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화

470화 포격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이지혜를 붙잡았다. 마치 세계 전체가 우리를 향해 조준경을 들이댄 느낌. 이지혜가 배의 선두를 틀었다. 그저 늦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발사.】 콰아아아아아! 귀청이 찢어질 정도의 포격음과 함께 대양이 이명으로 뒤덮였다. 인근의 포말 전체가 수증기로 기화하고 있었다. 거의 간발의 차이로, [터틀 드래곤]의 선체가 선회했다. 그나마도 온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현성 씨!” 매캐한 탄내와 함께 설화 금속이 가지를 뻗어 갑판 전체를 뒤덮었다. 선체를 감싼 강철이 하얗게 백열하고 있었다. 피부가 익어버릴 정도의 열기. 외판의 충격이 줄어들었을 무렵, 이현성이 [강철화]를 해제했다. 시야가 열린 곳에서, 땅이 꺼진 것처럼 배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나는 [마왕화]의 날개를 펼치며 외쳤다. “이지혜!” 황급히 키를 잡은 이지혜가 선체의 움직임을 조절했다. 선체 아래쪽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며 [터틀 드래곤]이 비행을 시작했다. 균형이 안정된 후에야 우리는 주변을 점검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리고 김독자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바다의 한 가운데에 있던 배가 갑자기 추락했다. 그렇다는 것은 즉, 선체를 떠받치던 바닷물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쿠구구구구구! 두 쪽으로 갈라진 대양이 시커먼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펄떡거리며 뛰는 해수종들이 고통스럽게 몸을 뒤척였고, 그런 해수종들을 뜯어 먹는 ‘이계의 신격’의 무리가 보였다. 【갸아아아아아아아아!】 심해의 바닥을 달리는 ‘이계의 신격’의 떼가 꾸물거리며 몰려오고 있었다. 마른 대양의 양쪽에선 다시금 해일이 밀려들었다. “움직여! 빨리!” 내 말에 이지혜가 급히 배를 돌렸다. 【장전.】 그리고 두 번째 장전음이 울려 퍼졌다. 그저 진언을 들은 것만으로도 공포가 스멀스멀 뼛속까지 스며들 지경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이현성도 땀을 폭포처럼 쏟고 있었다. 제아무리 [설화 금속]이라도 저런 수준의 공격을 몇 번이나 견뎌내지는 못한다. “아저씨! 어떻게 좀 해봐!” 안 그래도 어떻게 할 참이었다. 나는 조금 전까지 깨작거리며 만들던 [완벽한 항복의 백기]를 힘껏 치켜들었다. [아이템, ‘완벽한 항복의 백기’를 발동합니다!] [이제 당신의 적들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당신의 완벽한 항복을 눈치챌 것입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행동에 깜짝 놀랍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비겁함을 손가락질합니다!] 비겁하긴 뭐가. 전장에도 안 나온 자식들이. 나는 온 힘을 다해 백기를 흔들었다. “이지혜! 이쪽이다!” 내 외침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태클을 건 것은 오히려 이쪽의 이지혜였다. “아저씨 돌았어?” “이래 봬도 SSS급 아이템이야.” “항복한다고 살려줄 리가 없잖아!” “저쪽 이지혜는 착할 수도 있잖아. 믿어보자.” “지금 상황에 농담이 나와?” 아쉽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마침내 장전이 끝난 포신이 환한 빛을 발하려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열심히 백기를 흔들며 준비된 대사를 날렸다. “어이 이지혜! 네 사부는 백기를 든 상대를 공격하라고 가르쳤냐?” 쿠구······. 그 순간, 처음으로 저쪽의 움직임이 멎었다. 장전이 끝난 포신이 사격 직전에 멈춰서 있었다. 희뿌옇게 흩어지는 수증기 사이로 갑판에 선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계의 신격, ‘가라앉은 섬의 주인’. 999회차의 이지혜가, 긴 머리를 흩날리며 그곳에 있었다. 아득한 세월을 살았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20대의 모습이었다. 마치, 그녀의 시간은 999회차의 ‘결’에서 한 걸음도 채 흘러가지 않았다는 것처럼. 그 세월의 공백을 헤아리듯, 이지혜의 입술이 열리고 있었다. 【깃발······.】 “그래, 이 깃발. 기억나지?” 오래된 페이지들이 내 안에서 넘어갔다. 999회차의 장면이 재현되고 있었다. 지독한 피냄새. 으슥한 지하철의 어둠.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발동합니다!] [당신의 말이 대상의 오래된 설화를 깨웠습니다!] 「그 어둠 속에, 유중혁이 서 있었다.」 깨진 열차의 헤드라이트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간간이 비치는 시야 속에서, 괴수들을 학살한 유중혁의 검이 빛나고 있었다. 「그날, 상처받은 검귀와 패왕이 만났다.」 자신이 고전한 적들을 너무도 쉽게 해치운 검을 보며, 검귀가 몸을 떨었다. 무심히 사라지는 검의 궤적을 따라가며 이지혜는 외쳤다. 「“당신을 따라가면 강해질 수 있어? 그럼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냐고!”」 츠츠츠츠츠츠츳! 눈앞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일대에 몰아치는 개연성의 후폭풍으로 인해 사위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우리를 노리고 달려들던 해수종들과 ‘이계의 신격’들이 스파크에 휘말려 몸부림쳤다. 【무슨일무슨일무슨일무슨일무슨일】 ‘이계의 신격’들이 그들의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왕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먼 기억을 헤매는 듯, 999회차의 이지혜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사······ 부.】 ·····예상대로였다. 처음 ‘은밀한 모략가’를 만났을 때도 그랬고, 999회차의 우리엘을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이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등장인물,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고통스럽게 이빨을 드러냅니다.] 보통 ‘이계의 신격’이 된 존재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다. 자신이 살아온 기억들을 잃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의 ‘이계의 신격’들의 이야기고, 이 ‘왕’들은 다르다. 그들에게는 생전의 기억과 감정이 남아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자신의 설화를 회차별로 분리해서 저장했고, ‘살아있는 불꽃’은 복수에 대한 집착 속에 자신의 자아를 구겨 넣었다. 그렇다면 ‘가라앉은 섬의 주인’은 어떨까.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까. “이지혜! 네가 누구였는지 떠올려!” 999회차의 이지혜가 왜 ‘이계의 신격’이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짐작 가는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이 ‘세계선’을 파괴하지 마! 이곳도 네가 살았던 세계와 같아! 유중혁이 있고, 이현성이 있고, 이지혜가 있다고!” 츠츠츠츠츠츳!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행동을 주시합니다.] [일부 대도깨비들이 당신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눈앞에서 999회차의 설화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눈을 감지 마! 네가 누구를 죽이는지 똑똑히 봐!” 「“눈을 감지 마라. 네 검이 누구를 죽이는지 똑똑히 기억해라.”」 999회차의 이지혜가 기억하는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에게 검도를 가르치고, 생존방법을 가르쳐 준 유중혁. [깃발 쟁탈전]이 시작되고, 충무로 역을 점거한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네가 죽인 이의 죽음을 기억해라. 그것이 네가 상처받을지언정, 검귀가 되지 않을 방법이다.”」 아직 흰색이었던 유중혁의 깃발이, 그곳에서 찬연히 흔들리고 있었다. 적색이 되고, 흑색이 되었던 깃발. 이지혜는 사내의 등에서 오연하게 빛나는 그 깃발을 보며 생각했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나 역시, 아주 많이 했던 생각이었다. [등장인물, ‘가라앉은 섬의 주인’의 설화가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내가 기억하는 999회차의 기억을, 서슴없이 토해냈다. “그때 유중혁이 말했던 거, 모두 잊었어? ‘미리 항복하는 녀석들은 살려주도록 해라! 꿍꿍이가 있는 녀석들은 보통 머리가 좋다! 인력이 부족하니 그런 녀석들도 활용해야 한다!’” 곁에서 나를 보는 이지혜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설마 내가 이런 식으로 적을 설득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비겁한 방법이라고 욕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원작의 기억을 자극해서라도, 지금은 시간을 버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심지어는 그것마저도 잘 된다는 보장조차 없었다. 【발사.】 ······빌어먹을,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되나. 콰아아아아아! 두 번째 사격이 시작되었다. 아까보다는 확연히 위력이 줄어든 포격이었지만, 역시나 정면에서 맞상대하기는 힘든 파괴력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에는 ‘커다란 한 방’이 아니라 산탄이라는 점. 대양을 가르며 날아드는 포탄을 보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현성 씨!” “······아직 준비가 덜 끝났습니다!” 다른 일행들에게도 [설화 금속]을 빌려주었기 때문일까, 이현성의 마력 회복은 무척 더디었다. 선체를 덮은 강철은 아까의 절반. 결국 이번 턴은 [강철화]의 도움 없이 버텨내야 했다. 떨어지는 산탄을 피해 [터틀 드래곤]의 선체가 전력으로 후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배의 움직임과는 반대로, 이지혜는 나와 이현성을 보호한 채 앞으로 나섰다. “아저씨들은 뒤로 빠져. 여긴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뜻밖의 말에 나는 이지혜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으로, 이지혜가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싸움은 내 싸움이야.” 무엇이 그녀를 움직인 것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지혜가 자신의 전장을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999회차가 뭔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잘 몰라. 다만, 다른 회차의 비극을 이유로 이 세계를 파괴하려는 ‘내’가 있다면.” 굳은 결심을 마친 이지혜의 눈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런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나는 그런 이지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바다는 그녀에게 최고의 전장. 지금 당장 믿을 것은 이지혜와 그녀의 전함뿐이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개연성이 화신 ‘이지혜’에게 깃듭니다!] 내가 가진 거대 설화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격을 몰아주었다. 눈부신 황금빛 아우라가 이지혜를 덮었다. 눈을 커다랗게 뜬 이지혜가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고마워, 아저씨.” 이지혜의 전함이 출발했다. 날아드는 산탄의 궤적을 피하며, [터틀 드래곤]의 선수상이 불을 뿜었다. “전군 전진하라!”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기염을 토합니다!] 작은 용머리 선수상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저쪽의 탄환과 맞부딪치며 산화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설화가 되어, 999회차의 설화와 부딪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화신 이지혜를 돕습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의 파급력만이라면, 이쪽도 어지간한 성운에 밀리지 않는다.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화신에게 지휘권을 양도합니다.] [등장인물 ‘이지혜’가 ‘유령함대 Lv.???’를 발동합니다!] 그녀의 주특기인 유령함대가 대양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순양함 급을 넘어서, 이제 거의 항공모함 급에 육박하는 거대한 전함들. 그 전함들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터틀 드래곤]을 호위했다. “장전!” 이지혜의 유령함대가 쾌속 전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저쪽의 포격이 먼저였다. 일대의 바다에 불꽃의 해일이 밀려들었다. 해일을 향해 함대가 돌진했다. 앞을 막아서는 거대한 파도의 벽. 그녀는 오직 한 점만을 바라보았다. “발사!” 집중 사격에 파도 벽의 한쪽이 터져 나갔다. 그 작은 공동을 파고들며, 함대는 전진을 계속했다. 일자를 이룬 대형이 전방위에 포격을 개시했다. 탄환에 맞은 ‘이계의 신격’들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 비명들을 짓밟은 채 이지혜는 앞으로,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과도한 마력의 사용에 피를 토하면서도, 자신이 잡은 키를 놓지 않았다. 「단 한 발이라도.」 섬뜩한 빛을 띤 이지혜의 눈동자가 여전히 한 점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저 두터운 파도의 벽. 그 너머에 존재하는 한 척의 전함. 【장전.】 “장전!”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화신 ‘이지혜’를 응원합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화신 ‘이지혜’를 응원합니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화신 ‘이지혜’를 응원합니다.] [성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 화신 ‘이지혜’를 응원합니다.] [성좌, ‘외눈 미륵’이 화신 ‘이지혜’를 응원합니다.] [성좌, ‘서애일필’이 화신 ‘이지혜’를 응원합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황 속에서도 길을 뚫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 역시 오래된 원작의 한 페이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등장인물 ‘이지혜’의 특성 진화가 임박했습니다!] 원작에서도 겪었던 그녀의 마지막 특성 진화가 이제 막 눈앞에서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오직 지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보내온 개연성.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쌓은 설화. 그리고 죽음조차 불사하는 이지혜의 각오가 합쳐진 기적.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드높은 하늘에서 이지혜의 배후성인 해상전신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지혜를 지키고 보필해 온 성좌.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별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각. 그는 지금 오직 극소수의 성좌들만이 겪는 이벤트를 겪고 있었다. 「화신이, 배후성의 격을 앞지르는 것.」 그렇게 해상전신은 깨닫고 있을 것이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왔음을. 지금이 바로, 자신의 화신을 품에서 놓아줘야 할 때임을. 「그리하여, 바다는 거센 폭풍을 다스릴 단 하나의 군주를 원했으니.」 마치 첫 활공을 시작하는 젊은 새를 위한 축사처럼, 해상전신이 설화를 읊고 있었다. 「그것은, 이 대양에 두 명의 군주가 필요 없음이라.」 [등장인물 ‘이지혜’의 특성이 진화합니다!] [등장인물 ‘이지혜’가 전설급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마침내, 상처받은 검귀가 자신의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등장인물 ‘이지혜’의 특성이 ‘대해의 군주’로 진화합니다!] 【발사.】 “발사!” 아득한 포격음과 함께, 눈앞의 모든 것이 섬광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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