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화
468화
쓰러진 유중혁은 네 시간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야! 미친놈아! 정신 차려!”
나와 한수영은 번갈아 가며 유중혁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녀석은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찰싹! 찰싹! 찰싹! 찰싹!
게다가 얼마나 뺨이 단단한지, 한참을 때려도 부풀어 오르기는커녕 손바닥이 아플 지경이었다. 한수영이 진지하게 감탄하며 말했다.
“이거 좀 재미있는데?”
“······그딴 소리 할 때가 아냐.”
[대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5시간 12분 남았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곧 ‘대멸망’이 시작되고, 확장된 개연성으로 인해 이계의 신격들의 침습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유중혁이 이 모양 이 꼴이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내 [전지적 독자 시점]과 관련된 문제인가?
[‘등장인물 일람’의 발동이 실패했습니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등장인물 일람]을 다시 사용해 보았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메시지는 같았다.
이 우주에는 정말 많은 유중혁이 있지만, 지금껏 저 메시지가 떠올랐던 유중혁은 하나뿐이었다. 1863회차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향해 사라졌던 그 유중혁······.
그러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설마?
곁에서 우릴 지켜보던 이설화가 물었다.
“[생사단]을 먹여 볼까요?”
얼마 전, 이설화는 드디어 궁극의 회복약인 [생사단]을 완성했다. 일단 먹이기만 하면 어떤 치명적인 중상이라도 회복할 수 있다는 비약.
“벌써 양산 가능한 단계입니까?”
“아뇨. 아직 몇 개 못 만들었어요. 재료가 부족해서······.”
나는 침음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생사단]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의 자아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생사단]이라고 해도, 자아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공단 전체에 가벼운 진동이 울려 퍼진 것은 그때였다.
“독자 씨.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다급히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이현성.
나와 한수영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급히 켠 패널 화면 위로 태평양의 정경이 나타났다.
쿠구구구구!
미대륙을 집어삼킨 파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대한 파도는 투명한 돔의 벽에 가로막혀서 수위만을 높이고 있었다.
아직은 개연성 제약을 받고 있는 까닭이었다.
츠츠츠츠츳!
하지만 개연성의 벽은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며 점점 그 너비를 키우는 접경. 높아진 파도 사이로 ‘이계의 신격’들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5시간 후면 저 경계는 한반도까지 도달할 것이고, 그날로 이 땅은 지구에서 사라질 것이다.
“······김독자, 작전은?”
“있어.”
나는 쓰러진 유중혁을 흘끗 보며 덧붙였다.
“좀 바꿔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사람 불안하게 하지 말고. 원작에선 저거 어떻게 막았어?”
“성운들이 죄다 달려들어서. 저거 막는다고 성좌들 대부분이 다 갈려 나갔지.”
“그 잘난 성좌들은 다 어디 있는데?”
“어디 있긴.”
[다수의 성운들이 당신의 판단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마 저기서, 우리의 멸망을 구경하고 있겠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스타 스트림>의 정의는 모두 죽은 것이냐며 성좌들을 힐난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흔듭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대성운의 성좌들을 한심하게 여깁니다.]
우리측 성좌들의 도발에도, 저쪽은 태연했다.
[일부 성좌들이 모든 것은 <김독자 컴퍼니>가 초래한 일이라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녀석들도 있었다.
[소수의 성좌들이 자신들의 몫을 먼저 앗아간 것은 <김독자 컴퍼니>라고 주장합니다.]
본래였다면 그 어처구니없는 주장에 분개했겠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마음이 평온했다. 녀석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즈>에 방문했을 때, 나는 원숭이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기존에 거대 설화를 구성하고 있던 다수 설화들이, <오즈>와 비슷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최근에 떠오른 어떤 설화가 다른 설화들의 지분을 잡아먹기 시작했으니까요······ 당신들의 설화 말입니다.
본래 이 무대를 이끌어야 할 주역들은 오랜 신화를 쌓아온 성운들이었다. 하지만 그 성운들 중 다수는 우리에게 주요 설화를 빼앗기거나 파괴당했다. 그런 와중에 <스타 스트림>이 우리를 3강급 성운으로 치켜세우기까지 했으니, 기존의 별들이 느낄 박탈감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 별들이 옳은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던 한수영이 물었다.
“그냥 지구 포기하는 게 낫지 않겠냐? 다 같이 ‘마지막 시나리오’로 튈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안 되는 거 알잖아.”
마지막 시나리오로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허락된 이들뿐이다.
설령 지구의 모두를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시킨다 한들,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 점프로 인한 개연성의 후폭풍에 휘말려 사멸하게 될 것이다.
“젠장······.”
한수영의 머릿속에서 [예상표절]이 팽팽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계의 신격의 왕’들은 999회차의 녀석들이랬지. 몇이나 돼?”
“내가 알기로는 ‘은밀한 모략가’를 제외하고 넷.”
“······넷 전부랑 싸워야 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내가 기억하는 ‘이계의 신격의 왕’의 목록을 떠올렸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살아있는 불꽃’.」
「서쪽 세계의 재앙 ‘가라앉은 섬의 주인’.」
「북쪽 우주의 지배자 ‘위대한 심연의 군주’.」
「남쪽 성간을 다스리는 ‘은빛 심장의 왕’.」
999회차의 ‘결’을 보고 ‘이계의 신격의 왕’이 된 존재들.
하지만 아무리 <관리국>이라고 해도, 모든 ‘왕’을 투입시켰을 것 같지는 않았다. 관리국은 통제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이미 태평양에 나타난 게 하나. 그리고 우리 전력이 움직이게 되면 아마 하나가 더 움직일 거야. 그럼 총 둘이지.”
“하나는 태평양의 저 녀석이고, 다른 하나는 999회차의 우리엘인가?”
“맞아.”
“그 녀석들은 얼마나 강해? 그때 보긴 했는데 너무 잠깐 봐서······.”
“‘은밀한 모략가’가 저 꼴 된 게 999회차 우리엘 때문이야.”
“······미친, 그런 것들이 부하까지 이끌고 온다고?”
묵시룡전에서 ‘은밀한 모략가’가 보여준 힘을 한수영은 똑똑히 목격했다. 그러니 저런 반응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 채널 성좌들이 도와주는 건 확실하지?”
“성좌들이 도와도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어. 무엇보다 유중혁이 없는 상태에서는 전력 구성도 맞질 않고.”
본래 내 계획은 일행을 두 무리로 나눠서 ‘이계의 신격의 왕’들을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요 전투원인 유중혁이 빠지게 된다면, 우리는 1863회차의 힘을 빌려 쓸 수가 없다.
콰콰콰콰콰!
패널 화면 너머로, 점차 그 세력을 넓혀 가는 파도가 보였다.
저 대멸망의 영역이 한반도에 닿을 때 방어를 시작하면 그때는 이미 늦는다.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움직이자. 해야 할 일들을 알려줄게.”
남은 시간은 5시간.
그 안에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
한수영이 일행들에게 작전을 하달하는 동안, 나는 이길영을 만났다. 내 호출에 이길영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응접실로 냅다 달려왔다.
“형! 저 불렀어요? 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앉아 볼래?”
역시나 냅다 소파에 앉은 이길영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된다는 듯 눈망울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이길영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 세상을 게임처럼 여겼던 아이.」
처음 이길영을 만났던 순간이 지금도 머릿속에 선연했다. 깜빡거리는 지하철의 조명, 허공을 향해 튀어 오르는 메뚜기의 악몽. 그때 이길영이 잡은 메뚜기가 없었더라면 죽는 것은 나였을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곤충 채집 소년은 이제 중학생 나이가 되었다.」
나는 이길영의 어머니를 살리지 않았다. 그날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가령, 내 인간 혐오가 조금만 덜했더라면. 메뚜기를 집으며 아이의 팔에서 눈에 띄는 상처들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몇 가지 단서만으로 사람의 역사를 지레짐작하는 버릇이 없었더라면.
내가 ‘멸살법’을 읽지 않았더라면.
내가, 김독자가 아니었더라면―
“······했어요.”
응?
“······잘못했어요, 형.”
고개를 숙인 이길영의 모습. 마치 끔찍한 벌을 앞둔 아이처럼 불안하게 떨리는 어깨.
내 눈빛이 무서웠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었을까.
이길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고요······ 제가 그때 계약을 하지 않았다면 신유승이······.”
그제야, 이길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악마와 계약했다.」
눈앞을 스치는 『서유기』의 전경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똑똑히 보았다. 구요성관에게 둘러싸인 이길영이 황색의 폭풍을 발출하는 것을.
지금 이길영은 그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 형이 배후성 힘쓰지 말라고 한 거 똑똑히 기억해요! 절대로 일부러 약속 어긴 게 아니에요. 저는, 저는 진짜······!”
나는 횡설수설하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잘했어.”
“네?”
커다랗게 벌어지는 아이의 눈동자를 보며,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잘했다, 길영아. 그때 네가 아니었으면 우린 다 죽었을 거야.”
이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고 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일행들을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의 설움이란 게 뭔지, 나 역시 잘 알고 있으니까. 이길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또 그러면 곤란해. 알지? 지금의 네 힘으론······.”
“······싫어요.”
“뭐?”
“만약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똑같을 거예요. 또 그 힘을 쓸 거예요. 신유승이랑······, 일행들을 지킬 거예요.”
“길영아.”
잠시 망설이던 이길영이 내 손을 쓱 피했다. 고개를 든 아이의 눈동자로 여러 가지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 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혼내시려고 부른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이 말 하러 왔어요. 저 이제 어린애 아니에요, 형. 나도 자격이 있어요. 나도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시나리오 모두 헤치며 여기까지 왔다고요.”
나는 속으로 침음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그런 내 상념이 한심하다는 듯, [제4의 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 취 급하 지 마네 가 더애 같 아」
‘길영이는 애야.’
「어 차 피 저애 없 으 면 못 싸 워」
「김 독자 좋 은사 람인 척 구는 거 어 울리 지 않 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 정마 내친 구 가 도 와준 다」
······친구?
그 순간,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이길영의 주변에 투명한 벽 같은 것이 일렁거렸다.
[‘제4의 벽’이 자신의 친구에게 호응하고 있습니다.]
나는 허공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곳에, 뭔가가 있었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벽의 감촉이었다. 하지만 아직 불완전한 벽.
머릿속으로 갑자기 여러 가지가 이해되었다.
······그런가. 그때 그 ‘벽’은 이 아이에게······.
“혀, 형이 아무리 말려도······!”
허공을 향해 뻗은 손에 위압감을 느꼈는지, 이길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손을 재빨리 내려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굳게 잡은 채, 한참이나 있었다. 마침내, 아이의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 때까지.
“네 말이 맞다, 길영아.”
“······형?”
“나는······ 우리는, 네 도움 없이는 결말을 볼 수 없어. 우리가 가는 시나리오에 네 역할은 꼭 필요해.”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상처받은 아이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을 나도 인정해야만 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자라난 마음을, 아이가 먼저 꺼내든 용기를 소중히 해야만 했다.
그 용기에 보답할 수 있게, 나 역시 솔직해져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 혼자서 맞서 싸우게 두지는 않아. 이게 내 욕심이고, 내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거야. 이해해 줄 수 있겠니, 길영아?”
이길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을 닦으며 배시시 웃기도 했다.
이 아이와 함께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것에 새삼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선택해야 할 시간이었다.
“네 배후성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내 말에, 이길영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형, 이 녀석은······.”
“걱정 마.”
지금껏 이길영의 배후성을 기용하지 않았던 이유.
그것은, 녀석이 너무나 위험했기 때문이다.
「“···정말 나와 같이 가지 않을 테냐? 저놈보다, 나랑 같이 다니는 게 훨씬 빨리 강해질 수 있다. 그래도 안 갈 테냐?”」
아마 유중혁 녀석도, 그걸 잘 알기에 이길영을 데려가려 했던 것이겠지.
여우 같은 자식.
나는 걱정하는 이길영의 어깨를 가볍게 쥔 채 말했다.
“형 이제 신화급 성좌야.”
며칠 전까지였다면, 나도 가능하면 이 선택은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켠 뒤, 허공을 올려다보며 진언을 발출했다.
[보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 나와.]
내 말투가 변하는 순간, 주변에 둔중한 울림이 퍼졌다. 응접실 안을 가득 채우는 스파크와 함께, 이길영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이길영의 눈자위가 하얗게 변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지를 깨달은 내가, 후폭풍을 뚫고 아이의 어깨를 굳게 쥐었다.
[강림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츠츠츠츠츳!
후폭풍의 여파가 순식간에 줄어들며 내 팔로 통증이 몰려왔다. 나는 통증을 견뎌냈다. 이 정도 쇼맨십은 보여주지 않으면, 녀석과 제대로 딜을 할 수 없었다.
[당신의 격이 국지적인 후폭풍의 여파를 억제합니다!]
급격하게 평온해지는 이길영의 표정.
그리고 다음 순간, 텅 빈 어둠이 깔린 이길영의 입을 통해 곤충의 날갯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나는 기다림에 익숙하지만 너는 너무 오래 걸리는군.]
마치, 수백만 마리의 메뚜기 떼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