다. 하지만 도중에 일이 꼬이기 시작했고, 이번 세계선의 뒤틀림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다. 이 세계의 결말로는 ‘최후의 벽’을 열 수 없다. ‘가장 오래된 꿈’이 만족할 대서사시를 맺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무슨 헛소리지?”
[너희들은 ‘씨앗’이 될 것이다.]
씨앗. ‘멸살법’에서도 들어본 적 있는 말이었다.
그것은 ‘단 하나의 설화’의 모든 후보군을 총칭하는 단어였다.
먼 우주의 하늘에서 간헐적인 스파크가 거센 불꽃을 튀겼다. 뒤틀린 세계선의 최후를 암시하듯 불길한 소리였다.
굉음에 일부 휘말린 별들이 산화하며 흩어지더니, 이내 유성으로 떨어졌다.
그 유성을 보며 도깨비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영광으로 생각해라. 세계선을 망친 네놈을 ‘씨앗’으로 선택한 것은 ‘이야기의 왕’의 뜻이다. 너희는 ‘방주’에 탑승하여 새로운 세계선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계관을 구성할 핵심 ‘설화’로 거듭날 것이다. 지난 세계에서 넘어온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제야 그들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녀석들은 우리에게 탈출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너희는······ 그렇게 쉽게 이 세계를 포기하는 건가? 이 세계선을 버리고 모두 함께 떠나자고?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을 텐데. 너희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니까. 네 목적은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결말이 아닌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너는 성공했다 ‘구원의 마왕’. 너와 네 일행은, 이 세계선을 떠나 모두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먼 하늘의 건너편에서 우레 섞인 폭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관리국>이 지키는 개연성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뒤늦게 여러 가지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왜 주변에 성좌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관리국>은, 세계가 시작될 때부터 이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일 수 있었는지.
“······너희는 몇 번이나 이런 일을 반복해 온 거지?”
[그게 중요한 일인가?]
“방주에 타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선택받지 못한 존재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거냐?”
[묻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허체는 턱짓으로 우리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이지혜가 미리 소환해두었던 [터틀 드래곤]이 있었다. [터틀 드래곤]의 갑판 위에서 둥근 네 개의 봉인구가 반짝이며 빛을 토하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를 비롯한 이계의 신격들.
나는 봉인구 속에 잠든 원작의 인물들을 바라보았다.
시나리오에서 배제당한 존재는, 모두 죽거나 이계의 신격이 된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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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시나리오 # 99 ― 탈주>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성운의 동료들과 함께 ‘방주’에 탑승하시오.
제한시간 : 2시간
보상 : 당신들은 ‘방주’에 탑승해 다른 세계선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들의 ‘설화’는 새롭게 시작될 것이며, 당신들이 쌓아온 설화는 <스타 스트림>의 ‘최후의 벽’에 기록되어 영원히 전승될 것입니다.
실패시 : 당신은 멸망하는 세계에 남아 죽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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