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46화 “깃발 꽂이 까지만 길을 뚫어!” 달려온 방향으로 봐서, 놈은 ‘명동 그룹’의 대표인 듯했다. 동대문 쪽과는 이미 손발을 맞추고 있었던 모양. [명동 대표 ‘김현태’가 ‘적색 깃발’의 부가 효과를 사용합니다!] 벌써 깃발 색깔까지 바꾼 녀석이다. 게다가 ‘적색’이라. 사실 [깃발 쟁탈전]의 핵심은 바로 깃발의 ‘색깔’에 있었다. 흰색부터 시작해 적색, 남색, 갈색, 보라색, 검은색에 이르기까지. 깃발들은 색깔이 변할 때마다 점점 더 좋은 부가 효과를 제공한다. [명동 그룹이 ‘적색 깃발’의 버프 효과를 받습니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각각 5%씩 증가합니다!] 이미 깃발이 적색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 이상의 역을 점거했거나 다른 역의 대표를 죽여 깃발을 빼앗았다는 뜻이겠지. 눈대중으로 봐도 꽤나 준수한 전투력을 가진 것 같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충무로를 노리다니, 어림도 없지. [등장인물 ‘공필두’가 성흔 ‘무장지대 Lv.6’를 활성화합니다!] [등장인물 ‘공필두’가 ‘사유지 Lv.6’을 활성화합니다!] 공필두는 너무 늦지 않게 움직였다. “하찮은 새끼들이······!” 혹시라도 굼뜬 기색이 보이면 ‘명령권’을 쓸 생각이었는데, 다행이었다. 이대로라면 공필두에게 충무로의 수비를 맡겨도 좋을 것이다. 깃발 꽂이를 향해 달려드는 명동 그룹을 향해, 여덟 개의 미니 포탑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뭐, 뭐야!” “와아아악!” 두두두두두두! 허공에서 터져 나가는 살점들. 과연, 공필두가 사기는 사기다. “크으윽! 모두 모여!” 뒤늦게 ‘명동 그룹’의 인원들이 밀집 대형으로 뭉쳤으나, 무려 레벨 6을 돌파한 무장지대의 포탄들을 견디기엔 역부족이었다. 혼자 긴급 방어전을 클리어하도록 내버려 둔 보람이 있는 정경이었다. 쾅! 콰앙! 콰아앙! 얼마나 많은 탄을 퍼부었을까. 강화 마력탄을 그대로 뒤집어 쓴 명동 그룹원들은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공필두가 적일 때는 무서워도, 아군일 때는 이렇게나 든든하다. “이, 이런 정보는 없었는데!” “후퇴해라!” 그러나 놈들이 도망갈 곳은 없었다. “어딜 가시려고?”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옵션이 발동합니다.] [에테르 속성이 ‘불꽃’으로 변환됩니다.] 촤아아아악! 칼날에서 뻗어 나온 불꽃의 에테르가 녀석들의 도주로에 불의 벽을 만들었다. 당황한 녀석들이 주춤거리는 순간, 공필두의 사격이 이어졌다. 두두두두두! “뚜, 뚫어! 빨리······ 커헉!” 마력 포탄에 직격당한 명동 대표의 머리 위에서 깃발이 풀어졌다. 깃발을 발견한 공필두의 눈이 반짝였다. 하여간 저 자식은. “또 등짝 밟힐래?” 허겁지겁 달려오던 공필두가 석상처럼 굳어졌다. “망할놈······.” 단숨에 철길을 달려간 나는 떨어진 명동 대표의 깃발을 주워들었다. 절망한 명동 대표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져갔다. [당신은 ‘명동 그룹’의 깃발을 획득했습니다.] [당신의 ‘흰색 깃발’이 ‘적색 깃발’의 누적 공적치를 흡수합니다.] [당신의 ‘흰색 깃발’이 ‘적색 깃발’로 진화합니다.] 더 강력한 힘이 몸 안에서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왕의 길’에 한 발짝 가까워졌습니다.] 적색 깃발 이후의 깃발들은 대표뿐만 아니라 주변 그룹원들의 능력치까지 향상시켜준다. 종합 능력치나 S급 이상의 아이템들을 제외하면, 기본 전투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이 바로 이 ‘깃발’이다. 이 때문에, 그룹들은 ‘표적 역’이 아닌 다른 역들까지 노리게 되는 것이다. 다른 ‘왕 후보’들도 각자 깃발의 색을 바꾸기 위해 이미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 세계는 더 강해질수록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으니까. [‘명동 그룹’의 남은 그룹원들이 당신의 처우를 기다립니다.] 나는 주변에 너부러져 있는 명동 그룹원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왜 충무로를 노렸지?” 강일훈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뭔가 찜찜했다. 충무로가 개방된 걸 알게 된 건 그렇다 쳐도, 그렇게 기다렸다는 듯 들이닥치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행들을 관찰하던 묘한 시선도, 게다가 대표가 나라는 걸 알았을 때 놈이 짓던 이상한 표정도······. 이놈들은, 처음부터 이 역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목에 칼날을 가져다 댄 채 물었다. “말해, 누가 너희에게 ‘충무로’의 정보를 알려준 거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역시 <선지자들>일 거라 생각했다. 극장 던전에서 만났던 사내들이 언급했던, 남들이 모르는 ‘히든 정보’를 알고 있는 녀석들. 혹시나 해서 ‘멸살법’의 파일을 꼼꼼히 검색해 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선지자들’이란 이름이 등장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가설은 둘이다. 하나는 내가 모르는 어떤 변수로 인해, ‘안나 크로프트’를 제외한 새로운 예언자가 등장했다는 것. 그리고 둘은······ 나 말고도, 또 다른 ‘독자’가 있다는 것. 솔직히 나는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예언자’ 특성은 그렇게 쉽게 개화하는 게 아니니까. 더군다나 <선지자들>이라는 복수형의 이름도 그렇고······. 뭐, 확실한 건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는 거니까. 나는 공필두를 보며 말했다. “근데······ 좀 적당히 하지 그랬냐?” “무턱대고 덤비는 놈들한테 무슨 자비를 베풀어?” 공필두가 짜증을 냈다. 아쉽게도, [명동 그룹]의 녀석들은 탄환을 너무 많이 맞은 탓인지 도저히 대답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뭘 물어보기가 무섭게, 녀석들은 전부 피를 토하며 죽어 버렸던 것이다. 결국 물어볼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이현성이 들쳐 메고 온 강일훈을 내려다보았다. [실 묶기]에 포박당한 녀석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유상아가 물었다. “처음부터 모든 게 계획이었을까요?” “높은 확률로 그럴 겁니다. 역이 개방되자마자 두 그룹이 연합해서 공격해왔어요. 사전 약속이 되어 있었다는 얘기죠.” “그렇게 선한 얼굴로 다가와서는······.” 유상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쉬우십니까? 동맹을 못하게 되어서요.” “······조금은요.” “사람 너무 믿지 마세요. 앞으로도 상아 씨 생각처럼 일들이 쉽게 풀리진 않을 거예요.” “알아요. 그래도······ 가능하면 믿고 싶었어요. 사람을 믿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요.” 유상아는 나를 보며 말했다. “저기, 두 사람 언제까지 떠들 거예요? 빨리빨리 정보부터 캐내자고요.” 불쑥 정희원의 핀잔이 끼어들었다. 하긴, 지금 인생 충고나 할 때가 아니지. 나는 강일훈의 입을 막고 있던 실타래를 풀어주었다. 강일훈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이제 저를 어떻게 하실 거죠?” “그건 네가 얼마나 쓸 만한 정보를 뱉느냐에 달렸지.” “쓸 만함의 기준은 당신이 정하는 겁니까?” 생각보다는 제법 강단이 있는 녀석인지, 이 상황에서도 말대답을 한다. 그렇다면 강경책을 쓰는 수밖에 없는데······. 정희원이 말했다. “어차피 성좌들도 ‘악인’이라 규정한 놈인데, 고문이라도 해볼까요?” “뭘 귀찮게 고문까지 합니까. 말 안 하면 그냥 죽여버리면 되죠.” “네?” 나는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강일훈이 부들부들 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지금부터 셋을 센다. 셋 안에 입을 안 열면, 너는 죽어. 번복은 없다.” 나는 일부러 [백청강기]를 발동해 지면에 칼을 푹 꽂아 넣었다. “하나.” 까드드드득! [백청강기]의 힘으로 지면이 갈려 나가며, 녀석의 목을 향해 칼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의 파편이 녀석의 얼굴에 튀었다. “둘.”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칼날의 열기가 녀석의 얼굴을 데우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에테르 블레이드는 놈의 눈알을 자를 것이다. “세······.” “동묘앞!” 나는 씩 웃었다. 고문? 그런 건 필요 없다. 숨을 헐떡이는 강일훈이 외쳤다. “···도, 동묘앞에 충무로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자들이 있습니다.” 동묘앞이라, 거기에 누가 있더라? “그게 누군데?” “자, 자기를 <선지자들>이라 부르는······.” 그런데, 놈의 상태가 이상했다. 서서히 눈이 뒤집히기 시작한 녀석이 급기야 죽은 사람처럼 혀를 꺼내 물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설마, [암시]가 걸려 있었나? “유상아 씨, 실타래로 이 녀석 입 막아요!” 녀석의 턱이 닫히기 전에, 다행히 유상아가 소환한 실타래가 녀석의 입을 틀어 막았다. 살짝 소름이 끼쳤다. [암시]까지 사용해서 정보를 통제하고 있었을 줄이야······ 내 생각 이상으로 치밀한 녀석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암시]는 면대면으로 얼굴을 본 상대에게만 걸 수 있는 스킬. 나는 강일훈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운이 좋은 녀석이군요.” 적어도 이 녀석이 있으면, 놈들 중 하나는 확실히 특정할 수 있다. * 본격적인 탐색에 나서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극장의 옥상에 들렸다. “아직 그 자식 안 깨어났어?” 내가 오는 줄 몰랐는지, 이지혜가 흠칫 몸을 떠는 게 보였다. 유중혁은 여전히 기절한 채 이지혜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자식이, 주인공 주제에 팔자도 좋지. 독자인 나도 지금 피곤해 뒤지겠는데. “아래층은?” “걱정하지 말고 쉬어.” “우리 사부······ 이제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트라우마가 좀 남을 수도 있지만.” “······트라우마?” “그 자식 보기보다 정신상태가 허약하거든. 푹 자면 좀 나아질 테니까 조금만 더 수고해줘.” “엄청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 “세상에서 제일 잘 알지.” 나는 건성으로 답하며 품속에서 메모지를 꺼내 볼펜으로 단어들을 써 나갔다. 나는 꽉 채운 메모지를 딱지 접어 이지혜에게 건넸다. “넌 읽지 말고, 있다가 유중혁 일어나면 줘라. 알겠지?” “···알겠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지혜라면 읽어 볼 게 뻔하다. 어차피 유중혁만 알아들을 단어들을 툭툭 던져 놓은 식이라 머리 나쁜 이지혜는 봐도 이해 못 하겠지만. 그나저나, 이 메모지의 정보도 성좌들에겐 ■■■로 보이려나?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를 싫어합니다.] 그렇구만. 돌아서려는데,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근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뭐?” “저기, 아까 새벽에 말야. 우리 사부랑 아저씨랑······.” 왠지 이지혜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젠장, 정희원도 모자라 이지혜까지 들었던 건가? 나도 참 멍청하다. 성좌들만 고려하고 있다가 정작 옆에서 듣고 있던 인간들을 생각하지 못했으니. 저 유중혁도 멍청하다며 비웃을 일이다. 뭐라고 변명하면 좋지? “그, 뭐냐. 둘이 있잖아.” “뭐.” 일단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그러자 이지혜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그러니까, 아까 막 그랬잖아 아저씨가.” “그니까 뭐.” “정신 차려 새끼야! 그딴 감상에 빠지지 않기로 했잖아!” 이지혜가 짐짓 내 목소리를 흉내 내며 외쳤다. 그 말을 갑자기 남의 입으로 들으니, 부끄러워 미칠 것 같다. “처음으로, 그······ 그, 했을 때의 각오! 벌써 다 잊어버렸냐?” “······?” 뭔가 이상한데? 이 자식, 거의 필터링 된 수준으로 들었잖아? “내가 뭐 때문에 널 따라왔는데! 네가 왜 혼자야? 우린 함께라고!” “아니 잠깐만.” “네 곁엔 늘 내가 있잖아! 희망을 잃지 마! 우리 아이를 생각해!” “그런 이야기는 안했······.” “내가 왜 너 때문에 여기까지······!”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잠시 이지혜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걸 어떻게 들으면 그따위로 들리지? “여, 역시 그런 거지? 아저씨랑, 우리 사부랑, 그러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니 맘대로 생각해 인마.” “······역시. 걱정 마, 이 연애편지는 내가 꼭 전해줄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섰다. 등 뒤에서 이지혜의 헛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잠깐만! 근데 아이는 어떻게 낳은 거야?” “유중혁한테 물어봐라.” 그래, 유중혁 모든 건 너에게 맡긴다. 다음 순간, 머릿 속에서 간접 메시지들이 폭발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필터링의 정체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취향을 존중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들의 전우애를 좋아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어이없어합니다.] [6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젠장, 멍청이들이 또 있었군. 어쨌든 이것으로 유중혁에게 전해야 할 것은 전했다. 나는 극장을 내려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유중혁이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을 찍을 동안, 놈이 가져야 했던 이득을 대신 취하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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