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473화 “잘한다 손오공!” 신이 난 한수영이 소리쳤다. 꾸르륵, 소리와 함께 바다 위로 피거품이 올라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999회차의 우리엘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의 해수종들을 모조리 찢어 죽이고 올라왔는지, 그녀의 전신은 완연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덮은 것은 배신감이라기보다는 경이로움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 제천대성. 그대까지 이들의 편을 드는가?】 이윽고 그 경이로움은 잠깐의 그리움으로 변했다. 그 변화를 감지한 제천대성이 물었다. [넌 뭔데 날 아는 척하는 거냐?] 【그저, 잃어버린 옛 전우를 잠깐 떠올렸다. 나는 그대와 싸울 생각이 없다. 비켜라. 내가 원하는 것은 ‘은밀한 모략가’뿐이다.】 실제로 전의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제천대성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 음침한 녀석이 싫은 건 마찬가지지만.] 무심히 웃는 제천대성의 몸에서 가공할 기운이 터져 나왔다. [그 녀석이 죽으면, 우리 막내가 곤란해할 것 같단 말이지.]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긴고아에 속박된 격을 해방하고, ‘이계의 신격화’까지 일부 진행되며 외신의 힘까지 손에 넣은 존재. 『서유기 리메이크』를 함께했던 요괴들이 포탈을 넘어 태평양에 강림하고 있었다. 【원숭이왕원숭이왕원숭이왕원숭이왕】 서로 다른 왕을 숭배하는 ‘이계의 신격’들이 드잡이질을 벌였다. 피에 젖은 바다가 격랑으로 뒤덮였고, 999회차의 우리엘이 기함했다. 그리고 마침내, 비등했던 천칭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됐다. 밀어붙여!” 한수영의 목소리와 함께 <김독자 컴퍼니>의 거대 설화들이 일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비록 주요 담화자인 김독자와 유중혁이 부재중이었지만, 다른 인원들도 만만치 않은 거대 설화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늘의 태양은 하나면 충분하지.] 자신의 열차와 함께 나타난 수르야. 그리고. [이제 이계의 신격을 베는 것도 익숙하군.] [합공하지, 파천검성.] “저도 갑니다!” 그리고 파천검성과 키리오스, 그리고 장하영까지 가세했다. 수세에 몰린 999회차의 우리엘.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당혹감으로 물들고 있었다. 【어떻게······ 그대들이 모두 함께 있지? 이 세계선은 대체―】 밀려드는 거대 설화에 그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설화의 크기도 크기지만, 내용이 문제였다. 어떻게 이런 설화가 가능하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열차를 탄 세 명의 초월좌들이 태양의 열막을 꿰뚫었다. 하늘을 부수는 [파천검도]와 [전인화]. 거기에 [파천붕권]의 가공할 파괴력이 어우러진 일격. 그 일격이 우리엘의 빈틈을 강타하려는 순간. 아주 서늘한 감각이, 한수영의 뒷덜미를 엄습했다. “잠깐만!” [설화, ‘예상표절’이 다급하게 이야기를 수정합니다!] 이 세계에서 오직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강렬한 감각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대의 시공간 전체를 쥐어짜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꽈드드드드득. 한수영은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뭐야, 이 회차의 ‘나’는 어디 갔어? 설마 뒈졌나?】 마치 심연의 일부를 떼다 빚은 듯 불온한 목소리. 최후의 일격을 먹이기 위해 배후로 접근하던 초월좌들이 부서진 열차와 함께 추락하고 있었다. 새카만 [흑염]의 불길이 그들의 옷깃을 태우고 있었다. 천공의 먹구름 사이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한수영도 알고 있는 존재였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쳇, 이렇게 날뛰는 ‘격’은 당연히 지혜일 줄 알았는데. 간만이라 착각해버렸네.】 ‘살아있는 불꽃’의 태양이 눈부신 빛을 발했다. 그러나 사내의 어둠은 빛이 강해질수록 더욱 짙어지는 그림자처럼 더욱 두터워질 뿐이었다. 999회차 우리엘이 말했다. 【‘위대한 심연의 군주’. 누가 너 같은 놈을 이 세계선에 불렀지?】 한수영의 목덜미가 차가워졌다. 김독자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북쪽 우주의 지배자, ‘위대한 심연의 군주’. 【하핫. 이제야 날 그렇게 불러주네. 그나저나 힘들어 보이는데, 내가 좀 도와줄까?】 경기를 일으키듯, 태양의 코로나가 튀어 올랐다. 【필요 없다. 네까짓 잡배의 도움 따위―】 【왜 이래, 같은 회차의 ‘동료’끼리.】 이죽거리는 사내. 그는 999회차의 ‘결’을 본 망상악귀 김남운이었다. 김남운의 시선이 움직이는 순간, 한수영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나도 간만에 흑염룡 얼굴 좀 보고 싶다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김남운이 흉흉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유중혁은 자신이 어둠 속을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것은 김독자와 필살기를 연구하던 기억. 도중에 무엇인가가 잘못되었고, 자신은 의식을 잃었다······. [현재 당신의 영혼체가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난독에 빠진 상태입니다.] 「유중혁 녀석 생일이 언제였더라.」 드문드문 기억들이 흐르고 있었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니, 목소리라기보단 오히려 활자에 가까운 무엇. 그것이 누구의 말투인지, 유중혁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언급된 회차가······.」 사람을 열 받게 만드는 건들건들한 말투. 저딴 식으로 말하는 놈은 세상에 김독자 하나뿐이었다. 「이야, 이때 진짜 재밌었지.」 김독자가 읽던 페이지의 문장들이 눈앞을 스쳐간다. 그곳에는 성좌들과 맞서 싸우는 유중혁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1회차, 41회차, 666회차······.」 활자를 읽던 김독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오래도록 머무른 손가락 사이로, 회차의 정보가 보였다. 「999회차.」 유중혁도 이제 그 회차의 일을 알고 있었다. 김독자가 읽은 문장들이,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 회차를 읽는 김독자가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내가 유중혁이다······.”」 그 어설픈 외침 하나로 버텨낸 삶에 대해 유중혁은 알지 못했다. 김독자가 읽은 유중혁. 그 페이지의 맥락 사이사이로 김독자의 역사가 그을음처럼 남아 있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아르바이트 가게에서는 임금을 체불하는 사장에게 고통받고, 군대에서는 발바닥이 까지는 행군을 하는 동안. 김독자는 스스로를 유중혁이라 부르며 견뎠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버텨낸 시간들이, 전혀 다른 세상의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싸움을 보고 함께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심지어 그의 눈에는 활자 속에 비치는 자기 자신의 모습조차 낯설어 보였다. 「“아직 싸울 수 있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말했던 것일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나는 네놈들을 죽이기 위해 다시 태어날 것이다.”」 자신은, 정말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인물인 것인가. 무수한 활자들 사이로 그를 신뢰하는 일행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대장.」 「당신만 믿어.」 「다음 회차에선, 반드시 세계를 구해줘.」 세계선이 사라지고, 그에게 남은 것은 문장들뿐이었다. 그를 괴롭게 만들던 문장들의 부피가 늘어날수록, 삶의 가치는 초라해졌다. 그들은 대체 자신의 무엇을 믿고 함께 싸워주었는가. ‘나는 누구인가.’ 그의 이해 밖에서 존재하는 문장들을 보며, 유중혁은 공허에 휩싸였다. 1864번의 삶. 자신이 어떤 세계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유중혁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정말 이 기억들만이, 그의 전부인 것인가.」 유중혁은 궁금했다. 만약 자신이 정말로 김독자의 말처럼 ‘등장인물’이라면,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인가. 김독자가 읽지 않은 페이지의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 아니면 그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가? [당신의 배후성이 당신을 들여다봅니다.] 자신의 생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존재했다’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츠츠츠츳······. 서늘한 느낌이 든 것은 그 순간. 유중혁은 반사적으로 공허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있었다. 【자아성찰이라도 하는 건가? 그렇게 한가하게 있을 시간이 없다.】 유중혁은, 그게 누구인지 곧바로 깨달았다. ‘네놈은 움직일 수 없을 텐데.’ 유중혁이 ‘은밀한 모략가’를 노려보았다. 버릇처럼 [흑천마도]에 손을 가져갔지만, 칼자루가 잡히지 않았다. 이곳은 그의 심상세계. 아이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은밀한 모략가’가 그런 유중혁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라면 너의 동료들은 전멸할 것이다.】 ‘전멸해?’ 등골로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일행들은 ‘이계의 신격의 왕’과의 격전을 앞두고 있었다. 확실히 주변을 흐르는 불길한 기운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깨어나야 한다. 여기서 나가서······. 【지금 상태로는 가더라도 소용없다. 1863회차의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너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유중혁의 사나운 말투에도 ‘은밀한 모략가’는 침착했다. 【네가 1863회차의 힘을 쓸 수 있는 방법이 또 있다.】 순간 유중혁은 그게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그가 1863회차의 힘을 잠깐이나마 되찾을 수 있는 것은 김독자에게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설화를 김독자에게 준 이는······. 유중혁이 이를 갈며 물었다. ‘네놈을 어떻게 믿고? 왜 우리를 돕기로 한 거지?’ 【부탁을 받았다.】 ‘······부탁?’ 【힘을 빌려주는 것은 이번뿐이다. 네가 배우는 것이 있기를 바라지.】 다음 순간, 어둠 속에서 ‘은밀한 모략가’가 손을 뻗었다.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이마에 닿는 소년의 차가운 손바닥. 그리고. [‘끊어진 필름 이론’이 발동합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드는 듯한 고통 속에, 거대한 설화가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미 알고 있던 기억. 하지만 이해하진 못했던 시간들이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은밀한 모략가’의 모든 설화들이 그의 혈맥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1회차, 2회차, 3회차, 4회차····· 1863회차. 수많은 유중혁들이 그의 안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 모든 존재가 유중혁이었다. 각각의 유중혁. 하지만 동시에, 그 유중혁은 한 사람이었다. 1864회차의 삶을 온전히 살아낸, 단 한 사람의 유중혁. 하나씩 기억이 난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설화들이 그의 저변을 떠돌고 있었다. 설화 속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근데 대장은 생일이 언제예요?”」 그러자 김독자가 말했다. 「아, 찾았다. 여기 있네. 8월 3일.」 맞다. 그는 여름에 태어났다. 지옥처럼 무덥고, 끔찍한 폭풍이 몰아치던 여름에.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한 번도 챙겨본 적도, 축하받아본 적도 없는 생일. 1864번의 생을 거치면서, 의미를 잃어버린 기념일들. 유중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전신에 충만한 설화의 기운. 3회차를 살아가는 내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고개를 들자 어디선가 뜨거운 볕이 느껴졌다. 멀리서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저 먼 수평선 너머에서 그를 부르는 ‘이계의 신격’의 존재. 그러나 유중혁은 두렵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화신체의 상태를 점검했다. 화신체의 모든 부위가 완벽에 가깝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모든 근섬유 속에, 그가 쌓아 올린 설화들이 배어 있었다. 「그 순간 유중혁은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온전한 격을 회복하였습니다.] 이것이 본래의 그가 가진 진짜 힘. 세계의 최종 회차에 도달해, 홀로 ‘벽’을 볼 수 있었던 존재의 격. [‘끊어진 필름 이론’이 비정상적인 형태로 발동 중입니다.] [필름들의 연결이 불완전합니다!] [이 연결을 계속해서 유지할 시 필름 전체가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 이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잠깐뿐. 하지만 그에게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유중혁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울부짖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천둥 번개 사이로 그의 얼굴에 새겨진 흉터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특성, ‘별들의 공포’가 발동합니다!] 그의 시선에 겁에 질린 별들이 달아나고 있었다. 잠시 그 별들을 바라보던 유중혁의 신형이, 먼 곳의 태양을 향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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