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화
467화
Episode 89. 대멸망
[당신의 ■■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귓가에 들려오는 시스템 메시지.
며칠 전부터 내 귓가에 줄곧 반복해서 들려온 메시지였다.
“이제 얼마 안 남은 모양이구나.”
“예.”
나와 어머니는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공단]의 응접실에 설치된 패널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메리카 대륙 멸망! ‘이계의 신격’의 다음 목표는?
―동북아시아 지역에 긴급 대피령 발발!
―성운들이 지구를 버렸다. “어디로 달아나도 도망칠 곳 없어.”
뉴스가 마지막으로 비춘 곳은 한반도였다.
세계 곳곳에서 밀려든 난민들로 한반도 전체가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기대하고 이곳까지 왔는지는 잘 알고 있다.
[다음 대멸망 시나리오 지역은 ‘동북아시아’입니다.]
[대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6일 8시간 24분 남았습니다.]
화면 속의 어머니가 나를 대신해 [공단] 대표로서 발언하고 있었다.
[공단]은 새로운 공민을 막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보기 민망하네.”
“잘 어울리세요. 대통령 같으신데요.”
실제로 지금 [공단]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어머니라 봐도 무방했다. 이곳의 시민들도, 나보다는 어머니를 더 잘 따를 것이다.
“떠나기 전에 서울 사람들에게 얼굴 한번 비춰주거라. 네가 간단히 인사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큰 힘이 될 거야.”
실제로 [공단] 바깥에서 확성기로 외치는 기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원의 마왕님! 돌아오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구원의 마왕님! 멸망을 막을 대책에 대해 한말씀해주십시오!
······대책이라.
나는 어머니처럼 쓰게 웃었다.
“그게 마스코트의 임무라면야.”
그리고 우리는 차를 홀짝였다.
어둡고 침침한 하늘. 당장 벼락이 떨어져 반도가 두 쪽으로 쪼개져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평화롭구나.”
“그러게요.”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말했다.
찻잔 속에서 찻잎이 흔들렸다. 이토록 한가한 티타임이라니. 30년에 달하는 우리 모자의 역사 속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토록 원했던 시간이, 모든 것의 멸망을 앞둔 지금에서야 찾아왔다.
어머니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내가 이 이야기의 끝에서 무엇을 구하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것이 어머니의 방식임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천제의 풍신’께서 너를 찾으신다. 출발 전에 꼭 한 번 더 들르거라.”
······풍백? 그자가 왜 또 나를 찾는 거지?
성마대전에서 있었던 안 좋은 일이 떠올랐다. 마지막 시나리오를 앞두고 또 한바탕 해보자는 건가. 나는 일단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밖으로 나왔다.
바깥엔 나를 기다리던 존재가 있었다.
[용케 여기까지 왔네, 김독자.]
대도깨비가 된 후 신수가 훤해진 비형이었다. 백호의 퍼로 만들어진 롱코트가 제법 잘 어울렸다.
나는 비꼬는 투로 물었다.
“웬일로 기다렸냐?”
[너희 모자지간의 상봉은 구독좌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설화야. 흐름을 끊을 수는 없지.]
어깨를 으쓱한 비형 녀석이 지껄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을 콕콕 찍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투덜거리며 손수건을 건넵니다.]
그걸 또 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던 모양이군, 망할 자식.
[이제 마지막 시나리오가 코앞이다.]
“알아.”
[어련하실까. 너도 알겠지만 마지막 시나리오는······.]
“비형.”
내 말에 비형이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 우릴 선택한 거냐?”
비형의 눈동자에 희미한 파문이 일었다.
지금 녀석의 눈앞에 떠올라 있을 시나리오 창이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
<메인 시나리오 # 98 ―후보 투표>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단 하나의 설화’의 최종 후보를 선택하세요.
제한시간 : ―
보상 : ???
실패시 : 사망
+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는 성좌나 화신들뿐만 아니라 이야기꾼인 도깨비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리고 시나리오의 종막을 결정할 ‘후보 투표’는, 도깨비들에게도 무척 중요한 시나리오였다. 자신의 존재를 건 시나리오.
그런 시나리오에서, 비형은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대도깨비 ‘비형’은 현재 <김독자 컴퍼니>에 투표한 상태입니다.]
처음 비형을 만났을 때, 녀석은 거의 축구공만했다.
오직 채널의 구독좌를 늘리기 위해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학살하고, 잔인한 시나리오를 양산하던 천공의 도깨비.
우리가 만든 설화를 먹고 자라난 그 도깨비는 인간처럼 변했다. 인간의 키에, 인간이 입는 옷을 입고, 인간의 표정을 지었다.
그 도깨비가, 이제 나와 같은 눈높이에서 나를 마주 보며 말하고 있었다.
[나와 계약해라. 그럼 내가 너를 도깨비들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
“······?”
[어룡의 입속에서 네가 내게 했던 말이다.]
분명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설마 진짜 그딴 말을 믿고 날 선택한 건 아니지? 우리가 이길 확률은 낮아.”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아. 네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비형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단]의 광장 앞에 파피루스 전을 함께 치렀던 성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우리엘에게 제압당해 방석처럼 깔린 흑염룡. 티 테이블을 가져와 차를 홀짝이는 페르세포네와 하데스. 파천검성에게 곰방대 같은 담배를 빌려 연기를 뿜는 제천대성.
그들은 실시간으로 흘러나오는 성류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호사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12대 성운’ 목록이 떠돌아······.
―일부 설화급 성좌들은 <김독자 컴퍼니>의 수준이 이미 3강(强)급에 육박한다고 추정하며······.
······3강이라. 지난 싸움의 여파가 크긴 했던 모양이다. 후한 평가야 고마운 일이지만, 방심하긴 일렀다. 아직 후보 결정전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비형의 판단은 조금 다른 듯했다.
[아마 당분간은 괜찮을 거다. 네가 <파피루스>를 쓰러트린 지도 이틀이 지났어. 그동안 <김독자 컴퍼니>에 성운전을 신청해 온 다른 성운이 있었나?]
“······없었어.”
「후보 결정전에서 큰 성과를 거둔 성운은, ‘단 하나의 설화’로 추대될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다.」
단 한 번의 전장으로 우리가 3강의 자리에 오른 것처럼, 다른 성운들도 성운전을 통해 얼마든지 순위 변동을 노릴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한창 선전포고와 전쟁 선포 메시지가 빗발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선전포고는커녕 도발해오는 성운도 없었다.
지구는, 놀라울 정도로 잠잠했다.
“왜지? 우리 설화가 그렇게까지 놀라웠던 건 아닐 테고.”
[가만히 내버려 둬도 멸망하기 때문이지.]
심장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성좌들의 패널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이 보였다.
[성좌들은 네가 지구를 포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후보 결정전’과 별개로, 현재 지구는 대멸망 시퀀스에 돌입해 있다.
북아메리카가 멸망했고, 다음은 동북아시아 지역이다.
원작의 최종 시나리오에서도 외신들을 비롯한 이계의 지배자들이 이 세계를 침습하기 시작한다.
[잊힌 섬들의 융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선의 끝에서, 잊힌 존재들의 침식이 시작되리라.」
본래의 원작이었다면, 여기서 성운들은 나와 함께 싸웠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성운들은 다른 결정을 내린 것이다. 지구를 포기하고, <김독자 컴퍼니>를 제거하는 것. 그것이 ‘마지막 시나리오’를 앞둔 성운들의 결정이었다.
“빌어먹을 놈들이······.”
[일부 성운들이 당신의 판단을 비웃습니다.]
최악의 상황이라 봐도 무방했다.
심지어 지금 이 세계에서 몰려온 이계의 신격들은, 내가 아는 원작은 녀석들과는 다른 녀석들이었다.
나는 얼마 전 ‘은가이의 숲’에서 보았던 999회차의 우리엘을 떠올렸다.
「대멸망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왕들의 습격이 시작된다.」
내 예상이 맞다면, 곧 시작될 대멸망에서 찾아올 왕들은 모두 999회차에서 ‘결’을 본 존재들이다. 그리고 <김독자 컴퍼니>는 이제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왕들을 소환한 건 누구지? 너희 관리국이냐?”
[내가 공개할 수 있는 정보는 없어. 다만······.]
굳은 결의가 어린 얼굴로, 비형이 말을 맺었다.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나는 너희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
“참가하지 않으실 분은, 지금 떠나셔도 괜찮습니다.”
우습지만, 그게 내가 일행들을 향해 한 첫 마디였다.
“다가올 시나리오는 지금까지 겪었던 결전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끔찍한 것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성운에서 이탈할 분이 계시다면······.”
몇몇 일행들이 지루한 미사를 듣듯 하품을 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눈앞의 일행들은 모두 수십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기며 여기까지 왔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 이제 와서 빠질 거였다면 진즉에 빠졌겠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뻔한 질문을 하는 것은.
“저.”
저렇게, 빠지고자 하는 이가 실제로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빠지겠네.”
그는 한명오였다. 아주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한명오가 말을 이었다.
“아주 이탈하겠다는 말은 아닐세. 다만, 마지막으로 다녀올 곳이 좀 있네.”
곁에서 이지혜가 핀잔을 주었다.
“에휴, 아저씬 그냥 빠져. 어차피 도움도 안 되잖아. 또 전투 시작되면 열나게 튈 거면서.”
“······내가 지금은 이래도 왕년에는 마계 백작으로······.”
본래였다면 저 레퍼토리에 들어갈 말은 ‘마계 백작’이 아니라 ‘미노 소프트 부장’이었을 텐데.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자 쓴웃음이 나왔다. 사실 나는 한명오가 어딜 가려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환생자들의 섬’이 있었던 곳에 가시려는 겁니까?”
내 질문에 한명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봉인되었다곤 해도, 그곳엔 아직 묵시룡과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여파가 남아 있습니다. 가시는 건 위험할 겁니다.”
“그래도 다녀오고 싶네.”
성마대전이 벌어졌던 ‘환생자들의 섬’. 지금도 그 암흑차원의 저변에는 죽은 별과 이계의 신격의 시체들이 떠돌고 있을 것이다. 미처 방주에 탑승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존재들.
······어쩌면 개중에는, 마왕 ‘아스모데우스’도 있으리라.
“그 아이만이 내가 이 세계에서 얻은 전부일세.”
한명오의 눈빛에 비장함이 깃들어 있었다.
성마대전 이후, 한명오는 줄곧 우리의 메인 시나리오에 열심히 참여해 왔다. 미노 소프트에서 승진을 위해 부하 직원들의 프로젝트를 빼돌릴 때보다도 훨씬 열심이었다.
실제로 그는 노력의 대가를 받았다. 거대 설화의 지분도 약간이지만 얻었고, 쓸만한 성유물들도 다수 확보했으니까.
모두, 자신의 딸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지금의 그라면, ‘환생자들의 섬’ 인근에 가더라도 혼돈의 여파를 며칠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다녀오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한명오가 채비를 마치고 일어섰다. 이미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온 모양이었다. 일행들 모두가 그를 배웅했다.
‘단 하나의 설화’의 시나리오를 받지 못한다고 해서, ‘단 하나의 설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건 누구에게나 있다. 모두가 각자의 ■■를 찾아 떠날 수 있는 것처럼.
덜덜 떨면서도 포탈을 넘어가는 한명오를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당신의 ■■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결’이 어디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스타 스트림>이 아니다.
돌아보자 일행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회의를 계속하겠습니다.”
*
[대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11시간 8분 남았습니다.]
대멸망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반나절. 저 대멸망을 견뎌내야만, 우리는 마지막 시나리오로 향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원작의 정보들을 모두 점검했고, 한반도를 비롯해 지구 곳곳에 남은 쓸만한 성유물 및 스킬들의 수거를 부탁했다. 일행들은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한수영이 물었다.
“넌 뭐하게?”
물론 나도 할 일이 있었다.
예를 들면, 저 꼬장꼬장한 녀석과 함께 필살기를 연구한다거나.
“네놈도 알겠지만, 지금의 우리가 대멸망에 맞서 싸울 방법은 하나뿐이다.”
[흑천마도]의 날을 가다듬으며, 유중혁이 말했다.
우리엘이나 흑염룡, 제천대성을 비롯한 성좌들이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그들만을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 나타날 이계의 신격의 왕은 ‘은밀한 모략가’를 제외하고도 넷. 그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제천대성이나 명왕 같은 신화급 성좌가 있다 해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맞서 싸울 방법이 하나 있었다.
「영원불멸의 지옥도」
1863회차의 보상으로 ‘은밀한 모략가’를 통해 받은 신화급 설화.
이 설화를 통해 나는 유중혁의 기억을 재현할 수 있었고, 유중혁은 그 기억의 무대를 공유 받아 1863회차의 힘을 끌어 쓸 수 있었다.
문제는.
[독해가 실패했습니다!]
[당신이 독해 가능한 ‘유중혁’의 최대 회차는 ‘978회차’입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당신을 한심하게 바라봅니다.]
······내 독해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독해가 실패했습니다!]
[당신이 독해 가능한 ‘유중혁’의 최대 회차는 ‘778회차’입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당신의 난독을 의심합니다.]
이젠 하다못해 설화까지 나를 무시하고 있다.
며칠째 그런 일이 반복되자, 결국 참다못한 유중혁이 역정을 냈다.
“한심하군. 평생 책만 읽었다고 하지 않았나?”
“······평생은 아냐. 아무튼 이건 좀 다른 문제야.”
나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제 와서?
“이럴 거면 설화를 내놔라. 내가 직접 쓰는 것이 훨씬 낫겠군.”
“그렇게 줄 수 있는 거면 진작 줬지.”
안 그래도 이미 ‘은밀한 모략가’에게 방법을 물어보기도 했었다. 무시당했을 뿐이지만.
“차라리 지난번처럼 빙의 스킬을 써라. 그걸 쓰고 설화를 쓰면 동화율이 훨씬 올라간다.”
아마 [전지적 독자 시점]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가능하면 안 쓰려고.”
확실히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쓴다면, 설화의 사용은 훨씬 간편해질 것이다. 그 스킬을 쓰면 마치 배후성이 화신을 통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스킬을 쓰면 내 화신체가 무방비해져. 가능하면 안 쓰고 이기는 게 최선이야.”
“한심하군. 평소에 수련을 게을리하니 그런 꼴이 된 거다.”
“······모두가 너처럼 무식한 수련을 소화하는 게 가능한 줄 아냐?”
나를 잠시 노려보던 유중혁은 더 이상 가타부타하지 않고 다시 설화에 열중했다.
어쩌면 유중혁 녀석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는 것을.
「얼마 전부터, [전지적 독자 시점]이 김독자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원하지 않을 때도 멋대로 스킬이 발동하거나, 사람의 속을 읽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를 들여다보는 것이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보다 친절한 문장으로 적힌 그의 내면을 읽는 것이 더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독해에 실패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내게 난독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제대로 집중해라 김독자.”
유중혁의 말과 함께, 나는 다시금 설화를 발동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차분히 생각을 점검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아는 유중혁에 관한 정보들은 잊자.
나는 유중혁을 전혀 모른다.
이놈은 내가 전혀 모르는 놈이다.
유중혁은 미친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꽉 막힌 벽창호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조금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거기서부터 출발하자. 마치 ‘멸살법’을 처음 읽었던 그 순간처럼.
츠츠츠츠츠츳!
이상 현상이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당신의 독해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갑자기 유중혁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김독자! 네놈, 무슨 짓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중혁의 눈동자에 빛이 사라졌다.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야, 괜찮냐?”
물어도 답이 없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의 자아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자아가 충돌해?
나는 급한 마음에 녀석의 상태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등장인물 일람’의 발동이 실패했습니다.]
이어서 떠오른 문장은, 내가 아주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는 문장이었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