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화
475화
강풍에 흩날리는 코트. [흑천마도]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오는 아득한 격.
한수영은 분명 그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일까. 그 순간 한수영의 눈에 그는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유중혁 맞아?”
유중혁은 이쪽을 흘끗 보더니 태평양 쪽으로 굉음을 내며 돌아섰다. 당황한 한수영이 외쳤다.
“야! 어디가!”
【쫓아라!】
그런 유중혁의 뒤를 999회차의 우리엘과 김남운이 쫓았다.
한수영은 유중혁의 의도를 깨달았다.
유중혁은 지금 저 ‘이계의 신격’들을 일행들로부터 떨어트리려는 것이었다.
“저 미친 자식이······.”
“수영 씨. 괜찮아요?”
다가온 유상아가 한수영을 부축했다. 그 어깨에 기대는 순간, 한수영은 역류한 피를 한 사발 토해냈다.
“웨에엑!”
머릿속의 모든 혈관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웠다. 전두엽을 지져버릴 듯 타오르는 스파크. 한수영은 고통을 참아내며 외쳤다.
“제천대성! 하데스! 우리엘! 빨리 유중혁 쫓아가! 여긴 나머지로 막을 테니까, 빨리! 저놈 혼자 상대하게 두면 안 돼!”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설화를 감지합니다.]
[당신은 개연성에 어긋나는 힘을 사용했습니다!]
“컥······.”
시야가 한바탕 어지럽게 흔들렸다. 내장이 모조리 뒤집힌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당신의 화신체가 후폭풍에 휘말립니다!]
자신의 내부에서 강대한 힘이 폭발하려는 것을 감지한 한수영이 외쳤다.
“유상아! 떨어져!”
하지만 유상아는 오히려 한수영의 어깨를 꾹 쥔 채 고개를 흔들었다.
어깨에 맞닿은 손으로 유상아가 계승한 석존의 힘이 전해지고 있었다. 시공간이 뒤틀리며, 후폭풍의 성장세가 조금 늦춰졌다.
“버텨. 할 수 있어. 나도 이겨낸 적 있으니까.”
“빌어먹을······.”
전신의 근육이 신음하고 있었다. 끔찍한 통증 속에서 희미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지금껏 개연성을 조심한다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린 주제에, 이제와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김독자 같은 녀석도 살아남았으니 이 정도는 어떻게든 될 거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츠츠츠츠츳!
······이대로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후폭풍의 기미가 조금씩 줄어든 것은 그때였다.
한수영은 자신의 화신체가 활자들로 덮이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썼던 문장들이었다. 김독자나 유중혁에게 들키지 않도록 그녀가 수첩에 남몰래 기록해 둔 문장들. 그 문장들이, 팔랑거리는 수첩의 페이지 너머로 흘러나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개중에는 그녀가 쓰지 않은 문장도 있었다.
「너도 나라고 글솜씨는 봐 줄 만하네.」
절반의 조소와 절반의 만족감이 뒤섞인 목소리.
[설화, ‘예상표절’이 당신의 후폭풍을 대신 감내합니다.]
츠츳, 츠츠츳······.
개연성의 후폭풍이 줄어드는 만큼, 활자들이 빠르게 흩어지고 있었다.
한수영은 묻고 싶었다. 이 문장들은, 너는 대체 뭔지.
하지만 한수영에겐 질문을 던질만한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까진가. 김독자에게 전해.」
[당신의 설화에 깃들어 있던 다른 세계선의 잔재가 소멸하기 시작합니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녀의 설화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녀석이 바라는 ‘결말’에 있는 것은······.」
*
나는 이지혜를 부축한 채 두 명의 ‘이계의 신격의 왕’을 바라보았다.
같은 회차를 살았고, 똑같은 세계의 끝을 보았음에도 서로 다른 존재가 된 두 사람.
[거대 설화, ‘영원한 수평선의 방랑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슬픔을 봉인한 심장’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허공에서 튀는 스파크 사이로 설화의 절단면이 내비쳤다.
그들의 피로 한 줄 한 줄 쌓아 올린 이야기. 내가 몇 번이고 읽었던, 가장 좋아하는 회차의 이야기였다.
「“유중혁 대장. 당신이 회귀자여서 다행입니다.”」
‘은빛 심장의 왕’이 흘끗 내 쪽을 돌아보았다.
999회차의 이현성. 그의 설화가 가둔 슬픔이 [독해력]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슬퍼하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당신은 죽지 않잖습니까. 죽어도, 다음 회차에서 다시 우리를 만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당신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고······ 당신은 다시 한번 그 여정을 시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강철의 설화가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이현성.”」
가르륵, 거리며 돋아난 강철들이 그의 말을 삼켰다. 은빛으로 물든 그의 동공이 흘러야 할 눈물을 굳히고 있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대장보다 먼저 결말을 볼 테니까요. 당신이 보고 싶었던 끝도, 지키지 못한 약속도, 하나도 빠짐없이 제가 안고 갈 겁니다.”」
999회차의 이현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아는 이현성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분명 이현성이었다.
―당신은 그를 몹시 닮았습니다. 내 배후성에게 이야기를 들은 것보다도 더.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999회차 이현성의 목소리.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그가 온화하게 웃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저런 비극을 겪으며 생을 견뎌낸 사람이, 어떻게 아직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그러니 당신을 죽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가 우리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우리 편을 들어줄 거라는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강철의 주인’은 소멸하며 그에게 대체 어떤 설화를 전한 것일까.
【현성 아저씨.】
흐름을 끊은 것은 999회차의 이지혜였다.
【나를 그렇게 불러주는 건 오랜만이구나.】
【여기서 당신을 해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비켜.】
유구한 두 개의 설화가 얽힌다. 늙은 추억을 회상하듯 이현성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대체 왜 막는 거야? 아저씨는 ‘재앙’으로 소환되길 거부했잖아. 이쪽 세계선의 관리국과 협상한 건 당신이 아니라 우리라고.】
······999회차의 존재들을 재앙으로 부른 것은 역시 관리국이었나.
잠시 침묵하던 이현성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스타 스트림>과는 협상하지 않는다. 그게 우리의 맹세였지.】
【그래서, 그 맹세의 결과로 우리가 어떻게 됐는데?】
【······.】
【관리국을 부수고, 도깨비 왕과 싸우고. ‘최후의 벽’에 부딪쳐서······ 우리가 어떻게 됐냐고.】
최후의 벽. 이들 역시 그 벽을 본 모양이었다.
원작의 유중혁이 도달했던 바로 그 ‘벽’을.
부르르 떨던 999회차의 이지혜가 말했다.
【당신 말대로 우리 이야기는 끝났어. 우리가 살던 세계선은 멸망했고, 그 멸망을 견디고 ‘이계의 신격’이 된 것은 우리 넷뿐이야.】
【시나리오 밖의 존재가 되어서라도, ‘최후의 벽’을 넘기로 했었지.】
【그건 우리가 넘을 수 없는 벽이야.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
【이 세계선에서는―】
【이 세계선 타령도 그만둬! 이 세계선이 뭐가 특별하지? 여기도 우리가 살던 곳과 같아. 멸망할 세계선이라고.】
내가 부축하던 이 세계선의 이지혜가 비틀거렸다. 그녀의 입술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에게 접선한 대도깨비 놈들도 말했어. 이 세계선도 버릴 거라고. 재활용해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쓸 거라고.】
그 말에 ‘은빛 심장의 왕’의 표정도 변했다. 이제껏 온화하던 기류가 흐트러지며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번져왔다.
강철의 입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관리국과 무슨 거래를 한 거지?】
【이곳도 어차피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릴 세계라면, 우리가 직접 멸망시켜도 상관없는 거잖아.】
【지혜야.】
999회차의 이지혜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을 정말 ‘웃고 있다’고 쓸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곳의 ‘도깨비 왕’이 약속했어. 이 세계선만 멸망시키면, 우리 세계선을 다시 재생시켜 주겠다고. ‘가장 오래된 꿈’과 접촉해서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이지혜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나 역시, 그 떨림을 공유하고 있었다.
저것이 999회차의 존재들이 이 세계로 온 이유였다. 다른 세계를 파괴하면서까지, 그들이 되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은빛 심장의 왕’이 말했다.
【우리의 사명은 우리의 세계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비극의 진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다.】
【찾아내면 뭐가 달라져?】
【대장의 뜻을 이루려면―】
【비극의 원인을 제거해도,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 죽은 동료들은 돌아오지 않아. 우리가 살았던 세계는 돌아오지 않아. ······그곳에서 죽은 999회차의 유중혁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쿠구구구구.
멀리서 수평선을 찢으며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모두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어.】
한풀 꺾였던 해일의 기세가 다시 상승하고 있었다.
황급히 [강철화]를 전개한 999회차의 이현성이 자신의 금속으로 우리를 보호했다.
하지만 해일의 세력은 강철이 자라나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당신은 막을 수 없어. 말했잖아. 나 혼자 온 게 아니라고.】
콰콰콰콰콰!
뒤쪽에서 붉게 물든 석양이 하늘을 불태우고 있었다.
999회차의 우리엘. ‘살아있는 불꽃’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은······.
“아저씨. 설마······!”
이지혜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나는 그런 이지혜의 눈을 바라보며 말해주었다.
“걱정 마. 네가 걱정하는 일은 절대 없어.”
그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우리 이야기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성좌, ‘빛과 어둠의 감시자’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구원의 마왕과 빛과 어둠의 감시자. 거기에 긴고아를 착용하게 되며 얻은 세 번째 수식언까지. 내 모든 설화들이 동시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 앞을 막아선 이현성에게 다가갔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무리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위험합니다. 제 뒤로 숨지 않으시면―】
“여긴 999회차가 아닙니다.”
앞쪽에는 ‘가라앉은 섬의 주인’. 뒤쪽에는 ‘살아있는 불꽃’. 이제 우리가 달아날 곳은 없었다.
거대한 전함의 그림자가 눈앞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 해일의 꼭대기에서, 999회차의 이지혜가 방언처럼 중얼거렸다.
【모두 돌아가는 거야. 대장이 그랬듯이, 우리도 그때로 회귀하는 거야.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러면―】
밀려온 해일이 우리를 덮쳤다. 나는 ‘거대 설화’의 힘으로 그 격을 받아냈다. 해일을 받아낸 양손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넘실대는 포화의 전경 너머로 태양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이 보였다.
아무리 달려가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경계.
콰아아아아아!
그 경계가 눈앞에서 갈라졌다. 한 자루의 검이 경계를 베고 있었다.
파도의 권좌에서 추락하는 999회차의 이지혜가 이쪽을 보았다.
정확히는, 내 곁에 선 사내를.
“회귀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걸 깨닫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