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화

472화 Episode 90. 한 사람 자라난 강철이 나와 이지혜를 보호하고 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이현성의 배후성은 본래 ‘강철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강철의 주인’은 지난 <오즈> 사태 때 소멸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수식언을 넘겼다. 【은빛 심장의 왕.】 은빛 심장의 왕. 그가 바로 새로운 ‘강철의 주인’이었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과 마찬가지로 999회차의 결을 본 존재. 999회차의 결을 본 이현성. 【같잖은 배후성 행세는 집어치워. 지금 뭐하는 거야?】 같은 ‘왕’을 대면했기 때문일까. 999회차의 이지혜가 이성을 되찾고 있었다. 【왜 우리가 부를 때는 침묵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건데?】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말하고 있었다. 【원칙을 따르자고 한 것은 당신이었잖아. 다른 세계의 멸망이 되어서라도,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되찾자고 약속했잖아. <스타 스트림>에게 우리의 시나리오를 돌려받자고······, 그렇게 말했었잖아.】 그들의 곁에 흐르는 설화가 그들의 삶을 짐작하게 했다. 「지혜야.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계의 신격’이 되더라도, 그 원칙을 잊지 마.」 「세계가 너를 상처 입힐 때, 그 원칙만이 너를 지켜줄 거다.」 「네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너를 대신해 말해줄 거다.」 모든 회차의 이지혜가 이지혜이듯, 모든 회차의 이현성 또한 이현성이다. 심지어 ‘이계의 신격’이 되어서조차, 그들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은빛 심장의 왕’이 나를 바라보았다. 감정을 헤아릴 수 없는 시선이었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다, 지혜야. 999회차의 비극을 재현하지 않는 것.】 【무슨 헛소리야? 당신 멋대로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는 게 원칙이야?】 【이 세계선에 살았던 내 배후성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어쩌면······, 이 세계선이야 말로 우리가 찾던 세계선인지도 모른다.】 ‘은빛 심장의 왕’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모든 것의 ‘끝’을 볼 수 있는 세계선.】 그 말에, 999회차의 이지혜가 멈칫했다. 【그런 세계선이 존재할 리 없어. 어차피 이 세계선은 끝이야. 당신이 막아도, 내가 멈추더라도―】 아무래도 ‘은빛 심장의 왕’은 이 ‘대멸망’에서 재앙이 되기를 선택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우리를 해칠 생각이었다면 <오즈>에서 나섰을 테니까. 실제로 그것을 알기에 이현성을 데려온 것이었다. 정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마지막 카드로. 【이들은 그리 약하지 않다. 우리엘 혼자로는 무리다.】 ‘은빛 심장의 왕’이 말하자,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대답했다.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허무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왔다. 마치 불쾌한 뭔가를 보기라도 한 듯한 표정. 【혼자가 아니라면?】 그리고 다음 순간, 수평선 너머가 새카만 어둠으로 뒤덮였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가, 저 너머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독도 인근 해역에 자리를 잡은 채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독자가 태평양 쪽으로 사라진 후, 수평선 너머에서 먼 북소리 같은 것이 간간이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일행들의 몸이 한 번씩 움찔거렸다. 그 간헐적인 멈칫거림에 대해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김독자를 도우러 가고 싶다.’ 하지만 일행들은 참았다. 그것이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섣불리 움직였다간 김독자를 구하기는커녕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었다. 무조건 작전대로 가야 한다. 작전대로, 이곳에서······. 쿠구구구구구. 창공에서 열기가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해역 전체를 뒤덮는 폭염.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들은 믿기지 않는 장면을 보았다. 김독자의 말이 맞았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바다 한가운데로 떨어지고 있었다.」 컨트롤 타워를 맡은 한수영이, 공필두의 성채 꼭대기에서 외쳤다. “전투 준비!” 영혼마저 녹아내릴 것 같은 열기. 그 지독한 홍염 속에 날개를 단 999회차의 우리엘이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어디에 있지?】 「이계의 신격의 왕, 동쪽에서 떠오르는 ‘살아있는 불꽃’.」 한수영은 눈앞에서 풍겨오는 어마어마한 격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정확히는 삼키려 했다. 하지만 입속의 침조차 말라버렸는지 조금의 물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메마른 목을 가다듬으며, 한수영이 말했다. “지금부터 ‘불꽃 진화’를 시작한다.” 불꽃 진화. 그것이 이들, ‘1조’가 맡은 임무였다. 한수영은 떠나던 김독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떠올렸다. ―죽이지 마. 그 존재도 ‘우리엘’이야. ······빌어먹을 김독자. 저런 걸 죽이지 말고 제압하라고? 침묵의 시위 속에 ‘살아있는 불꽃’이 가늘게 눈을 떴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유상아!” 신호와 함께 유상아가 손을 뻗었다. 하늘거리는 법복 사이로, 거대한 만다라가 회전하더니 곧장 태양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지금의 <김독자 컴퍼니>가 가진 최강의 디버프 스킬이 발동했다. [설화, ‘만다라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그리고 아주 약간이지만, 태양의 활동이 희미하게 둔해졌다. 999회차의 우리엘이 중얼거렸다. 【······시공간 간섭? 이곳에 석존이 있는 건가? 그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쿠드드드드드! 그녀가 주먹을 쥐자 일대의 시공간 전체가 깨어질 듯 흔들렸다. 유상아의 입술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이게 최선이에요!” “정희원! 신유승!” 한수영의 명령을 받은 두 사람이 달려나갔다. 999회차 우리엘이 먼저 발견한 것은 신유승이었다. 바다에 드리워진 거대한 용의 그림자. 포이즌 브레스가 태양의 겁화를 뒤덮었다. 【이 세계선의 ‘비스트 로드’인가.】 브레스에 닿은 우리엘의 화신체가 일부 변색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피부는 순식간에 수복되었다. “어디 이것도 막아보시지!” 바로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999회차의 우리엘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까가가가가각! [업화의 불꽃]과 [심판자의 검]이 충돌했다. 단 한 번의 충돌로 정희원이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화신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을 발동 중입니다!] 【‘심판의 시간’? 어떻게 나를 상대로 그 기술을 썼지?】 “글쎄, 어떻게 일까?” 정희원의 검을 뒤덮은 [지옥염화]. 그리고 그녀의 등 뒤로 뻗어 나온 대천사의 날개를 확인한 999회차 우리엘이 표정을 굳히며 격을 발출했다. 【······내 화신이었군.】 그에 대항하듯, 정희원의 몸에도 성좌의 힘이 현현했다. [희원이는 네 화신이 아니라 내 화신이거든?] 두 명의 우리엘이 마주 격을 발산하며 충돌했다. 한 번, 두 번. 충돌이 잦아질 때마다 정희원의 안색이 급격하게 질려갔다. “무슨 힘이······!” 【지난번처럼 우스꽝스런 기억에 당하지는 않는다.】 순식간에 정희원이 수세에 몰리자, 우리엘이 다급하게 외쳤다. [■바! 너네 뭘 구경만 하고 있어!] 동시에 999회차 우리엘의 등을 습격한 새카만 불꽃이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살아있는 불꽃’이 말했다. 【흑염룡.】 양쪽 손의 붕대를 모두 푼 흑염룡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큭큭, 맛이 어떠냐 망할 천사!] 절대 선과 절대 악. 한때 숙적이었던 두 설화급 성좌가 재앙을 막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다. [지옥염화]와 [흑염]이 태양의 군세에 작렬한다. 눈부신 빛의 폭풍 속에서, 한수영은 고요히 전율했다. ‘······강하다.’ ‘살아있는 불꽃’은 한 손만으로 저 강력한 두 성좌를 상대하고 있었다. 둘의 힘을 합했는데도 밀어붙일 수 없는 상대. 【이번 회차의 나는 겨우 이 정도인가? <에덴>은 어디에 있지? 너는 왜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냐?】 [에덴 망했어 시■!] 【······<에덴>이 없다? 성운의 가호도 없이 나와 맞서겠단 건가?】 더 이상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살아있는 불꽃’이 고개를 돌렸다. 태양의 빛이 더욱 강해진다 싶더니, 뜨거운 열기 속에서 뭔가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르는 ‘이계의 신격’. 수천에 이르는 군세가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라. ‘은밀한 모략가’를 찾아라.】 진군이 시작되었다. 불타는 날개를 가진 무수한 ‘이름 없는 것들’이 지상으로 강하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한반도까지 휩쓸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화신 ‘신유승’이 ‘최상급 다종교감 Lv.???’을 발동합니다!] 신유승이 움직였다. 바다를 가르고 나타난 무수한 해수종들이 뛰어올라 ‘이름 없는 것들’의 발목을 물고 늘어졌다. 거기에 무장성주 공필두도 가세했다. 흉벽 전체에 설치된 자동 포탑들이 불을 뿜자 벌집이 된 ‘이름 없는 것들’이 고통스레 비명을 질렀다. 999회차의 우리엘이 말했다. 【저런 악독한 인간까지 동료로 받은 건가? 한심하기는.】 공필두의 성채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이름 없는 것들’. 마침내 외신들의 공격에 흉벽의 한쪽이 무너지려는 순간, 한수영이 외쳤다. “이길영!” 기다렸다는 듯, 이길영이 흉벽 사이에서 나타났다. 새카만 격을 몸에 두른 이길영이 창공을 향해 포효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황색 구름이 밀려와 하늘을 덮었다. 한순간이지만 저 뜨거운 볕조차 가릴 정도의 군세였다. [성좌, ‘무저갱의 지배자’가 하얀 이빨을 드러냅니다.] 【······마신 아바돈? 네놈이 왜 이런 곳에?】 뜻밖의 적에 놀란 999회차의 우리엘이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신유승에 공필두, 거기다 이길영까지 합세하자 전황은 비등해지기 시작했다. 아바돈이 부리는 황색의 메뚜기 떼가 자신들의 몸을 던져 ‘이름 없는 것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가아아아아아!】 고통스레 몸부림치는 ‘이름 없는 것들’. 눈살을 찌푸린 999회차의 우리엘이 한쪽 손으로 우리엘과 흑염룡의 공세를 가볍게 방어해내며, 다른 한쪽 손에 마력을 집중했다. [지옥염화]로 포위를 뚫어 버리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먼저 읽어낸 이가 있었다. “지금이야! 쳐!” 한수영의 신호에 깊은 바다의 수면 위로 길쭉한 낫이 튀어나왔다. 스각, 하는 소리와 함께 대천사의 날개에 커다란 자상이 남았다. 흰 깃털이 날리며 쏟아지는 이계의 설화. 【<명계>의 왕······!】 처음으로, 999회차 우리엘이 표정이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성운 <명계>가 비축한 설화를 개방합니다!] 하데스와 함께 <명계>의 정예군 일부가 포탈을 타고 넘어왔다. 세 명의 심판관과 페르세포네까지. 태양을 호위하던 ‘이름 없는 것들’이 무너졌고, <명계>의 격이 999회차의 우리엘을 압박해왔다. 하지만 999회차 우리엘은 버티고 있었다. 석존과 우리엘의 화신에, 심연의 흑염룡. 거기다 신화급 성좌인 하데스까지. 기습으로 인해 한쪽 날개가 찢어진 상황에서 어지간한 성운 하나 급의 전력이 가세했는데도 그녀는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했다. “뭘 꾸물대고 있어! 빨리 가세해!”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귀찮다는 듯 몸을 움직입니다.] 쿠구구구구! 하늘을 덮은 황운 위로 몰려든 먹구름. 불길한 빛을 뿜은 뇌운이 한순간 푸른 빛을 띠더니 바다를 향해 사정없이 전격을 쏟아부었다. 쉴 새 없이 점멸하는 하늘. 스쳐 간 번갯불 사이로 드러난 모습을 드러낸 고고한 성좌가 있었다. 흐트러진 백금발. 특유의 오만한 입꼬리를 가진 신화급 성좌. 999회차의 우리엘이 크게 눈을 뜬 순간, 시야를 가득히 메운 여의금고봉이 그녀의 몸을 후려쳤다. 그 무지막지한 충격을 견디지 못한 그녀의 화신체가 굉음을 내며 바닷속에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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