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47화
극장에서 내려온 후, 나는 이현성과 유상아를 데리고 곧장 명동역으로 향했다. 동묘역도 중요하지만,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명동 대표를 죽여 깃발을 빼앗았으니, 서둘러 빈 역을 점거해야 했다.
이현성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 인원으로 가도 괜찮겠습니까?”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처우를 결정하러 가는 겁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 사람들은 금방 죽어요.”
그룹을 잃은 ‘방랑자’는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은 이상 다른 그룹의 먹잇감이 된다. 충무로역을 떠난 연합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명동역에 도착한 순간, 우리는 뜻밖의 광경을 보았다.
명동역의 사람들은, 이미 누군가에게 당한 직후였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명동역의 [깃발 꽂이] 근처를 서성이던 특공복의 사내들이 나를 보았다.
사내들은 화들짝 놀라며 회현 쪽으로 빠르게 달아났다. 역시나, 바이크를 가지고 있어서 쫓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움직임.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현성이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죠? 어떻게 된 걸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독자 씨도 모르는 일이라니······.”
이현성이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그나마 다행히도, 명동역의 [깃발 꽂이]는 비어 있었다.
[현재 ‘명동역’을 점거한 그룹이 없습니다.]
[역을 점거하시겠습니까?]
나는 ‘깃발 꽂이’에 등에 메고 있던 깃발을 꽂았다가 다시 뽑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 내 깃발과 똑같은 형상의 깃발이 나타났다.
[‘명동역’을 점거하였습니다.]
[한 번 빼앗은 역은, ‘본진’을 빼앗기거나 깃발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빼앗기지 않습니다.]
[현재 점거지 : 충무로(본진), 명동]
[‘적색 깃발’의 공적치가 상승합니다.]
깃발의 적색이 더욱 진하게 변했다.
[새로운 역을 점거하여 당신의 세력이 확장되었습니다.]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왕의 길’이 시작됩니다!]
+
<히든 시나리오 ― 왕의 길>
분류 : 히든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기간 안에 최소 10개 이상의 역을 점거하시오.
제한시간 : 10일
보상 : ‘왕’의 특성 개화
실패시 : 하루에 최소 1개 이상의 역을 점거하지 못할 시, 당신과 당신의 그룹원은 모두 사망합니다.
+
드디어 끔찍한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하셨다.
한 번 이 퀘스트를 시작한 이상,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왕’의 운명은 어차피 둘 중 하나인 것이다.
왕이 되거나, 죽거나.
[새로운 ‘왕’ 후보가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깃발 쟁탈’의 시작이다.
*
충무로로 돌아온 뒤, 나는 일행들을 불러 모아 내가 받은 히든 시나리오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정희원은 흥미롭다는 표정이었고, 이현성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유상아는 늘 그랬듯,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너무 어려운 시나리오 같은데······ 독자 씨,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천사인 건지, 바보인 건지······.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히든 시나리오를 받은 걸 부러워하기는커녕,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이현성이 말했다.
“그래도 독자 씨가 왕 후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앞으로 폐하라고 불러야 합니까?”
진지한 이현성의 말에 내가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건 바라지 않습니다.”
“어이구 폐하, 히든 시나리오 내용이 맞다면 지금 당장 새로운 역을 점거하러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모쪼록, 신하들의 목숨을 생각하신다면.”
정희원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우릴 공격한 놈들에 대해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곧바로 동묘앞까지 직행할 테니, 정희원 씨랑 이현성 씨가 함께 가 주시겠어요?”
내 말에 유상아가 조그맣게 손을 들었다.
“그럼 저는······.”
“유상아 씨는 이곳에 남아주세요.”
“아, 역시······ 그러는 편이, 더······.”
유상아의 풀 죽은 목소리를 듣자니, 아차 싶었다.
아마, 유상아는 자신의 쓸모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정희원처럼 공격력이 강하지도 않고, 이현성처럼 체력이 높지도 않으니까. 게다가 길영이처럼 강력한 한 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유상아 씨.”
“······네?”
그녀가 가졌던 모든 ‘스펙’은, 이제 새로운 세계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를 질투하기엔 너무 착했다. 그러니, 그녀의 열등감은 속에서 조용히 곪아가고 있을 것이다.
“유상아 씨, 모두가 같은 일을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네, 알고 있어요.”
유상아가 힘없이 웃었다.
나는 최대한 훈계하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했다.
“지하철에서 했던 말 아직 기억하십니까? 독자에겐 독자의 삶이, 그리고 상아에겐······.”
“상아의 삶이 있어요. 네, 기억해요. 스마트폰 메모장에도 적어뒀는 걸요.”
그렇다고 그렇게 금세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면 어쩌자는 건지······.
아무튼 미워할 수는 없는 인물이다. 나는 말을 이었다.
“유상아 씨는 여기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기절한 길영이를 저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습니다. 혹시나 공필두가 딴짓을 할지 모르니 감시할 사람도 필요하고, 불안해하는 그룹원들을 통솔할 사람도 필요합니다.”
유상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게다가 회현쪽 세력도 견제해야 합니다. 저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놈들이 급습할 수가 있으니까요. 공필두가 있긴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유상아 씨의 [실 묶기]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제, 제가 그런 역할을 잘 할 수······.”
유상아가 또 약한 말을 스스로 내뱉고 자괴감에 빠지기 전에, 내가 말을 끊었다.
“저,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유상아 씨에게 직위를 하나 줄까 합니다만.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떠십니까?”
잠시 생각하던 이현성과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유상아 씨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왕이시여······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소서······.”
나는 정희원을 잠시 노려보았다.
지금 저게 재밌다 이거지?
[대표의 고유 권한을 사용합니다.]
[충무로역 대표 ‘김독자’가 그룹원 ‘유상아’에게 권한의 일부를 양도하였습니다.]
[그룹원 ‘유상아’가 충무로역의 ‘부대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그룹원 ‘유상아’는 대표를 대신해 그룹원에게 ‘징벌’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보던 유상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저, 제가 이, 이런 직위를 받아도······.”
“유상아 씨니까 맡기는 겁니다.”
내 말은 진심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모두가 같은 일을 잘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유상아라면, 분명 이 일에 적합할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사과 최고의 인재였던 유상아니까.
“아······ 최선을 다할게요.”
고개를 숙였던 유상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슬쩍 눈물이 비친 모습이었다.
*
우리는 곧장 동역사 쪽 터널로 향했다.
동묘앞까지는 앞으로 세 정거장. 우리는 기절한 강일훈을 데리고 움직이기로 했다. 솔직히 데리고 가는 것 자체가 짐이긴 하지만, 그래도 놈들의 얼굴을 특정하려면 이 녀석이 필요했다. 문득 멀어지는 충무로를 돌아보니, 유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잠깐 모여 주세요!”
역시, 유상아는 안 보이는 곳에서 더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다. 벌써 인원 편성을 끝냈는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지시를 하달받는 소리가 들렸다. 보초도 세우고, 각 분야의 담당도 꾸리고. 아무래도 건물주들이다 보니 유상아 말을 안 듣는 꼰대들도 있겠지만······.
[충무로역 부대표 ‘유상아’가 ‘징벌’을 사용했습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신음.
······괜찮겠지? 그래, 괜찮을 거야.
내 표정을 보던 정희원이 말했다.
“잘 하셨어요. 안 그래도 유상아 씨 조금 침울해 보였는데.”
“딱히 유상아 씨 기분을 고려한 선택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유상아 씨라면 정말 잘 해낼 거라 생각했을 뿐이죠.”
“아, 그래요? 그럼 저도 나중에 뭐 하나 주세요. 어울릴 만한 걸로.”
“망나니는 어떻습니까?”
“······됐어요.”
정희원이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계속 장난이나 치더니, 꼴 좋군.
“근데 그 옥상에 있던 양아치, 그냥 두고 와도 괜찮아요?”
“아, 유중혁 말입니까?”
“그런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아마 괜찮을 겁니다.”
“엄청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요? 무슨 사이에요?”
“그건······.”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희원 씨, 혹시 동생 있어요?”
“······? 네. 왜요?”
“남동생 아님, 여동생?”
“남동생이요.”
“몇 살인데요?”
“올해로 중1이요.”
“동생 있으면 어때요?”
“짜증나죠. 귀찮고, 걸핏하면 대들고······ 학교에서 사고 치는 바람에 엄마 대신 간 적도 있고······.”
한참이나 동생 욕을 하던 정희원의 말꼬리가 잦아들었다.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는 정희원을 보며 내가 물었다.
“그래도 지금은 걱정되죠?”
“뭐······ 어쨌든 가족이니까요.”
“저도 비슷해요.”
“독자 씨도 동생이 있었어요?”
“아뇨, 유중혁 얘깁니다.”
“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정희원이 나를 보았다.
“그래서 좋다는 거예요, 싫다는 거예요?”
“싫어요. 그 자식 때문에 여러 사람이랑 싸웠거든요.”
멸살법이 연재될 초반만 해도 멸살법의 독자가 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반 10화까지는 호기심 때문인지 사람들이 꽤 따라왔었고, 50화까지도 12명이나 따라 왔었다.
그땐 나도 김남운 못지않은 녀석이었는데······ 나도 참 사람 됐지.
그때 나랑 댓글로 싸웠던 녀석들은 잘 있으려나 모르겠네.
어쩌면 내가 지금 잡으러 가는 녀석이 그놈들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두 분, 많이 친해지신 것 같습니다.”
이현성의 말에, 문득 정희원과 너무 붙어서 걷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희원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요, 군인 아저씨. 부러워요?”
“흠. 딱히 그런 게 아니라······.”
그러고 보면 이현성 설정이 남중 남고 공대 군대 테크였나? 새삼 설정값을 떠올리니 이현성이 불쌍해진다.
“동역사에 도착한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멀리서 동역사의 플랫폼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긴장하며 터널 벽에 붙어 조금씩 안쪽을 정탐했다. 혹시나, 병력이 대기하고 있을 것을 대비해서였다. 하지만 우려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정희원이 말했다.
“이상하네요. 보초 하나 없고.”
[깃발 쟁탈전]이 진행 중인데 보초가 없다는 것은, 이미 이 역이 다른 그룹에게 먹혔다는 뜻이었다.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곧바로 동역사의 ‘깃발 꽂이’를 향해 다가갔다.
[해당 역은 이미 ‘동묘앞역’에 의해 점거 중입니다.]
[해당 역을 차지하고 싶다면, ‘동묘앞역’의 깃발을 빼앗거나 깃발 꽂이를 먼저 점거하십시오.]
역시나.
기절해 있던 강일훈의 몸이 꿈틀거린 것은 그때였다.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길래 또 발작이 시작된 건가 싶었는데,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입을 막고 있던 실타래를 풀어 줬더니, 강일훈이 소리쳤다.
“아, 안 돼······!”
“······갑자기 뭐야?”
“도, 동대문······ 동대문역이······!”
말을 더듬는 강일훈의 입에서 주룩주룩 침이 흘러내렸다.
설마 하는 느낌에, 나는 무심코 그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등장인물 ‘강일훈’은 현재 ‘방랑자’ 상태입니다.]
방금 전까지 분명 ‘동대문’ 소속이었던 강일훈의 소속이 달라져 있었다.
정희원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래도 동대문 역이 점거당한 것 같습니다.”
“······에?”
갑자기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그런가.
정보를 흘린 놈들은, 처음으로 이럴 속셈이었구나.
“······이중 트랩이었군.”
명동 그룹과 동대문 그룹을 부추겨 충무로를 치게 만든 놈들은, 처음부터 이들이 ‘충무로’에서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전력이 빈 사이, 놈들은 명동과 동대문을 차지하려 했던 것이다. 아마 명동에서 만났던 정체불명의 특공복들도 그들 중 하나겠지.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길 줄 알고 있었을까?
내 존재를 알고 있었을 리가 없는데?
본래의 3회차에서 ‘충무로역’의 대표였던 자는······.
······아, 그렇군. 이 개자식들이.
그걸 노린 거였나?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 계획을 짠 <선지자들>이란 녀석들은, 틀림없이······.
이현성이 반응한 것은 그때였다.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동대문으로 향하는 터널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상당한 수준의 병장기를 갖춘 무리들이었다.
평균 C급 이상은 되어 보이는 아이템들. 일반 업적 달성으로 벌써 저 정도 무장을 갖추기란 쉽지 않을 텐데······ 심상치 않은 전력이었다.
우리를 향해 먼저 말을 건 것은 무리의 중심에 있던 사내였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팔과 목에 온갖 종류의 아이템들을 두른 사내.
“엇, 강일훈 씨? 이런, 쓸데없는 걸 주렁주렁 달고 오셨군요.”
부들부들 몸을 떨던 강일훈이, 그대로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그렇다는 건, 혹시 저 녀석이?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 놀라운 메시지가 들려왔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이것 봐라?
사내의 시선이 우리를 보았다.
“그쪽 분들은 자기소개를 하실 건가? 아니면······.”
사내의 말에 무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꺼내들었다.
내가 앞장서서 대답했다.
“우린 충무로에서 왔다.”
“충무로?”
그 순간, 파지직― 하고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특성 탐색’을 사용합니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특성 탐색’을 차단합니다.]
정신적 충격을 받은 듯, 사내가 일순 몸을 휘청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가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물었다.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정희원을 한 번 보고, 이현성을 한 번 보았다.
그런 후, 씩 웃으며 사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가장 냉엄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나는 유중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