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화
466화
[다수의 성운들이 당신의 격에 경악합니다!]
[일부 성운들이 새로운 신화급 성좌의 출몰에 경악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관리국’에 「개연성 적합 심사」를 요청합니다!]
츠츠츠츠츳!
[개연성 적합 심사 요청이 거부되었습니다.]
[해당 시나리오는 <관리국>의 임의 개입이 불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볕이 부서지는 광경.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전투에 집중했다.
[흑천마도]에 베인 라의 동체가 발광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엄청난 열의 폭풍과 함께, 한순간 시야가 자욱한 증기로 들어찼다.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었다.
“유중혁! 멈추지 마!”
나는 그렇게 외치며 필사적으로 설화를 읽어갔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설화 효과를 증폭시킵니다!]
내가 읽었던 유중혁의 1701회차를 떠올렸다. 포세이돈과 일대일로 맞서 싸우던 유중혁.
「바다의 경계가 맞닿는 접경에서, 철혈의 패왕이 검을 빼 들었다.」
「“포세이돈. 오늘은 네놈이 죽는 날이다.”」
「1700번에 달하는 생. 그 생이 빚어낸 검술이 광휘를 토했다.」
그 전투를 재현하듯, 유중혁의 검이 움직였다. 점점 더 빨라지는 검이 라의 태양을 망가트리고 있었다.
[성좌, ‘정오의 태양’이 고통스럽게 분노합니다!]
콰가가가가가가가!
내가 읽어낸 무대 위에서 유중혁의 검이 춤을 췄다. 막대한 개연성의 후폭풍이 나를 짓눌렀지만, 네 개의 거대 설화가 서로 호응하며 그 여파를 견뎌냈다.
입안에서 쇠맛이 났다. 갑작스레 상승한 격의 상승을 화신체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운 <베다>가 당신의 전장을 지켜봅니다.]
[성운 <탐라>가 당신의 전장을 지켜봅니다.]
[성운 <올림포스>가 당신의 전장을 지켜봅니다.]
[성운 <아스가르드>가 당신의 전장을 지켜봅니다.]
볼 테면 봐라.
어차피 네놈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싸움이니까.
[채널의 간접 메시지 통제가 해제됩니다!]
지금도 많은 성좌들은 우리의 힘을 무시하고 있을 것이다.
운이 좋아서, 혹은 다른 성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다수의 성좌들이 채널에 추가로 입장합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전장을 지켜봅니다!]
하지만 이제 증명할 시간이 왔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포효합니다!]
<김독자 컴퍼니>는 일방적 후원의 대상이 아닌 너희의 경쟁자이며, 거대 성운 하나쯤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꺾을 수 있는 성운이다.
콰드드득!
라를 몰아붙이는 유중혁의 검격. 떨어져 나가는 태양의 빛살에서 살점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때, 허공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대도깨비 ‘녹수’가 당신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대도깨비 녹수. 중하급도 아니고 대도깨비인 녀석이라면, 시나리오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98번 시나리오만큼은 녀석들도 함부로 개입할 수가 없다.
츠츠츠츳······.
지금부터의 시나리오는 저 ‘대도깨비’들에게도 중요한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해당 시나리오에는 도깨비와 성운이 함께 참가하고 있습니다.]
[모든 도깨비는 자신이 이야기할 ‘후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현재 대도깨비 ‘녹수’는 <파피루스>를 선택한 상태입니다.]
언젠가 ‘성마대전’을 앞두고 대도깨비 허주와 허체가 우리를 찾아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대도깨비들은 말했다.
「지금 결정해라. 여기서 죽을 것인지, 아니면 우리와 함께 마지막 시나리오로 떠날 것인지.」
아마 그 말은, 이 순간을 위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최종막을 앞둔 대도깨비들은 자신의 명예와 안목, 그리고 설화를 걸고 ‘단 하나의 설화’ 후보를 선택하게 된다.
아마 저 녹수란 녀석은 그 후보로 <파피루스>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파피루스>에는 세 개의 태양이 있지.]
내 진언과 함께 유중혁의 화신체가 움직였다.
세상 그 어떤 화신보다 더 빠른 속도로, 영원불멸의 저주가 쌓인 검을 휘둘렀다. [흑천마도]의 검격이 라의 표피를 파고들었다. 어떤 금속도 녹여버리는 그 열기를, 이현성의 설화 금속이 견뎌내고 있었다.
울컥, 하고 라의 심장이 설화를 토해냈다. 저 지고한 신화급 성좌가, 우리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우릴 정말 꺾고 싶었다면, 네 존재 전부가 모두 강림했어야지.]
신화급 성좌 ‘라’. 이미 자신의 ‘결’을 달성하고, 마지막 시나리오의 무대에서 오랫동안 동면에 빠져 있었던 성좌.
[지금껏 냉동고에 틀어박혀 있던 네가, 태양 하나만으로 우릴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나?]
[성좌, ‘정오의 태양’이 고통 속에 울부짖습니다!]
[성좌, ‘정오의 태양’이 성급한 눈길로 주변을 둘러봅니다!]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인가!]
‘라’의 외침과 함께 창공의 별들이 반짝였다.
[베다! 올림포스! 네놈들도 함께하기로 한 것 아니었나?]
······뭐?
그 말과 함께, 어디선가 불길한 기운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늘이 요동치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새카만 창공의 한쪽 복판이 갈라지며 막대한 격류가 떨어졌다.
우리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그 격의 파형을 피해냈다.
[누군가가 성운 <파피루스>에 대한 지지를 선언합니다.]
[누군가가 시나리오에 현현하고 있습니다!]
뒷덜미가 서늘해질 정도로 강력한 격의 소유자. 눈앞의 ‘라’와 맞먹는 누군가가 이 세계로 강림하고 있었다.
[한심하군, ‘라’. 혼자서도 충분하다더니.]
거친 해일을 연상시키는 목소리. 놀랍게도 그곳에 강림한 존재는 1701회차의 유중혁이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던 적수였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포세이돈의 등장과 함께, 허공에서 별들의 군대가 먹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베다>의 설화급 성좌들, 그리고 <로카팔라>들이었다. 심지어 개중에는, 거의 신화급 성좌에 육박한다 알려진 이들도 있었다.
[성운 <탐라>가 <베다>의 개입을 비난합니다!]
[성운 <홍익>이 <올림포스>의 개입을 비난합니다!]
비난이 폭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포세이돈은 자신의 트라이아나로 이쪽을 겨냥했다.
[너희 따위가 감히 이 <스타 스트림>의 종막을 보려고 하는 것이냐?]
<스타 스트림>의 종막. 이 모든 세계의 끝을 결정할 에필로그.
맞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보기 위해 살아왔다.
그랬었다.
[나는 그저 ‘종막’을 보고 싶은 게 아냐.]
사실, 내가 정말 보고 싶은 것은.
“아저씨!”
어느새 동료들이 주변으로 몰려와 있었다.
정희원, 유상아, 이지혜, 이현성, 이길영, 신유승.
우리가 만든 설화들이 밤하늘의 창공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득한 은하 너머로, 우리가 움직여 온 설화의 궤적이 보였다.
이 우주가 아무리 드넓고 광활하다 해도, 나는 어디서든 저 별자리를 찾아낼 자신이 있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환하게 빛납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환하게 빛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환하게 빛납니다.]
나는 벅차는 마음을 숨긴 채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그가 염원했던 설화가 있었다.」
강력한 격을 발출하는 포세이돈이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끄러운 마침표로군. 그만 사라져라.]
밀려오는 <베다>의 군대.
긴장한 일행들이 내 곁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그런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저는 여러분과 같이 만든 설화가 좋습니다. 슬픈 일도, 고통스러운 일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지금 유언하는 거 아니죠?”
내 표정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는지 정희원이 물어왔다.
나는 다만 빙긋 웃었다.
밀려오는 성운의 군세 너머로 텅 빈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아주 오랫동안 어떤 이야기를 보아온 사람은, 마침내 그 이야기를 닮아간다고.
어쩌면 그것은 저 별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죽어라!]
밀려든 <베다>의 군대가 우리를 덮쳐오는 바로 그 순간.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밤하늘이 갈라지며, 염화의 폭포가 쏟아졌다. 그 폭포 위로 올라선 한 성좌가 불타는 검을 든 채 성좌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천사가 그곳에 있었다.
[■발! ■같은 놈들아!]
거친 폭언 너머로 경악하는 성좌들의 진언이 들려왔다.
[······어떻게? 너희는 분명 그곳에서······.]
[■발. 나 우리엘이야. 겨우 그 정도 숫자로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이어서 하늘을 불태우는 보랏빛 염화.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큭큭, 내 양손을 다 쓰게 만들 줄이야. 제법 하네, <파피루스>.]
날아오르는 거대한 용의 날개가 성좌들을 찢어발겼다.
그런 ‘심연의 흑염룡’을 겨냥한 <베다>의 전함들이 일제 사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십 척의 전함이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폭발 사이로 언뜻 보이는 금빛의 여의봉.
[정말이지 귀찮게 하는군.]
연무가 걷힌 곳에, 따분하다는 듯 귀를 파고 있는 백금발의 사내가 있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우리엘, 흑염룡, 제천대성.
세 성좌의 등장에 일대에 파란이 일었다.
[······제천대성! 무슨 짓이냐?]
[이것은 성운전이다! 지금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성좌들의 진언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배후에 현현했다.
[그대들처럼 우리 또한 지지하는 설화가 있을 뿐이에요.]
그 목소리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새카맣고 부드러운 어둠이 우리를 감싸며, 내 어깨에 다정한 손길이 닿았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왔다는 것은.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명왕의 형형한 눈길이 전장을 응시했다. 모든 별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죽음의 사신.
제천대성에 이어 명왕까지, 연이은 신화급 성좌의 등장에 적측의 성좌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성운 <명계>가 <김독자 컴퍼니>를 지지합니다.]
덤빌 테면 얼마든지 덤벼 보라는 듯 두 진영이 격을 뿜어내며 대치했다.
멀리서 일그러진 포세이돈과 라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쪽 진영의 성좌들이 말없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시나리오에서 이탈합니다.]
하나둘 사라지는 적측의 성좌들. 믿었던 신화급 성좌마저 사라지자 이탈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당황한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우왕좌왕하며 라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성운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철수를 선언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쯤 뭉개진 태양만이 남았다. 까드득 이를 가는 라가 우리를 노려보더니, 잠시 후 볕이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성좌, ‘정오의 태양’이 시나리오에서 이탈합니다.]
밀려오는 노을과 함께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마침내, 시나리오의 승자가 가려진 것이다.
「그것은 김독자가 아주 오랫동안 그려왔던 광경이었다.」
그 노을 속에서,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어떤 것은 그가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았고.」
스러지는 노을빛을 응시하며, 유중혁이 [흑천마도]를 쥐고 있었다.
「어떤 것은 그의 의도보다 잘 흘러갔다.」
입술을 실룩이던 한수영이 “아야야” 소리를 내며 붕대를 되감았다.
「의도와는 무관하게 운이 좋았던 경우도 있었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던 유상아가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결국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가 성운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보상 내역을 준비 중입니다.]
일행들도 나도 말이 없었다.
처음 이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첫 승리였다.
우리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겼다.
우리가 정말로, ‘성운’에게 이긴 것이다.
[대도깨비 ‘허주’가 당신의 설화에 침음합니다.]
[대도깨비 ‘가랑’이 당신의 설화에 투표하고 싶어합니다.]
[대도깨비 ‘해솔’이 당신의 설화에······.]
텅 빈 허공에 시스템 메시지만이 들려왔다.
[대도깨비, ‘비형’이 당신의 설화에 투표했습니다.]
[중급 도깨비, ‘비유’가 당신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노을 너머로 비치는 두 도깨비의 그림자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나는 일행들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을 보며, 나는 무언가 말을 해보려 했다.
일행들은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대신해 정희원이 말했다.
“함께 이 세계의 결말을 보러 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