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화
484화
유중혁의 어마어마한 선언에 군중들은 침묵했다.
언변에 넘어가지 않은 몇몇 연합 세력원들이 눈빛을 주고 받았지만, 이미 군중들의 열기는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다.
“패왕······.”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고, 이어서 기자들이 멋대로 헤드라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패왕 유중혁, 결사 항전 선언!」
「<김독자 컴퍼니> 공동대표 유중혁, “마지막까지 시나리오 포기하지 않을 것”」
그가 회귀자라는 소문을 들었던 화신들은 더욱 흥분하는 눈치였다. 누군가가 크게 소리를 질렀고 [공장]은 순식간에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패왕 유중혁!”
“유중혁! 유중혁!”
모든 이들이 유중혁의 이름을 연호했다.
조금 전까지 <김독자 컴퍼니>를 두고 빈정거리던 이들도 어느새 그 분위기에 휩쓸려 유중혁을 보고 있었다.
이걸로 모든 것이 괜찮아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초석은 닦은 셈이었다. 이제 ‘시나리오 이후’의 세계는 유중혁을 중심으로 뭉치게 될 것이다.
아마 똑같은 말을 했어도 나는 저만한 환호를 못 받았겠지.
내 멱살을 놓은 한수영이 유중혁 쪽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도 저렇게 좀 하지.”
동감이다. 하지만 저게 저 녀석 성격이니까.
한 번 시작된 연호는 끊이질 않았다. 유중혁의 이름부터 시작된 환호는 정희원으로, 이현성으로, 다시 이지혜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구원의 마왕’을 제외한 모두의 이름이 불리는 와중에, 일행들이 불편한 기색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들은 저런 환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이윽고 연호는 한수영까지 왔다.
“흑염마황 한수영!”
객석의 군중들이 무대 뒤의 한수영을 찾았다. 내가 말했다.
“네 차례야. 나가봐.”
한수영이 고개를 저었다.
“난 저런 거 질색이야.”
“관심받는 거 좋아하잖아. 아니냐?”
“그건 작가로서고, 한수영으로서는 아니라고.”
발꿈치로 바닥을 툭툭 치는 한수영은 시선을 아래로 고정한 채 인상을 찌푸렸다. 한수영이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자, 연호는 신유승의 이름으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커튼 너머의 회견장에서 손을 흔드는 일행들은 화려한 무대의 배우들처럼 보였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를 자랑스러워합니다!]
나는 그런 일행들을 보며 무심코 입을 열었다.
“한수영.”
“왜.”
“만약 이 세계가 소설이라면, 지금 우린 몇 권쯤 와 있을까?”
한수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답했다.
“글쎄, 그건 쓰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
하긴, 그렇겠지.
누군가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로 한 권을 쓰지만, 누군가는 100년 동안 있었던 일을 한 줄로 쓰기도 한다.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나라면, 못해도 지금쯤 20권을 돌파했을 거 같은데.”
“······기네.”
“길지.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길었다. 분명 긴 시간이었다.
20권이면, 분량으로 따져도 어지간한 대하소설급이다.
회견장의 하늘로 뉘엿뉘엿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왜인지 오늘은 해가 유독 빨리 저무는 것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한수영이 말했다.
“근데, 20권 정도면 하루아침에 다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있어.”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묻고 싶었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적당한 속도로 읽어온 걸까.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제대로 읽어왔다 말할 수 있을까.
“김독자.”
“왜.”
“넌 이 세계의 주인공도, 멋있는 등장인물도 아닐지 몰라.”
“······.”
“하지만 넌 열심히 읽었어. 내가 알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가 읽은 사람들이 지금 저곳에 있는 거야.”
한수영이 회견장의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대 커튼만 넘기면 닿을 수 있는 자리에 내가 아끼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이, 저 커튼 너머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군중들을 노려보는 유중혁이, 빙긋 웃는 정희원이, 방방 뛰는 이지혜가, 내쪽으로 손을 흔드는 신유승이······.
누군가가 저들의 이야기를 썼다.
내가 그것을 읽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나는 신유승을 향해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며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에 마지막 시나리오 지역으로 출발할 거야.”
*
기자 회견이 끝난 후, 일행들은 응접실에 모였다.
정희원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패널에 나오는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에이, 난 카메라 발은 진짜 안 받네.”
<김독자 컴퍼니>의 기자 회견으로 인해 한반도 뿐만이 아니라 <스타 스트림> 들썩이고 있었다.
―저는 당신들을 구할 생각이 없습니다.
화면 속에서 환한 얼굴로 선언하는 김독자를 본 정희원이 혀를 찼다.
“하여간 미움 받는 짓은 자처한다니까.”
“그래도 누가 좀 만져주니까 그럴듯해 보이네요.”
김독자의 메이크업을 담당한 이설화가 만족한 듯 주억거렸다.
이지혜가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독자 아저씨 인상이 좀 강해진 것 같지 않아요? 원래는 뭔가 뿌옇고 수제비 반죽 같은 느낌이었는데.”
“엇,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몇몇 사람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의 김독자는 많은 것이 다르다.
비단 인상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오랜 예전을 회상하듯 정희원이 중얼거렸다.
“솔직히 첨엔 말만 잘하는 쫌생이 같았는데.”
첫 번째 시나리오의 김독자와 마지막 시나리오의 김독자는 얼마나 다른 사람인 것일까.
일행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희원은 화면 속 김독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준비한 연설을 떠들 때면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나, 씩 웃을 때 묘하게 움직이는 입꼬리 같은 것.
그 모든 것들이, 그가 분명히 저곳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새삼스레 그 표정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정희원은 김독자의 설화에 관해 생각했다. 어쩌면 그들이 함께 만든 설화가 저 사람을 조금은 바꾼 것이 아닐까. 그런 거라면 정말 좋겠다. 저 사람이 우리를 바꾼 것처럼, 우리의 이야기도 그를 바꾼 것이라면.
“근데 독자 씨는 어디 있죠?”
“아마 마지막 시나리오 관련해서 준비하고 있을 거예요.”
“아저씨 설마 또 혼자 이상한 짓 꾸미는 건 아니겠지?”
이지혜의 말에 일행들의 표정에 한순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런 분위기를 쇄신한 것은 아이들을 양팔에 안은 채 빙긋 웃는 유상아였다.
“안 그런다고 약속했으니까, 이번엔 믿어보죠.”
화면 속의 김독자가 뭔가를 열심히 떠들더니 욕을 먹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 광경을 들여다보던 정희원이 패널 화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패널의 미지근한 감촉.
“······믿어도 되려나.”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것을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일행들 중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유승이 중얼거렸다.
“아저씨 피부 좋네요.”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김독자의 얼굴은 멀어 보였다.
*
나는 밤새도록 마지막 시나리오에 관해 생각했다.
‘멸살법’의 필요한 부분들을 발췌독으로 읽으며, 한수영과 [한낮의 밀회]를 나누기도 했다. [예상 표절]을 통해 우리에게 일어날 다음 전개를 예상하기 위함이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는 유중혁을 통해 ‘은밀한 모략가’와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밀한 모략가’는 결말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듯했다.
【네가 걸어가려는 길은 누구도 끝까지 가보지 않은 길이다. 다른 세계선을 참고하는 것이 지금의 네겐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녀석의 말을 이해했기에, 나는 그 이상 녀석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안나 크로프트는?”
“어제 한반도에서 ‘차라투스트라’들과 함께 철수했습니다.”
가능하면 ‘미래시’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기회를 놓친 듯했다.
쐐애액!
허공을 가르는 [흑천마도]의 칼날.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서 유중혁이 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매번 똑같은 자세로 보이는데도 녀석은 그 동작 하나하나에 큰 의미가 있는 양 검을 휘둘러댔다. 나로선 못 할 짓이었다. 어쩌면 저런 일이 가능했기에, 녀석은 그토록 많은 생을 거듭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젠장, 이런 망할 전개가······.”
한수영도 한수영 나름대로 마지막 시나리오의 전개를 알아내기 위해 내 옆에서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
아무리 [예상 표절]의 능력이 있다고 해도, 정말 전지(全知)한 것은 아니다. 그랬더라면 1863회차의 한수영도 그 고생을 하지 않았겠지.
나는 그런 한수영을 잠시 바라보다가 스마트폰을 켰다. 액정에 파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멸살법’의 순정 버전부터, 가장 마지막에 받은 ‘최종본’에 이르기까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최종본).TXT
나는 한참이나 최종본 파일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스마트폰을 껐다.
지금까지 잘 지켜온 결심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김 독자」
고개를 들자, [제4의 벽]이 나를 불렀다.
‘왜.’
「힘 들어?」
뜬금없는 문장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녀석을 잊고 있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나와 가장 오래 함께한 녀석은 바로 이 ‘벽’일 텐데.
‘안 힘들어. 네가 있잖아.’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제4의 벽] 덕분이었다.
녀석이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내 정신 충격을 완화해주지 않았더라면, 무수한 위기 속에서 육체적 고통을 경감시켜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진즉에 시나리오의 고혼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츠츳, 츠츠츳.
마치 작은 아이가 몸을 들썩이는 것처럼 허공에 스파크가 튀었다.
짧은 순간 스파크 위로 의기양양한 어린애의 표정 같은 것이 떠올랐다.
「엣 헴, 혹 시특 성창 보고 싶 어?」
이 녀석은 내가 시도 때도 없이 특성창만 보고 싶어하는 줄 아나.
‘아냐. 지금은 됐어.’
그걸 본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보다,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뭔 데?」
사실은 오래전부터 물어봐야 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기에 나 혼자서 이렇게 저렇게 가설을 쌓아 놓고 있던 질문.
「‘최후의 벽’이라는 건 정확히 뭐지?」
[제4의 벽]은 잠시 말이 없었다. 어쩌면 또 말을 돌리거나 필터링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모 든 이야 기 가 쓰 여있 는 벽」
······‘마지막 시나리오’가 코앞이기 때문일까.
여전히 아리송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제4의 벽]도 내게 정보를 숨길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질문을 바꿀게. 너는 대체 뭐지? 벽의 파편이란 건 대체 왜 존재하는 거야?’
「소 중한 테 마를지 키는 것 그게 벽 의 임 무」
순간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장하영을 지키던 ‘불가능한 소통의 벽’. 생각해 보면 장하영뿐만이 아니었다.
‘멸살법’에서 중요한 인물들은 늘 그런 ‘벽’을 가지고 있었다.
석존에게는 ‘윤회의 벽’이 있었고, 아가레스와 메타트론에게는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있었다.
「테 마는 하나 가 아니 니 까」
「하 나 의 설 화는 수 많 은 이 야기 의 집 합」
[제4의 벽]은 ‘최후의 벽’의 파편이었다. 그리고 파편이라는 것은, 다시 끼워 맞출 수 있는 조각을 의미한다.
순간,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만약 정말 그런 것이라면. ‘벽’이라는 것이, ‘설화’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츠츠츠츠······.
눈앞의 허공에 [제4의 벽]의 모습이 일렁이고 있었다. 수많은 책장으로 이루어진 도서관이 어른거렸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책들의 활자가 흩어졌다.
대신 그곳에 나타난 것은 아주 오래되고 낡은 벽이었다. 선사시대의 암벽 동굴을 연상시키는 ‘최초의 벽’.
나는 그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추위로부터, 고통으로부터, 트라우마로부터 나를 보호해준 벽.
예로부터 벽이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마 지막 설 화를 준비 해 야해 김독 자」
인간은 언젠가부터 그 벽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은 설화(說話)가 되었다.
「네가, 그 마지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