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화
471화
【해······상전······신.】
자신의 배후성을 기억하는지, 999회차의 이지혜가 반응하고 있었다.
「999회차에서, ‘해상전신’은 이지혜를 살리기 위해 죽었다.」
이 회차에서 일어난 일을 부정하려는 듯, 강렬한 함포 사격이 이어졌다.
그러자 이쪽의 이지혜도 대응했다.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이 이지혜와 함께하고 있었다.」
대해(大海)의 군주.
1800회차를 넘어선 ‘멸살법’의 극후반에야 이지혜가 도달하는 경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정상의 위치에서, 자신의 배후성조차 뛰어넘은 이지혜는 마침내 바다의 신이 된다.
「적어도 바다에서만큼은, 그 어떤 신화급 성좌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실제로 이지혜가 한 말이었고, 실천된 말이기도 했다. 원작의 그녀는 바다에서만큼은 신화급 성좌인 포세이돈과 비등한 전투를 펼친 적도 있었다.
“발사!”
[특성, ‘대해의 군주’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이지혜의 배후에서 폭풍이 불어닥쳤다. 그녀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해일이 갈라지며 불바람이 쏟아졌다. 그녀의 함선을 호위라도 하듯 몰아치는 광풍.
이지혜는 그 바람의 선두에 서서 사격을 이어 나갔다.
[전용 스킬, ‘유령함대 Lv.???’가 응전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해일의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대 해 의 군 주】
【둘둘둘둘둘둘둘둘둘】
저쪽을 따르던 ‘이계의 신격’들까지 당황하는 모양새였다.
「대해의 군주는 바다에서는 패배하지 않는다.」
그것이 ‘멸살법’의 정설이었다. 나도 그 문장을 믿었고, 그랬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큭······.”
푸슈슉, 하는 소리와 함께 이지혜의 코와 입에서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과도하게 끓어오른 마력이 역류하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특성, ‘대해의 군주’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이쪽의 격이 자아낸 메시지가 아니었다.
뭔가가 달려든다 싶더니, 한순간 불어닥친 역풍이 시야를 뒤집었다. 거대한 해일에 휘말린 [유령함대]와 [터틀 드래곤]이 포말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지혜야!”
나는 실이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는 이지혜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 마력에 정신을 차린 이지혜가 공중제비를 돌며 갑판에 착지했다.
으드득 이를 간 이지혜가 키를 잡으며 외쳤다.
“도망가라니까!”
“그럴 순 없어.”
지금의 이지혜 혼자서는 무리였다. 아무리 ‘대해의 군주’가 되었다고 해도, 저쪽은 이미 오래전에 ‘대해의 군주’의 격을 달성하고 이계의 신격이 된 존재였다.
츠츠츠츠츳!
대멸망 시나리오의 가호로 신화급 성좌조차 넘어서는 재앙. 그게 지금 우리가 싸우는 상대였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습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신화에 대항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 개의 ‘거대 설화’가 한꺼번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1조가 사용 중인 ‘거대 설화’ 지분이 있었기 때문에, 지분 전체를 끌어 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저쪽을 도발하기엔 충분했다.
【너희들은······.】
백기로 기억을 자극한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진언에 실린 감정 양상이 아까와는 달라졌다.
츠츠츠츠츳!
[등장인물,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거대 설화를 응시합니다.]
[‘끊어진 필름 이론’이 발동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원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두 명의 이지혜가 쌓아 올린 설화가 충돌하며 끊어진 필름이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이 현상을 통해 우리는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눈앞의 정경이 변한 것은 그때였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독자(獨子)의 설화.」
「[살아주세요.]」
「“아저씨! 안돼! 멈추라고! 멈춰―!”」
처음으로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과 맞섰던 순간의 기억.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듯, 이지혜가 시선을 돌렸다.
······그때 이지혜는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구나.
나 역시 저 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나는 멸망하는 [공단]을 통째로 옮기기 위해, ‘은밀한 모략가’와 계약해 저 재앙을 막아냈었다.
【너는······.】
그런데,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999회차의 이지혜도 마찬가지였다. 이어서 우리 눈앞에 또 다른 설화가 펼쳐졌다.
[거대 설화, ‘영원한 수평선의 방랑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것은 999회차의 이지혜가 가진 설화였다.
성운들의 습격으로 망가진 서울의 정경. 쓰러진 일행들. 부서져 나가는 성채의 흉벽.
그 흉벽의 꼭대기에서, 한쪽 팔을 잃어버린 유중혁이 외눈으로 전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법은 이것뿐이다.”」
유중혁의 몸에서 피어오른 새카만 혼돈의 아우라.
「“사부! 멈춰! 멈추라고!”」
나는 그것이 어떤 장면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999회차 유중혁이 죽는 모습이었다.
외신과 맺은 반복된 ‘이계의 언약’으로 넝마가 되어버린 그의 영혼이 마지막 거래를 하고 있었다.
깊은 바닷속으로 침전하는 서울. 유중혁이 말했다.
「“살아남아라.”」
부연 포말 너머로 999회차의 기억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 무표정한 그녀의 두 눈에서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영겁의 세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설화.
그 설화가, 저 존재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것이다.
“아저씨, 이거―”
돌아보자 이쪽의 이지혜도 울고 있었다.
“너무, 비슷하잖아······.”
[두 개의 ‘거대 설화’가 서로에게 호응합니다.]
비슷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김독자가 생각한 가장 완벽한 회차는 ‘999’회차였고.」
저 회차는, 내가 모티브로 삼은 회차였으니까.
「그 회차만이, 어떤 회차보다도 올바른 결말에 가까운 회차였다.」
모두를 살리면서, 결말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회차.
츠츠츠츠츳!
폭주하는 후폭풍 속에서 999회차의 이지혜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는 거리.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저씨, 물러서!”
위험을 직감한 이지혜가 쌍룡검을 뽑아 들며 달려갔다.
[순살]. 이지혜가 가진 최강의 대인 기술. 하지만 뻗어 나간 섬광은 강한 파찰음과 함께 허공에서 튕겨져 나갔다. 피를 흩뿌리는 이지혜의 몸이 갑판 위를 날았다.
“지혜야!”
대기하고 있던 이현성이 이지혜를 안아 들었다.
한숨을 돌리는 순간, 999회차의 이지혜가 내 코앞에 있었다.
격을 발출하기 위해 설화를 풀어내는 찰나, 희고 단단한 오른손이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당신은······ 누구야?】
······누구 제자 아니랄까봐.
나는 쓰게 웃었다.
어찌됐든 대화가 가능해졌다는 것은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내 이름은 김독자다. 네 사부의 절친이지.”
【······절친?】
999회차의 이지혜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내 주변을 떠도는 설화를 보고 있었다.
「“놈들과 격돌하기 직전, 왼쪽 벽면을 꼭 살피세요. 그럼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게 될 겁니다.”」
「“그건 28번 시나리오의 ‘사스콰치’들을 상대하라고 알려드린 겁니다.”」
내 설화들이 999회차의 이지혜에게 읽히고 있었다.
【어떻게 너는······.】
「“나는 유중혁이다.”」
【······사부?】
혼란이 찾아오는 듯 999회차의 이지혜가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감쌌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쿠드드드드드!
멱살을 잡은 이지혜의 악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전신을 옥죄어오는 격의 파형에 조금씩 숨이 막혀왔다.
“잠깐만, 일단 이것 좀 놓고······!”
【사부사부사부사부사부사부사부사부】
폭주하는 이계의 신격들이 그녀의 말을 따라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구슬픈 언어로 999회차의 이지혜를 대신해 울부짖고 있었다.
목청이 터질 것처럼. 존재가 스러질 것처럼.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발동합니다!]
[당신의 모든 설화가 해당 인물에게 동조하고 있습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그녀의 동공에 우리가 살아온 순간들이 스쳐가고 있었다.
<마왕 선발전>, <기간토마키아>, <성마대전>과 <서유기>. 그리고.
[설화, ‘네모난 원’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언제든 말해도 돼. 나한테 말하고 싶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좋아. 하지만 웅크려 놓고 혼자 썩히지는 마.”」
깊은 슬픔으로 일그러진 999회차 이지혜의 얼굴이 보였다.
왜 이 순간, 나는 ‘은밀한 모략가’가 떠오르는 것일까.
「【어째서, 내가 아니라 너희들인 것이지?】」
999회차의 이지혜― ‘가라앉은 섬의 주인’에게,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
그녀도 역시 나를 증오할까.
그들의 역사를 읽고 쌓은 이 세계선의 삶을―
「부러워」
······뭐?
츠츠츠츠츳!
한없이 그리운 무언가를 보듯, 999회차의 이지혜가 내 뺨을 향해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같은 이야기를 읽어도, 감상은 저마다 다른 법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이야기를 보고 절망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없이 닮은 슬픔을 보며 위로를 받는 존재도 있다.
문제는, 그 위로의 방향이었다.
「가지고 싶다」
오랜 슬픔에 젖은 그녀의 눈동자에 광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999회차의 이지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쓰러진 이지혜를 보고 있었다.
「나도, 이런 삶을 살고 싶다」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끊어진 필름 이론]이 요동치고 있었다. 999회차 이지혜가 손을 뻗자, 흘러나온 격류가 쓰러진 이지혜를 감싸 안았다. 위험했다.
[두 존재의 설화가 공명을 시작합니다!]
으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999회차의 설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999회차의 설화가, 이 세계선의 설화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나는 기함하며 격을 발출했다.
막아야 한다. 절대로, 999회차가 이지혜를 먹어 치우도록 두어선―
콰드드드드드!
순식간에 배의 갑판을 뚫고 자라난 강철이 이지혜와 나를 보호했다. 이현성이었다. 그런데, 그의 강철에서 느껴지는 설화의 기운이 뭔가 달랐다. 나는 이현성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이현성이었지만, 이현성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현성의 몸을 빌려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화신 ‘이현성’의 배후성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의 격.
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강철벽을 헤집고 999회차의 이지혜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표정은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현성의 배후성이었다.
【지혜야. 우리의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이계의 신격의 진언.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그 시각, 한명오는 김독자에게 빌린 코인으로 구매한 [X급 페라르기니]를 타고 차원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목적지는 봉인된 ‘환생자들의 섬’.
“다름아! 아빠 목소리 들리면 대답해! 다름아!”
한다름. 그것이 한명오가 자신의 딸에게 붙인 이름이었다.
한명오는 암흑 단층의 곳곳을 헤매며 그 이름을 불렀다.
“다름아!”
일그러진 암흑의 틈새에서, 한명오는 익숙한 모양의 손을 발견했다.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손. 마왕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던 손이었다. 한명오는 그 손을 꾹 쥐었다. 그리고 단층 사이에서 딸의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딸을 구하기 위해 빌린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딸의 몸이 조금씩 단층 사이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딸의 화신체는 무사했다. 하지만 심장이 뛰질 않았다. 다행히 그에게는 이설화에게 받은 [생사단] 한 알이 있었다.
“다름아! 정신 차려! 아빠야! 아빠가 왔어!”
한명오가 눈물을 쏟으며 외쳤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한다름이 눈을 떴다. 슬그머니 흘러나오는 붉은 안광.
[······잘했습니다, 나의 권속이여.]
눈을 뜬 것은, 한다름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종말의 인도’가 성마대전에서 끝날 뻔했군요.]
스산한 마왕의 격. 아스모데우스의 광소에 한명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 내 딸을 돌려줘! 내 딸을―”
[딸? 흐음······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해요. 내겐 이 화신체가 꼭 필요하거든요. 대신, 선물로 좋은 것을 주겠어요.]
그 말과 함께, 아스모데우스가 품속에서 새카만 안대를 꺼냈다.
[이 세계선의 종말을 함께 지켜볼 자격을.]
그것은 ‘종말의 인도자’ 사이에서 전해지는 오래된 아이템이었다.
오직 마지막 시나리오의 코앞에 도달했을 때만 사용 가능한 아이템.
[아이템, ‘심연의 유물’을 발동합니다!]
심연에 깃든 이계의 신격― ‘999의 악마’를 불러오는 ‘이계의 주문’.
일대의 차원이 뭉그러지는 것을 보며, 아스모데우스가 광소를 터트렸다.
[메타트론! 아가레스! 구원의 마왕! 이 이야기는 당신들의 생각대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이 이야기는―]
【뭐야 이건?】
언제부터였을까. 아스모데우스의 뒤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시커먼 아우라로 덮인 채, 한쪽 팔에는 붕대를 감은 사내.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보던 한명오가 몸을 떨었다. 사내는, 한명오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런 한명오와 시선이 마주친 사내가 웃었다.
【······네가 날 부른 거냐? 흠······ 뭐야. 마왕도 있어? 아하, 알겠다. 이 마왕이 널 괴롭히고 있는 거지? 그래서 살려달라고 날 불렀구나?】
[종말이시여! 아닙니다! 당신을 소환한 것은 바로 저 아스모데우스―]
쐐애액,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투명한 손이 아스모데우스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잠시 후, 사내의 손엔 아스모데우스의 영혼체가 붙잡혀 있었다.
[커헉······?]
【난 남의 몸에 숨은 놈 말은 안 믿어.】
푸화학, 하는 소리와 함께 아스모데우스의 영혼체가 찢어졌다. 발악할 틈도 없는 일격. 넝마가 된 마왕의 설화를 핥은 사내가 웃었다.
【난 마왕 놈들이 제일 싫어. 날 따라하거든. 이것 봐! 이 자식, 내가 잃어버린 안대도 가지고 있잖아.】
혼자서 중얼거린 사내가 아스모데우스의 눈에서 새카만 안대를 벗겨 자기가 썼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사내가 싱긋 웃었다. 부들부들 떠는 한명오가 쓰러진 자신의 딸을 안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이 어이, 걱정 마. 내가 좀 무섭긴 하지만 알고 보면 괜찮은 남자거든.】
자신의 붕대를 탕탕 두드린 사내가 말했다.
【그럼 어디······ 우리 지혜부터 찾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