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화

474화 한수영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믿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초월좌들이 추락했고, 명계의 심판관들이 줄줄이 나가떨어졌다. “물러나 한수영!” 까가강, 하는 소리와 함께 앞을 막았던 정희원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짓궂은 미소를 띤 사내가 장난이라도 치듯 자신의 설화를 뭉게뭉게 발출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망상설계(妄想設計)’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위대한 심연의 군주. 999회차의 김남운의 전신에서 [흑염]의 아우라가 뻗어 나왔다. 아우라는 곧 머리가 여럿 달린 용의 형상을 이루었다. 형상의 아가리가 벌어지더니, 뒤이어 파괴적인 격류가 모든 방위를 뒤덮었다. 콰아아아아아아! “유승아! 길영아!” 폭발하는 [흑염]의 연쇄에 아이들이 휘말렸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간 유상아가 전장에서 이탈하면서, 999회차의 우리엘을 구속하고 있던 시공간 디버프가 약해졌다. 고오오오오! 잠깐이나마 위축되어 있던 999회차의 우리엘이 힘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999회차의 김남운이 킬킬 웃었다. 【이거, 내가 안 도와줬으면 어쩔 뻔?】 【닥쳐라. ‘은밀한 모략가’를 찾으면 다음은 네놈 차례다.】 무시무시한 눈길로 김남운을 쏘아본 999회차의 우리엘이 전장을 향해 [업화의 불꽃]을 휘둘렀다. 그녀를 맞상대하는 것은 제천대성이었다. 화려하게 움직이는 여의금고봉이 그녀의 검세를 받아내고 있었다. 무려 ‘이계의 신격의 왕’과 대등한 격전을 펼치는 제천대성을 보며 김남운이 감탄했다. 특히 그의 주목을 끈 것은 제천대성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새카만 기운이었다. 【혼돈의 격? 저 녀석도 ‘이계의 신격’이 된 건가?】 【······정확히는 그의 분체 중 하나가 이계의 신격화된 것 같다.】 【하하하, 뭐야 이거. 뭐 어떻게 된 세계선이야?】 【그는 내가 상대한다. 네놈은 잡배들과 명왕을 맡아라.】 【쳇, 나도 모처럼 대성이랑 한번 싸워보고 싶은데 말이지.】 들려오는 헛소리에 분개했는지, 제천대성이 기합과 함께 자신의 마력을 퍼부었다. 허공을 뒤덮는 황금빛 아우라가 한순간 [흑염]의 공세를 걷어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의 전신에 치명적인 후폭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길, 미후왕! 제대로 해라!] 아무래도 일시적으로 합쳐진 제천대성의 설화들이 충돌을 일으키는 모양이었다. 퍼붓는 999회차 우리엘의 공격에 조금씩 물러서는 제천대성. 마지막 보루였던 신화급 성좌들이 밀리고 있었다. 심지어 하데스 쪽은 상황이 더 나빴다. 콰과과과과! <올림포스>의 견제 때문인지 아니면 <명계> 내부의 사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데스의 전투는 어딘가 신통치 않은 데가 있었다. 【하하하! 무려 올림포스의 삼신인 ‘명왕’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인상을 쓴 채 묵묵히 사이드를 휘두르는 하데스가 수세에 몰리자, 그의 뒤에서 거대 설화를 이야기하던 페르세포네가 끼어들었다. [그거 알고 있나요? 이 세계선의 당신 영혼은 명계에 갇혀 있어요.] 【뭔 헛소리야? 내가 명계에 왜 갇혀?】 짜증을 부린 999회차의 김남운이 대량의 [흑염]을 퍼부었다. 공간마저 녹여버리는 공격에 타격을 입은 하데스의 거체가 바닷속으로 추락했다. 한수영은 몸을 떨었다. 분명 저건 그녀가 알고 있는 [흑염]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떤 수련을 얼마만큼 해야 [흑염]을 저런 식으로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이상하네. 흑염룡이 너 같은 걸 화신으로 선택했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999회차의 김남운이 눈앞에 있었다. 흠칫 놀란 한수영이 몸을 빼기도 전에 김남운의 손바닥이 다가왔다. 피하기엔 늦었다 싶었던 순간,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김남운의 손끝이 튕겨 나갔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으르렁거립니다.] 【······어이. 뭐야. 내가 진짜잖아, 염룡아.】 마치 귀여운 강아지라도 대하듯, 김남운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네놈은 내 화신이 아니라 선언합니다.] 【아하, 여기서는 번듯한 새 차 뽑으셨다?】 김남운의 눈동자에 차가운 광기가 스쳐갔다. 【그럼, 폐차부터 시키는 게 먼저겠네.】 콰아아아아아앙! 코앞에서 터진 폭음에 한수영의 몸이 뒤쪽으로 날아갔다. 몸을 웅크린 채 충격을 최소화했음에도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졌다. 일격에 즉사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배후성 덕분이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달아나라고 외칩니다!] 허공에 직접 현현한 ‘심연의 흑염룡’이 그녀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었다. 흑요석을 빚은 듯 고귀한 자태의 거룡. 홍옥을 깎은 듯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세상을 향해 거칠게 포효했다. 【하하하하핫!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내 흑염룡이지!】 두 존재의 전투가 시작되자 일대의 바다가 폭격이라도 맞은 듯 들썩였다. 섬의 파편들이 공중을 날아다녔고, 흑염룡의 브레스가 바다를 뒤엎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아무리 흑염룡이라고 해도, ‘이계의 신격’이 된 김남운을 막기는 어려워 보였다. 애초에 저쪽은 재앙으로 강림한 존재. 사용할 수 있는 개연성의 총량부터가 달랐다. 한수영은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저 말도 안 되는 존재를 막을 수 있을까. 「김독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머릿속이 찌릿, 하고 울리더니 주변에 옅은 스파크가 발생한 것은 그때였다. 「한심하네. 이런 상황에서도 그 녀석을 찾는 거야?」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아직 ‘환생자들의 섬’을 진행하던 무렵 꾸었던 꿈. 백색 코트의 사내가, 검은 코트의 사내에게 죽는 꿈에서, 한수영은 분명 이 존재의 목소리를 들었다. 「네가 이 모양이니 내 회차에서도 그 녀석이 그렇게 기고만장했지.」 설화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너는······.’ 「이젠 간섭 안 하려고 했는데······ 딱 한 번만 더 도와준다.」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목소리.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인지 능력이 확장되고 있었다. 무수한 한수영들이 머릿속에서 깨어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세계의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난 일. 놀라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미래와 연결되기라도 한 듯 강렬한 감각이 뇌리를 사로잡았다. 무수한 클리셰와 패턴, 주어진 정보의 조합으로 자신이 알 수 없는 세계를 창조하는 능력. 그녀가 읽은 ‘멸살법’의 기억과 김독자에게 들은 정보들, 그리고 그녀가 개인적으로 얻은 정보들이 연역적으로 맞물리며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웃었다. 「그래, 그게 바로 진짜 [예상표절]이야.」 그리고 한수영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깨달았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이게 먹힐지 안 먹힐지는 모른다. 하지만. ‘······김독자라면, 했겠지.’ 「또, 또······!」 흑염룡의 거친 울음소리가 창공을 뒤덮었다. 잠깐의 전투로 흑염룡의 고고한 동체 곳곳에 크고 작은 손상이 가 있었다. 찢어진 날개를 펼친 흑염룡이 재차 브레스를 퍼부으려는 순간. “이제 됐어, 염룡아.”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나 믿고 뒤로 빠져.” 마치 자신의 배후성을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는 한수영을 보며, 흑염룡의 동공이 혼란으로 뒤덮였다. 한수영은 흑염룡에게 설명하는 대신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섰다. 【호오, 직접 싸우시겠다? 그 밤톨만한 몸으로?】 막강한 기류를 발출하는 999회차의 김남운. 언제든 한수영을 난도질할 준비가 되어있는 거대 설화 「망상설계」가 날카로운 연삭기처럼 칼날을 갈고 있었다. 하지만 한수영은 조금도 겁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김남운. 넌 이계의 신격이 되어도 변하는 게 없네.” 【뭐야, 날 아는 것처럼 말하네?】 “아주 잘 알지. 무려 외신이 되어서까지 짝사랑을 못 이루고 여자애 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는 놈.” 999회차 김남운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계의 신격’들은 모두 기억이 소실되었거나 불완전하다.」 「그런데 어떻게, ‘왕’들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 기억이, 그들에게 그만큼 소중한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정작 기회가 생겨도 제대로 된 고백 한번 못하는 주제에, 혹시나 싶어서 팬티는 언제나 거대 로봇이 그려진 걸 입었지.” 【······너, 너 뭐야! 어떻게 대장도 모르는 걸―】 “늘 한쪽 손에 붕대를 감고 다니는 것은 사실 손목의 자상을 숨기고 싶어서겠지. 이지혜에게 그걸 들키기 싫어서 말이야.” 한순간 당혹감에 물들었던 김남운이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왜 이지혜를 좋아하지?” [설화, ‘4만년의 짝사랑’이 동요합니다.] 【······그건, 지혜가 예쁘니까―】 “아냐. 넌 쓰레기지만 여자를 밝히는 설정은 아니거든.” 【설정? 너 지금 무슨―】 “네가 이지혜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지혜가 유중혁을 믿고 따르기 때문이야.” 【뭔 개소리를―】 “너는 이지혜에게 인정받고 싶은 거지. 네가 유중혁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라고.” [거대 설화, ‘망상설계’가 크게 동요합니다!] “너는 사실, 유중혁이 되고 싶은 것뿐이야.” 한수영은 차갑게 굳어지는 999회차 김남운의 눈동자를 보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네. 그런데 말야. 내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더 헛소릴 들어줄 시간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한수영은 알 수 없었다. 아니, 실은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이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이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그녀는 “그렇게 해서라도 너는, 이지혜에게 용서받고 싶었던 거다.” 다른 세계의 상처를, 난도질해야만 했다. “네가 실수하지만 않았더라도, 999회차의 유중혁은 죽지 않았을 테니까.” 츠츠츠츠츠츳! 순간, 999회차 김남운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몰아쳤다. 뭔가가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근본을 형성하는 근원 설화들이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기억이 망가지는 소리였다. 【너······.】 분개하는 김남운이 혼란에 빠진 자신의 설화를 수습하며 고함을 질렀다. 녀석의 눈빛이 흐려졌다 깊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수영은 그런 김남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예상표절]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과열된 머리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그녀는 김독자처럼 ‘멸살법’을 모두 읽지도 않았고, 유중혁처럼 실제로 999회차를 살지도 않았다. 하지만 굳이 듣거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도 있다. 그것이 상상의 힘이었다. 이야기의 세부를 알지 못하더라도, 맥락을 유추할 수 있는 힘. 주어진 상황이 있고, 예정된 전개가 있고, 이 세계에 ‘개연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그녀의 예상 표절은 거의 전지(全知)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김남운.” 한 걸음씩, 한수영이 허공을 거닐며 다가갔다. 비틀거리는 김남운이 자신의 설화를 끌어안은 채 상처 입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한수영은 그런 김남운의 설화를 바라보았다.」 유중혁도 그랬고, 성좌들도 그랬다.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들은 모두 비슷하다. 그들의 강함이 그들의 역사에서 비롯되듯, 그들의 약점 또한 그들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이야기하고 이야기되는 존재들의 숙명인 것이다. 한수영은 펜을 그어 필요 없는 부분을 지우는 작가처럼, 김남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김독자가 1863회차의 유중혁을 굴복시켰던 때처럼.」 “그때로 돌아가고 싶겠지. 하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겠지.” 【너, 계속 지껄이면―】 “그런데 너는 이제 알아야 해. 네가 살아간 세계선은 끝났고, 네가 사랑했던 이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너 따위는 유중혁이 될 수 없어. 누구를 구원할 수도, 속죄할 수도 없어.” 김남운의 뺨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999회차의 ‘결’을 보고, ‘이계의 신격의 왕’이 된 존재의 기틀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모든 설화가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 그 순간 김남운은 처음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열일곱 살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만 년을 이어온 그의 설화가, 그가 다져온 견고한 망상이 그저 말 몇 마디에 붕괴하고 있었다. 【아, 아냐. 나는, 나는―】 한수영은 그 자그마한 균열에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너는, 이 빌어먹을 <스타 스트림>에 갇혀 영원한 죄인으로 살아가야 할 뿐이다.” 파츠츠츠츠츳! 【김남운!】 999회차 우리엘의 진언과 동시에, 흐려졌던 김남운의 의식이 다시 깨어났다. [설화, ‘결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부서진 설화를 다시 잇는 것 또한 설화뿐. 간신히 헝클어트렸던 김남운의 설화가 다시금 본래의 형태를 회복하고 있었다. 김남운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한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잘 되나 싶었는데. 그래도 조금은 타격을 입혔나?’ 김남운의 눈동자가 깊은 분노에 물들어 있었다. 【······하핫, 당할 뻔했어. 역시 흑염룡이 선택한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건가.】 강렬한 죽음의 예감이 찾아왔다. 팽팽 돌아가던 [예상표절]이 끊어진 테이프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어디로도 피할 수 없다는 참담한 예감. 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여기까지면 되겠군. 주인공이 오셨으니까.」 미래와 연결된 듯한 감각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허공을 향해 불쑥 치켜 올라갔던 김남운의 주먹이 멈춰서 있었다. 전장의 모두가 그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엄청난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존재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절멸로 이끌 수 있는 ‘격’.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999회차의 우리엘이었다. 【녀석이다!】 허공을 향해 끔찍한 포효를 내뱉은 그녀가, 전장에서 이탈하며 격의 방향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김남운 또한 그쪽을 바라보았다. 【너······ 아주 운이 좋아. 다음에 보면 꼭······.】 한수영과 흑염룡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999회차 김남운의 신형 또한, 999회차 우리엘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사라졌다. 긴장이 빠진 한수영이 흑염룡의 거체 위로 주저앉았다. 두 존재가 사라진 수평선 너머를 보며, 한수영은 김독자가 마지막으로 해준 말을 떠올렸다. ―한수영, 진짜 만약에, 혹시나 일이 잘못되면······. ―그딴 불길한 복선 깔지 말아줄래?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떻게든 그 자식이 올 때까지만 버텨. “새끼, 겁나 멋있게 등장하네.” 멀리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옥염화]와 [흑염]의 아우라로 얼룩진 밤하늘. 종말의 창천에 오래된 얼굴의 사내가 강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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