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화
469화
창밖이 어둑해져 있었다. 해가 지는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창문에 들러붙은 벌레떼 때문이었다. 빠르게 기어 다니며 더듬이를 움직이는 메뚜기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메뚜기떼를 일별하며 말했다.
[지금껏 기다린 것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을 텐데 엄살이군.]
[네가······ 기다림에 대해······ 무엇을 알지?]
녀석의 말은 뚝뚝 끊어졌다.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공허 아래에서 메아리치는 듯한 진언. 주변의 대기가 새카만 격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기운을 조절하며 말했다.
[적어도 네가 ‘잊힌 악’이라는 건 알고 있지.]
하얗게 뜬 이길영의 눈썹이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주변에 서늘한 한파가 번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견디며 말을 이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별들이 잊어버린 ‘악’. 같은 ‘악’에게조차 외면당해, 저 마계의 아득한 지하에 봉인되었던 ‘악’.]
흔히 지옥의 가장 깊은 자리는 ‘묵시룡’의 자리라고들 말한다. ‘성마대전’은 묵시룡이 불태운 <하르마게돈> 편이 가장 유명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사실 초기 ‘성마대전’의 재앙에는 묵시룡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색 충운(蟲雲)으로 세상을 휩쓸었던 별들의 재앙.
이제는 사라진 이름들 중, 분명 그런 이름의 재앙이 있었다.
[황충들의 왕. ‘무저갱의 지배자’여.]
내 말에, 허공에서 거센 폭풍과 함께 메시지가 드러났다.
[등장인물 ‘이길영’의 배후성이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무저갱의 지배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무저갱의 지배자, 아바돈.
그는 성마대전의 주역들과 마찬가지로 ‘신화급’에 이른 존재였다.
하지만 ‘선악을 가르는 벽’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싸움을 위해 그를 ‘악’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마계의 ‘72마왕’에도 끼워주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존재는 ‘이계의 신격’이나 다름없었다. 한때 은하를 벌레떼로 물들였던 거악이었음에도, 그는 망각의 감옥에서 수만 년을 지새웠다.
재앙의 시대가 열릴 때 깨워주겠다는 헛된 약속을 믿은 채, 그는 같은 악마들에게조차 배반당했다.
「어느 날, 한 인간이 ‘메뚜기’를 시나리오의 클리어 요소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설화, ‘메뚜기 채집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시나리오에서 발아한 이길영의 설화가, 늙은 악마의 잠을 깨웠던 것이다.
[날 부른 이유를······ 말하라. 건방진······ 성좌여.]
깊은 증오가 깃든 목소리에서, 악마가 받은 상처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신의 적수였던 ‘선’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자신의 동료였던 ‘악’으로부터 배신당한 악마.
[왜 불렀겠어? 어린애랑 계약해서 등 처먹는 짓은 그만두라고 부른 거지.]
[······.]
[계약을 하고 싶으면 나랑 하자고. 그래야 공평하잖아?]
[너의 건방짐을······ 용서하는 것은······ 네가······ 성마대전을 망쳤기 때문이다······.]
희미하게 일그러진 이길영의 입술이 웃고 있었다. 녀석은 거악의 자격을 갖췄음에도 끝까지 ‘성마대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치 그곳에 없는 존재인 것처럼 굴었다.
이해는 갔다. 이제 그 거대 설화는 그의 축제가 아닌 것이다.
[묵시룡과 에덴······ 마계가······ 패망하는 것은······ 무척 즐거웠지.]
[그래서. 그걸로 끝이냐?]
[끝······?]
[아바돈. 너는 여전히 ‘악’이다.]
내 말에 이길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성마······대전은······ 이미 끝났다······.]
[지금은 끝났지.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열릴 거야. 그때는 네가 재앙이 되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질 수도 있어. 모두가 네 수식언을 기억하고, 네 이름 앞에 전율하게 되겠지.]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달콤한 간언이라도 들은 것처럼, 아바돈이 웃었다.
나는 곧장 본론을 말했다.
[긴 말 안 한다. 힘 비축하는 건 그쯤 하고, 우리를 도와라.]
[내······ 가······ 왜?]
[그렇지 않으면 너도 멸망할 테니까. 우리 없이 네놈 혼자 살아나 봐야, 다른 성좌들이 널 받아줄 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오래된, 악······.]
[절대 악 계통의 성좌들은 너를 다음 세대의 ‘가장 오래된 악’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다. 누구도 네 편을 들지 않겠지. 잊은 모양이다만, 아직 ‘마지막 시나리오’에는 ‘바알’ 같은 괴물도 남아 있다.]
[바, 알······!]
아바돈의 목소리가 발작하듯 떨렸다.
마계 서열 1위의 마왕. 마계에서 유일하게 ‘마지막 시나리오’ 지역으로 넘어간 존재이자, ‘아바돈’의 존재를 무저갱에 유폐시켜버린 마왕.
[우릴 도와 ‘대멸망’을 막는다면, 녀석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
주변의 대기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대기에 흐르는 격을 그대로 감내하며 말했다.
[‘무저갱의 지배자’여. 우리가 만들 세계의 ‘가장 오래된 악’이 되어라.]
악마와 손을 잡기로 했다면 이 정도 먹이는 내줘야 한다.
이번 재앙을 막기 위해 아바돈의 힘은 반드시 필요했다.
*
[대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1시간 5분 남았습니다.]
마침내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나는 광장 한쪽에 위치한 일행들을 보며 물었다.
“유중혁은 깨어났습니까?”
“······아직이에요.”
이설화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유중혁이 깨어나지 않았다면, 역시 플랜 B가 최선이다.
“여러분을 믿겠습니다. 이 방법밖엔 없습니다.”
작전 내용 자체는 플랜 A와 똑같았다. 조를 두 개로 나누어, 다가올 ‘이계의 신격의 왕’들을 하나씩 상대하는 것.
다만 플랜 A와 다른 점이 있다면, 팀의 구성이 상이하다는 것이었다.
“1조가 상대할 ‘이계의 신격’은 ‘살아있는 불꽃’입니다.”
살아있는 불꽃.
999회차를 살았던 우리엘의 신명.
“지금 태평양에 나타난 존재는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지만, 대멸망이 시작되면 ‘살아있는 불꽃’도 반드시 나타날 겁니다. 그녀는 ‘은밀한 모략가’를 노리고 있으니까요.”
나는 여전히 봉인구에 갇혀 잠든 ‘은밀한 모략가’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명단부터 알려 드리겠습니다.”
일행들이 긴장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정희원, 이길영, 신유승, 이설화, 공필두, 유상아, 한수영······.”
현재 일행들 중 메인 딜러는 정희원이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공간 통제 능력을 보유한 것은 유상아였고, 누구보다 뛰어난 전황 지휘 능력을 가진 것은 한수영이었다. 이 세 사람이 팀의 메인이어야 했다.
물론,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우리엘, 심연의 흑염룡, 제천대성······.”
내 말에 허공에서 한바탕 스파크가 튀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명령하지 말라며 투덜거립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당신의 의중을 가늠합니다.]
상대가 999회차 우리엘인 만큼, 이쪽에서도 반드시 우리엘을 내보내야 했다. 운이 좋다면 지난번처럼 [끊어진 필름 이론]의 효과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상성인 흑염룡도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신화급 성좌가 된 제천대성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여기에 파천검성, 키리오스, 장하영······ 초월좌 분들께서도 백업 지원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맡겨둬!”
드디어 본격적인 임무에 신이 난 장하영이 외쳤다. 하지만 막상 가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파천검성과 키리오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데스, 페르세포네. 두 분께서도 1조와 함께 가주셨으면 합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걱정스레 바라봅니다.]
듣고만 있던 일행들도 그쯤 되자 표정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정희원이었다.
“잠깐만요, 그렇게까지 1조에 인원이 편중될 필요가 있어요? 그냥 다 1조인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럼 2조는 누군데요?”
“저랑 이지혜, 그리고 이현성 씨가 2조입니다.”
“성좌들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희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또 그럴듯한 자살 계획을······.”
곁에 있던 유상아가 온화하게 미소짓는 것이 보였다. 그래, 유상아 씨라면 내 편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긴고주’의 주문을······.]
그녀의 온화한 입술이 뭔가 끔찍한 것을 외고 있었다. 멀리서 한수영이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흔드는 게 보였다.
‘그러게 내가 안 될 거라고 했잖아.’
나는 다급히 외쳤다.
“잠깐만요! 자살 계획이 아닙니다. 진짜 제대로 된 작전이에요. 그래서 지혜랑 현성 씨도 데리고 가는 거고요.”
“흐음······.”
“저 이제 신화급 성좌입니다. 제가 얼마나 센지 다들 보셨잖아요.”
“중혁 씨 뒤에 숨어서 응원하는 건 잘 봤죠.”
“절 믿어주세요. 신화급 성좌가 어떤 존재인지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신화급 성좌! 포세이돈! 제우스! 제천대성! 그리고 구원의 마왕!”
“뭔가 이상한 게 하나 끼어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신화급이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자 일행들도 조금씩 긴가민가하는 느낌이었다. 역시 가장 효과적인 세뇌는 반복이다.
하늘에서 천둥이 내리친 것은 그때였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개연성을 사용하여 화신체를 실체화한 제천대성이 화려한 뇌운과 함께 등장했다. 근두운 위로 흩날리는 휘황한 백금발.
[막내야, 제정신이냐?]
“그냥 간접 메시지로 하셔도 되는데······ 개연성을 아끼셔야······.”
[신화급이라고 다 같은 ‘신화’는 아니다. 너는 이제 막 신화의 영역에 발을 들인 애송이일 뿐이야.]
제천대성이 그토록 강경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고민하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사실을 실토했다.
“······저도 2조 전력으로 왕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데요, 그럼!”
“이번 작전의 핵심은 속전속결입니다.”
본래 2조의 핵심이어야 할 유중혁이 없는 상황. 1863회차의 힘을 빌려 쓸 수 없다면, 일행을 어떻게 나눠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각개격파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개격파를 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모두가 살아남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2조의 생존은 1조 여러분께 달렸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살아있는 불꽃’을 제압하고 태평양으로 와주세요. 저랑 지혜, 그리고 현성 씨는 여러분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것이, 내가 세운 작전의 첫 단계였다.
*
그로부터 30분 뒤, 나와 이지혜 그리고 이현성은 태평양으로 출항했다.
출항 직전까지 일행들은 제발 다시 생각해 보라며 만류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은 강림만으로 미대륙을 날려버렸다.
만약 녀석이 한반도 근처까지 오길 기다리게 된다면,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인근의 섬들은 모조리 날아 가버릴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나가서 맞이하는 게 최선책이다.
[성좌, ‘해상전신’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물길을 읽습니다.]
이지혜도 이현성도 모두 긴장한 표정이었다.
특히 간만에 시나리오로 복귀한 이현성은 평소보다 훨씬 더 비장한 눈을 하고 있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자신의 머리를 닦습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한반도의 운명을 슬퍼합니다.]
물살을 가르는 [터틀 드래곤]이 마침 울릉도와 독도를 지나쳤다.
그 섬의 정경에 무슨 감명을 받았는지, 갑자기 가슴에 손을 얹은 이현성이 외쳤다.
“······우리 땅은 우리가 지킨다!”
[성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엄숙한 선서를 보기 힘들었던 내가 태클을 걸었다.
“······현성 씨 이제 군인 안 한다면서요.”
“군인만 나라를 지키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이현성이 슬픈 눈으로 자신의 인식표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일행들과 헤어지기 직전, 정희원은 저 인식표를 한참이나 매만지더니 이현성을 놓아주었다.
―꼭 살아있어요, 알겠죠?
이현성이 주인을 기다리는 청순한 소 같은 얼굴로 허공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꼴을 보던 이지혜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아저씨, 왠지 우리 사망 플래그 선 거 같아.”
“······우린 괜찮을 거야. 죽어도 현성 씨만 죽겠지.”
“근데 진짜 나랑 현성 아저씨만으로 충분해?”
“응.”
나는 배의 갑판에 천을 벌려 놓으며 말했다. 방금 전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 구매한 DIY 상품이었다. 적과 조우하기 전까지 완성하는 게 목표였다.
“이해가 안 돼. 현성 아저씨는 그렇다 쳐도 나는 왜? 바다라서?”
“비슷해.”
“하지만 내 배후성은 위인급······ 아니, 설화급이라고. 다가오는 녀석은 신화급이라도 막을 수 없다면서?”
확실히 그녀의 말이 맞았다. 해상전신은 뛰어난 성좌인 건 맞지만, <스타 스트림> 최상위격의 성좌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장군님이 아니라 널 믿는 거야.”
“······어?”
“성좌가 설화급이라고, 화신도 설화급은 아니니까.”
이지혜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눈을 끔뻑이더니 피식 웃었다.
“뭔 소리야. 난 성좌도 아닌데.”
지금은 그렇지.
이지혜는 아직 자신의 가능성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읽었던 원작에서 그녀가 어디까지 나아갔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쩌면 장군님은 이미 아실지도 모르겠군.
혼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찍던 이현성이 다가왔다.
“그런데 독자 씨는 아까부터 뭘 만들고 계신 겁니까?”
“아, 이거요?”
나는 만들던 아이템을 들어 보여주었다.
그러자 곧바로 설명이 떠올랐다.
+
<아이템 정보>
이름 : 완벽한 항복의 백기
등급 : SSS
설명 :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적이 당신의 항복을 알아챌 수 있는 놀라운 아이템입니다. 아군들에게 들키지 않게 사용하세요.
+
이현성은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인가 싶은 표정으로 몇 번이나 눈을 비비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빙긋 웃었다.
“말했잖아요. 죽을 생각 없다고.”
“아니, 하지만 이건······.”
“보이면 바로 항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화를 유도해요. 아시겠죠? 싸우면 절대로 시간 못 끌어요. 나타나는 순간 즉시―”
“아저씨! 뭔가 온다!”
이지혜의 외침과 동시에, 수평선 건너편에서 거대한 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백 미터 높이에 이르는 파도의 벽. 그 벽이, 우리를 덮쳐오고 있었다.
[‘대멸망 시나리오’ 지역에 조기 진입하였습니다!]
[시나리오 지역에서 당장 이탈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탈하지 않을 시, ‘대멸망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당연히 이탈할 생각은 없었다.
[히든 시나리오― ‘대멸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계의 신격’의 침습이 시작됩니다!]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으세요!]
시나리오 설명과 함께, 거대한 격의 파랑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신화급 성좌’가 된 지금도 전신의 솜털이 바짝 일어설 정도의 격.
「별들조차 당해낼 수 없었던 재앙. 이것이 ‘대멸망’이었다.」
하나의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한, ‘이계의 신격’의 진군.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일행들을 보호하기 위해 적당한 설화를 방출하며 파도의 벽을 올려다보았다. 어디선가 ‘이계의 신격’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파도 사이사이로 ‘이계의 신격’들이 단층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벽의 최정상에, 군림하듯 올라선 한 척의 전함. 익숙한 모양의 배였다. 배의 용머리 선수상에서 흉폭한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터틀 드래곤].
그것은 틀림없이 [터틀 드래곤]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쪽 [터틀 드래곤]보다 족히 스무 배는 더 커 보인다는 것.
“아, 아저씨······.”
겁에 질린 이지혜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냐고 묻는 듯한 얼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예상한 바였다. 999회차에서 살아남은 일행들의 명단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서쪽 세계의 재앙 ‘가라앉은 섬의 주인’.」
갈라지는 파도 너머로, 999회차의 ‘결’을 본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장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