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483화 내 선언에 군중들이 들썩였다. 기자들은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렀고, 각종 채널에 이 상황을 보도하던 하급 및 중급 도깨비들도 경악한 얼굴들이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발언을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대도깨비들이 당신의 발언을 경청합니다.] [<관리국>의 모든 도깨비들이 당신의 언행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김독자 대표님! 성좌와 화신, 그리고 도깨비들이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는 건 그야말로 굉장한 일이었다. 나는 친절한 미소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당신들을 구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습니다.] ―지금 한국을 버리겠다는 겁니까? ―그럼 지금껏 당신을 지지해준 화신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지지라. [어떻게 지지해주셨는데요?] 파란은 순식간에 번졌다. 내 의뭉스런 말투에 기자들이 너도나도 일어서서 소리쳤다. 과연, 언론의 힘은 ‘신화급 성좌’의 격에 대항할 만큼 대단했다. ―<김독자 컴퍼니>의 독재를 묵인해준 게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지금까지 모두가 당신의 뜻에 따랐지 않습니까? 독재를 묵인한다······.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먼저 반응한 것은 성좌들이었다. [일부 성좌들이 기자들의 발언을 비웃습니다.] [한반도의 오래된 성좌들이 개탄합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후예들을 노려봅니다.] 이게 독재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뭘 묵인해준 적이 있는지나 모르겠다. 지금도 폐허가 된 여의도에서 매일같이 <김독자 컴퍼니> 반대 시위가 벌어진다는데. 나는 여기저기서 소리치는 기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제 뜻이 뭔데요?] ―그건······! [지금까지 제가 한 번이라도 뭘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까?] 순간 기자들이 입을 다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깨비들은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이것조차도 재미있는 설화일 것이다. 저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땅을 버리는 장면일 테니까. 한순간 혼란에 빠진 기자들을 구한 것은 [공단] 한 측에 대기하고 있던 화신의 무리였다. ―강한 힘을 가진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의무가 발생하는 법이네. 자넨 지금 그 의무를 땅바닥에 내던진 거야. 대뜸 앞으로 나선 노인은 후줄근한 모자를 덮어쓴 채 그렇게 말했다. 구부정한 챙 아래로 빛나는 음습한 눈동자. 기억이 바로 떠오르진 않았지만, ‘멸살법’에서도 나오는 조연이었다. 뒤쪽에서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저 할배가 여기까지 나타나?” 보아하니 부산 쪽 연합원인 모양이었다. 우리가 한반도를 떠나 있던 사이 새로 연합을 장악한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뒤쪽으로 보이는 전우회의 깃발과 파란색 헤어밴드를 쓴 무리들. 그 무리의 좌우로 늘어서 있던 지방 연합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구원의 마왕, 당신에게는 강자의 의무가 있다. 당신은 한반도에서 활동 중인 유일한 ‘신화급 성좌’ 아닌가? 누군가는 내 의무를 역설했고. ―부디 한반도를 버리지 말아 주시게! 당신이 그렇게 나오면 이 땅의 불쌍한 국민들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 누군가는 내 동정심에 호소했다. ―마지막 시나리오를 우리와 함께해주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모두가 마땅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어! ―이들 중 누구도 ‘시나리오’를 원한 사람은 없어! 당신은 무고한 이들 모두를 버리겠다는 건가? 그러고도 네가 한반도의 성좌라 할 수 있는 거냐!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말은 옳았다. 우리 중 누구도 시나리오를 원한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그랬었다. [연합의 수장분들도 와 계시니 마침 잘 됐군요.] 그런데, 지금도 그럴까. [제가 묻고 싶습니다. ‘마지막 시나리오’가 올 때까지, 당신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한 겁니까?] 그 말에 연합원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당신이 없는 한반도를 보호하고······! ―연합의 노고를 무시하는 건가? 당신이 없는 동안 한반도를 지킨 건 우리야!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안다. 몇몇 연합원들이 기자들과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보였다. 「기사 내보내. ‘구원의 마왕’ 한반도 포기 선언.」 아마 그들은 여론을 선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구원의 마왕’, 마왕의 본색을 드러내다.」 물어보지 않아도 떠오르는 헤드라인들.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는 알고 있다. 「쫄 필요 없어. 구원의 마왕도 결국 인간이야. 그냥 한국인이라고.」 「이곳에서 태어난 이상, 거역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지.」 「아무리 강한 힘과 명성을 가져도······.」 그들은 시스템을 믿는다. 인류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민주주의」라는 이야기를, 혹은 「합리주의」나 「제도」, 「다수결」이라는 설화를 믿는 것이다. [오래된 설화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보인다.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누구도 갖지 못한 설화들. <스타 스트림>이 도래하기 전에도 지구는 거대 설화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설화를 믿는 이들은, 이번에도 자신들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연합원들이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애초에 시나리오를 독점한 건 <김독자 컴퍼니> 아닌가! 이런 불공정경쟁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공단’은 늘 열려 있었을 텐데요. 우리가 얻은 스킬이나 설화들은 모두 공개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먼저 시나리오에 진출했기 때문에······! [해외에는 시나리오에 늦게 뛰어든 이들이 많습니다. 페이후나 란비르 칸의 사단 중에는 고작 몇 달 전 시나리오에 뛰어들어 후반부 시나리오에 진입한 이들도 많아요.] ―그건 해외 사정이고, 이쪽은 상황이 다르잖아! [그들에겐 ‘공단’이 없었습니다. 지원도 극소수에게만 집중되었고요. 하지만 서울은 어땠습니까?]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비유가 패널을 만들었다. 거대한 패널에 [공단]의 내부 정경을 찍은 화면이 떠올랐다. [하위 시나리오의 공략법도 공개했고, ‘거대 설화 시나리오’의 목록들도 공지했습니다. 시나리오에 열심히 참가하는 이들에게는 특별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성별, 나이, 인종. 어떤 것에도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원한 건 우리와 함께 싸워 줄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으니까요.] 화면 속에서 훈련을 반복하는 화신들이 보였다. 그들을 통제하는 어머니의 모습. 교관으로 활동하는 조영란과 이복순의 얼굴도 보였다. 그렇게 필사의 훈련을 마치고, 설화를 얻어 이 자리에 온 이들. [바로 당신들 눈앞에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나를 둘러싼 회견장의 중심부를 지키고 있는, 강건한 기세와 웅혼한 격을 가진 화신들. 바로 어머니가 키운 ‘방랑자들’이었다. 어머니를 도와 동해의 해일을 막아냈던 영웅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여러분들 중 이들보다 못한 지원을 받은 이가 있습니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코앞에서 뿜어내는 ‘방랑자들’의 패기에 모두 압도되어버린 것이다. 주춤거리며 입술을 깨물던 사람들이 외쳤다. ―우리라고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야!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제도와 시설을 정비하고, 그리고 당신이 시나리오를 끝내고 오면 다시 제대로 국가를 꾸릴 준비를······. [왜 그런 준비를 했죠? 앞으로 다가올 ‘결말’이 뭔지 알고?] ―뭐? [이 세계의 ‘결말’이 왜 평화로울 거라 생각하지?] 이 세계는 ‘멸살법’의 그것과는 많이 바뀌었다. 유중혁도, 이현성도, 이지혜도, 신유승도. 모두가 내가 알던 이들과는 조금씩 달라졌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유중혁이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길 바랐다.」 사람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고 있었다. 끝끝내 믿었던 희망에게 배신당한 얼굴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정말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길 바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군중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의 평화가 아니라 ‘각자의 평화’였다. 그들은 분명 지옥 같은 시나리오를 겪었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런 시나리오를 겪은 사람은 절대로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겪어온 지옥조차 이제 그들의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나리오만 끝나면 돼. 이젠 나도 힘이 있어. 적어도 화신들 사이에서는 이제 갑이 될 수 있는 위치라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내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는데······.」 「<김독자 컴퍼니>만 없으면······.」 무수하게 들끓는 욕망 속에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회견장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연합원들, 그리고 기자들보다 더 먼 곳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이들이 있었다. 꾀죄죄한 옷과 장비. 전신에 흙먼지를 묻힌 평범한 화신들이 그곳에 있었다. 작은 소녀의 모습도 보였다. 시나리오 초기의 신유승 정도나 될법한 키.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 여겨질 정도로 어린 소녀. 카메라도 채널도 외면한 그곳에서, 소녀가 오직 나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는 이제 다 죽는 거예요?」 쏟아지는 셔터 사이로, 나는 그 어린 소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영웅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당신들 모두를 살릴 생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은 없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다른 ‘대표’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죠.] 그곳에 유중혁이 있었다. * 잠시 후, 나와 한수영은 무대 뒤에서 유중혁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녀석이 생각하는 결말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내게도 내가 생각하는 세계의 결말은 있다. 평소에는 “죽인다 김독자” 정도의 말만 지껄이는 놈이지만, 막상 말을 시작하면 그럴싸한 연설을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유중혁이 괜히 주인공은 아니니까. 레몬 사탕을 문 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한수영.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언제까지 내가 전면에 나서서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잖아. 저런 건 유중혁이 더 잘 어울려. 원작에서도 그랬고.” 실소하는 한수영을 보며 나는 덧붙였다. “보다 확실한 구심점이 필요해. 저런 건 내 역할이 아니야.” “네가 할 수도 있었지.” “이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지. 난 주인공이 아니라 독자잖아.” “얼씨구, 이제 와서?” 나는 등 뒤로 손을 감춘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역시 성좌가 된 김독자도 김독자이긴 한 모양인지,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언제든 카메라 앞에 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게 네가 생각한 ‘제대로 된 결말’이야?” “그 시작이지.” “이다음은 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야.” 성큼 다가온 한수영이 까치발을 들고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너 내 소설 읽어주기로 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어?” “약속했잖아. 잊었어?” 이글거리는 녀석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언젠가 나눴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맞다. ‘카이제닉스 제도’를 나오며, 한수영이 그런 말을 했었다. 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면 소설을 쓰고 싶다고. 그때, 자신의 소설을 읽어달라고. “그거 진심이었냐?” “그럼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 눈이 좀 까다로운데, 괜찮겠어?” “눈이 까다로운 놈이 멸살법 같은 걸 10년이나 읽어?” “악플 같은 거 달 수도 있어. 개연성 없다고 지적할지도 모르고, 하차한다고 댓글 쓸지도 몰라.” “해 봐. 어떻게 되나.” 나는 한수영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나를 보는 견고한 눈빛. 맞다. 한수영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맨날 연참하라고 독촉할 수도 있어.” “아무 문제 없어. 하루에 열 편씩 쓴 적도 있으니까.” 그렇게 멱살을 잡은 채 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자니, 어쩐지 현실감이 옅어졌다. 처음 이 녀석을 보았을 때만 해도, 동료가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다. 한수영. ‘선지자들의 왕’이었던 사람. ―살려야 할 사람과 죽어도 괜찮은 사람을 구별하던 적이 있었다.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누구는 죽어야 하고, 누구는 살아야 하고. 줄곧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것이 이 세계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연설을 들으며, 한수영도 나도 말을 멈췄다. 한 번도 직접 밝힌 적이 없던 유중혁의 속마음. ‘멸살법’에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던 녀석의 내면을 들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멸살법’의 주인공이 말하고 있었다. 녀석의 등 뒤로, 우리가 살아온 회차의 설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지나간 세계를 잊지 않는 존재. 아득한 과거에 배신당하고 상처받아온 주인공. ―지난 생에서는 악이라 믿었던 자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아스모데우스와 싸우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2회차에서 치열한 싸움 끝에 죽음을 맞이하는 유중혁. ―나를 배신했던 이와, 또다시 같은 전선에서 싸우기도 했다. 묵시룡에 맞서며 우리를 돕는 안나 크로프트. 유중혁은 한참이나 그 설화들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들을 용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생을 통해 그들에게 복수할 생각도 없다. 이번 생은 나의 지난 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더 이상 너희들이 알고 있는 세계가 아닌 것처럼. 사람들이 유중혁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회귀자도 주인공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뭔가를 이해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살아남았다 하여 모든 것이 너희에게 허락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너희에겐 책임이 있다. 살아남은 죄.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짓밟고 살아남은 죄. 다른 이들의 설화를 비료로, 감히 줄기를 피우고 싹을 틔운 죄. 그러니 살아남았다면 그 죄에 책임을 져라. 그 말을 이해하는 이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모두 압도된 얼굴들이었다. 시나리오의 최전선에서 성좌들을 베며 살아온 인간의 말. 친절한 위로도 따스한 격려도 아닌 말이었지만,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말이었다. 나 같은 성좌의 진언보다 훨씬 더 진정성 있는 목소리였다. ―모두를 살리겠다는 약속 같은 건 할 수 없다. 나는 그저 내 시나리오를 살아갈 뿐이고, 너희의 시나리오를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하나 뿐이다. 저곳이, 유중혁의 자리였다. ―너희 모두의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나 역시 죽거나 회귀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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