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48화
착각이 아니었다.
내 이름을 들은 녀석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설마······?”
놈이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멸살법’에 유중혁에 관한 묘사가 얼마나 나왔더라? 자세한 외양은 안 적혀 있지만, ‘잘 생겼다’라는 표현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얼굴은······
그래도 이 정도면 소설적 허용으로 참작되는 거 아니냐?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녀석의 말투가 한층 공손하게 변해 있었다. 모르긴 해도, 놈의 머릿속은 지금 한창 복잡한 상태일 거다.
적어도 한 가지는 틀림없다.
눈앞의 이 녀석은, 분명 ‘멸살법’을 읽은 놈이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유중혁’이라는 이름을 듣고 놀라는 것을 보면 더욱 확실하다.
놈의 다급한 눈길이 내 곁의 이현성에게 돌아갔다.
[특성 간파]······ 그렇군. 정보를 캐시겠다? 나는 일부러 놈이 이현성을 적당히 관찰할 시간을 준 후 입을 열었다.
“건방진 놈. 눈알 조심해서 굴리는 게 좋을 거다.”
“······헉?”
이걸로 놈은 이현성의 이름을 확인했고, [특성 간파]로 내 특성창을 엿볼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멸살법’을 얼마나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중혁의 얼굴을 모르는 놈이 심증으로 쓸 수 있는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만능 탐지 및 탐지 방어가 가능한 SS급 스킬, [현자의 눈]이다. 그리고 이제, 녀석은 내가 [현자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고작 B급 스킬로 엿보면 모를 줄 알았나?”
녀석의 눈동자에서 시작된 경련이, 이내 얼굴 전체로 번져갔다.
헤매던 녀석의 눈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내가 등에 짊어진 충무로의 ‘적색 깃발’. 그렇겠지. 정확히 거기까지가, 네놈이 찾을 수 있는 ‘유중혁 증거’의 한계치일 테니까.
“근데 이 새끼가······!”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했는지, 전방에 있던 사내들 중 하나가 나를 향해 위협적으로 창을 겨누었다. 정희원과 이현성이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퍼억!
창을 든 사내의 머리가 터지며,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순간 움츠러드는 무리들의 비명. 후두둑 떨어지는 피보라의 너머에서 표정을 심각하게 굳힌 녀석이 보였다.
······이 자식 봐라?
녀석은 무리를 헤치고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귀인 앞에서 못난 광경을 보였군요.”
“네놈은 뭐냐?”
차가운 말투에, 녀석이 애써 표정을 관리하는 게 보인다. 제법 용쓴다. 하긴, 내가 너라도 지금 심장이 터질 것 같을 거다.
“정식으로 소개 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이성국. 동묘앞역의 ‘부대표’를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녀석이, 내 앞에서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마음에 든다.
그럼 어디 본격적인 유중혁 코스프레를 시작해 볼까.
나는 놈을 한 번 쏘아 봐준 후, 냉혹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동묘앞? 그렇군. 그럼 이제 꺼져라.”
“······예?”
“여긴 지금부터 내 역이니까, 내놓고 꺼지란 말이다.”
놈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게 무슨······.”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모양이지?”
나는 동묘앞의 ‘깃발’이 꽂혀 있는 ‘깃발 꽂이’를 내려다보았다.
뒤늦게 이성국이 내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미 차지한 역은 양도할 수 없습······.”
“내가 바본 줄 아나? 네놈 부대표잖아.”
“예?”
“부대표 이상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역은 임의로 양도할 수 있다. 그것도 모르고 있었나?”
“······!”
“셋 셀 때까지 내놓지 않으면, 네놈들 목을 자르겠다. 하나.”
이성국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사내들이 천천히 나를 둘러싸며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정희원과 이현성은 내가 왜 갑자기 이런 미친 짓을 벌이는지 몰라 초조한 기색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농담처럼 들리는 모양이지? 둘.”
10년 전에 읽으셔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신가?
유중혁이 어떤 놈인지 까먹은 모양이군.
그럼 내가 친히 되살려 주마.
[전용 스킬, ‘백청강기 Lv.2’를 발동합니다!]
[‘신념의 칼날’을 발동합니다!]
기이이이잉!
칼날에서 새하얀 섬광이 타오르는 것을 보며, 이성국의 낯빛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이것은 치킨 게임이다.
유중혁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놈이 어떤 녀석이었는지 조금은 알고 있다는 뜻.
초반의 유중혁이 얼마나 무자비한 녀석인지 안다면, 놈은 절대로 이 승부를 계속할 수 없다.
만약 놈이 유중혁을 제대로 모르는 놈이라면?
그럼 그것대로 상관없다.
뭣하면 한 판 붙으면 되고, 질 것 같으면 도망가면 된다.
지금의 나라면, 그 정도 여력은 충분히 있다.
그때, 이성국이 급하게 외쳤다.
“자, 잠깐만요! 드, 드리겠습니다!”
자식, ‘멸살법’을 읽긴 읽었네.
그런데, 제대로 읽진 않았어.
“필요 없어.”
“······예?”
“네놈은 너무 늦게 대답했다.”
“예?”
“여기 하나론 부족해. 동대문도 내놔라.”
곁의 정희원이 경악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막 나가도 되느냐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막 나가도 된다.
아니, 막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유중혁이니까.
내가 유중혁이라는 걸 믿게 만들기 위해서는, 더욱 말도 안 되는 깽판을 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이성국을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내놓지 않으면,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겠다.”
“하, 하지만······!”
“다시 셋 센다. 하나.”
이성국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해갔다.
내가 유중혁이라고 믿기 시작했으니, 아마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일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이랑 적이 되면 어떤 꼴이 될지 빤한 이야기니까.
과연 놈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여기서 임기응변이 어떠냐에 따라, 앞으로 나와 이 녀석들과의 관계도 정해질 것이다.
“도, 동역사까지는 제 권한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동대문까지 넘기는 것은 제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대표님을 만나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훌륭한 대처다.
내가 딱 원하는 수준의 먹잇감이랄까.
이성국은 계속해서 입을 나불거렸다.
“유중혁 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표님이라면, 유중혁 님을 만나시는 걸 크게 고대하고 계실 겁니다. 부디, 저희 그룹이 유중혁 님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나를 알고 있다고?”
“어떻게 유중혁 님을 모르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던 이성국이 순간 핫, 하고 입을 가렸다. 자기도 뭔가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겠지. 아직 유중혁이 유명해지긴 이른 시기니까.
“아, 아무튼 동행해주신다면, 일생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나는 녀석을 지그시 노려봐주다가 대답했다.
그래, 이 정도면 합격이다.
“좋아, 안내해 봐.”
이성국의 표정이 급격하게 밝아지더니,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였다.
“혹시라도 사소한 걱정은 마십시오. 제가 모시는 [왕의 명예]를 걸고, 유중혁 님께 일말의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동묘앞 역 부대표 ‘이성국’이 ‘왕의 명예’를 걸었습니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길 시, 이성국은 스스로 징벌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성급한 녀석이군. 하지만 내가 정말 유중혁이라고 생각했다면, 놈은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 내 예상보다 초반부 유중혁에 대한 이해도가 출중한데?
그럼 그에 맞게 보답을 해줘야지.
“내게 해를 끼쳐? 네놈들이?”
“물론 저희가 다 덤벼도 유중혁 님의 손가락 하나 건드릴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하, 하하. 저, 그럼······ 이쪽으로.”
“잠깐만.”
“예?”
나는 동역사의 ‘깃발 꽂이’를 가리켰다.
“이건 주고 가야지.”
“······.”
[‘동대문 역사문화 공원’을 양도 받았습니다.]
[현재 점거지 : 충무로(본진), 명동, 동대문 역사문화 공원]
[‘적색 깃발’의 공적치가 상승합니다.]
눈앞에서 바뀌는 역의 깃발.
시작이 아주 좋다.
아니,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거야?
“그럼 가자고.”
부들부들 어깨를 떠는 이성국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진다.
이대로 유중혁으로 계속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
잠시 후, 우리는 이성국의 안내를 받아 동묘앞 역으로 진입했다.
내 정체를 알지 못하는 동묘앞 그룹 녀석들은 수군거리는 눈치였지만, 이성국의 태도가 워낙 완강해 반발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무리의 꼬리 쪽에서 걷고 있었다.
아까부터 망설이던 이현성이 나를 보며 기어코 입을 열었다.
“저기, 독ㅈ······.”
쿡!
눈치 빠른 정희원이 이현성의 허리를 찔렀다.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이현성이 신음을 흘렸다.
역시 정희원이다.
상황은 정확히 몰라도 일단은 분위기를 맞출 줄 안다.
나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말 안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충 알겠죠?’
‘네, 대충은.’
나는 정희원을 한 번 보고, 이현성이 들쳐 메고 있는 강일훈을 바라보았다. 지금 제일 요주의 인물은 바로 저 녀석이다.
‘저놈 입단속 잘 시켜요. 알겠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정희원이, 이어서 수상한 몸짓을 했다.
그녀는 과장스럽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넵, 중혁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누가 봤다면 중세의 기사라도 되는 줄 알았을 거다.
우스운 것은 화들짝 놀란 이현성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짓을 벌였다는 것이다.
“바, 받들겠습니다······!”
둘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무리의 선두에 있던 이성국이 깜짝 놀라 이쪽을 돌아보았다. 민망한 상황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되었다. 이성국의 속내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읽을 수 있었다면 분명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역시 유중혁이 틀림없군.」
나와 시선이 마주친 이성국이 재빨리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주인공의 기분이었군 그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동묘앞 역 플랫폼에 도착했다.
꽤 세력을 이룬 그룹이라 그런지 플랫폼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성국의 부대처럼 병장기를 착용한 이들도 있었지만, 역시 대부분은 병장기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마 그룹을 잃은, 다른 역의 방랑자들일 것이다.
“빨리빨리 움직여!”
“아, 알겠습니다.”
그들은 동묘앞 그룹의 감시 속에서 땅강아쥐의 고기를 도축하거나, 괴수들의 사체를 분해해 장비류를 만들고 있었다.
이른바 ‘노예’ 계급.
왕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는 흔히 있을 풍경이었다.
정희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진짜 왕국도 아니고······.”
나는 그런 정희원을 향해 말했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일단 여기서 대기하며 상황을 살피고 있어라.”
“예에에······.”
나는 정희원을 무시하고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내가 모를 추가적인 변수를 고려하기 위해서였다.
‘동묘앞’은 원작에서도 꽤 중요한 터전이 되는 역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곳의 대표는 그 ‘폐인’ 녀석인데.
하지만 <선지자들>이 개입했다면 이야기의 향방이 상당히 달라졌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멀찍이 앞서가는 이성국의 뒤통수를 보며 생각했다.
현시점에서 내가 궁금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저 이성국이란 놈에게도 내가 가진 ‘파일’이 있느냐는 것.
둘은, 저놈과 같은 <선지자들>이 몇 명이나 되느냐는 것.
그리고 굳이 셋을 꼽자면, 저놈도 나와 같은 ‘스킬들’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랬다면 녀석은 처음부터 [특성 간파]가 아니라 나와 같은 [등장인물 일람]을 사용했겠지.
게다가 내가 [등장인물 일람]을 쓸 때 따로 방어 메시지가 뜨지 않은 것을 보면, [제 4의 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즉, 저놈은 유상아나 이길영과 같은 케이스라는 거다.
하긴, 3천 편이 넘는 소설을 읽은 건 나뿐인데, 겨우 수십 편 읽고 만 녀석들한테까지 같은 특전이 간다면 그건 좀 불공평한 일이다.
그렇게 따지면 놈들에게는 ‘파일’이 없을 거라는 추측이 온당하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는······.
근데 저 자식, 아까부터 뭘 저렇게 열심히 보는 거지?
선두의 이성국이 아까부터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민첩에 50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민첩 Lv.20 -> 민첩 Lv.30]
[놀라운 기민함이 당신의 전신에 깃듭니다.]
나는 거의 귀신 같은 속도로 이성국을 향해 접근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냐?”
“허, 허엇?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급히 스마트폰을 끄며 뒤로 숨기는 녀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언뜻 보인 화면이 있었다.
노란색 배경의, 익숙한 말풍선.
순간 위화감이 들었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방금 내가 본 건 분명 ‘단톡방’의 화면이었다.
···인터넷이 된다고? 지금 여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