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460화 [선체가 안정화 작업에 돌입합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시스템 메시지를 들으며, 일행들이 멍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토네이도에 휩쓸린 집, 새로운 세계······ 슬슬 다른 일행들도 이곳이 어디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아저씨, 이거 그거지? 『오즈의 마법사』.” 그 말을 먼저 한 건 뜻밖에도 이지혜였다. “알아?” “응, 옛날에 친구가 이거랑 관련된 뮤지컬을 좋아했거든.” 으스대던 이지혜의 표정이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그걸 눈치챈 정희원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근데 『오즈의 마법사』라면 비교적 최근 작품 아닌가요?” “제 기억이 맞다면 1900년에 만들어진 작품이에요.” “역시 상아 언니, 모르는 게 없다니까.” 이지혜가 엄지를 들었다. 정희원이 다시 말했다. “근데 그럼 뭔가 말이 안 되잖아요. 고작해야 백 년밖에 안 된 세계인데······ 현성 씨한텐 ‘강철의 주인’이 그보다 더 오래된 성좌라고 들었거든요.” “희원 씨 말이 맞습니다.” 타당한 의문이었다. 모든 설화는 곧 존재를 구성한다. 그런데 그 존재를 구성하는 설화의 연식이 짧으니 의문이 들 수밖에. “혹시 『서유기』에서는 어떠셨습니까?” “네?” “『서유기』가 먼저 존재했을까요, 아니면 제천대성이 먼저 존재했을까요?” 그 말에 일행들이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강철의 주인’도 이야기되기 전부터 존재했을 거란 뜻이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뭐야 그게.” 말 그대로다. 일단 설화화가 되어버린 존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연식이 조금씩 불투명해진다. 비록 성좌의 시작이 근원 설화였다 해도, 그 근원 설화조차 시간의 경과와 함께 조금씩 변화하기 때문이다. [선체 안정화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입구를 개방합니다.] “뭐, 자세한 건 나가보면 알겠지.” 그 말을 한 한수영이 제일 먼저 폴짝 뛰어내렸다. 신이 난 이지혜와 아이들도 녀석을 뒤따라갔다. “우리도 가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머지 일행들이 선체에서 하차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곳 <오즈>에서 얻게 될 시나리오는 원작의 모험을 그대로 따라간다. 토네이도에 날아온 집이 <오즈>라는 이계에 도착하고, 하필 그 집이 깔아뭉갠 대상이 못된 마녀고······. “뭐야 이거!” 그리고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집 밑에 깔린 마녀를 발견한 것이겠지. 그런데. “······가짜잖아?” 집 밑에 누가 깔려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마녀가 아니라, 마녀의 모양을 한 모형이었다. 마녀라고 우기기도 어려운, 지저분한 상태의 모형. 한수영이 부러진 마네킹 다리를 들며 물었다. “이거 뭔데?” 나는 그 다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전개가 원작과 달라졌다.」 ‘멸살법’에 등장한 행성 <오즈>는 일종의 테마파크였다. 방문객들은 『오즈의 마법사』 원작과 같은 루트를 따라 난쟁이 ‘먼치킨’들을 만나고, 각자 하나씩 배역을 부여받아 에메랄드 성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난쟁이 ‘먼치킨’들이 보이지 않는다.」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스승님께 듣던 것과는 좀 다르군.” 동감이었다. 이 광경은 뭘까. 살풍경한 바람이 부는 은빛 도시에는, 생명체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삭막한데요. 동화 속 세계인데······.” ‘멸살법’을 전부 읽은 나도 <오즈>에 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지는 않았다. 작중에서 <오즈>가 정확히 소개되는 것은 단 한 번, 유중혁의 999회차에서였다(후반부로 갈수록 ‘멸살법’도 스킵 장면이 늘어나서, 나중에는 “오즈에 가서 병장기를 강화할 설화 금속을 얻었다” 정도로 서술되고 만다). 「슬픈 곳이군요. 좀 더 즐거운 전승이 깃들어도 좋을 텐데.」 999회차의 이현성이 한 그 말이, 지금도 기억 속에 명료하게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이현성은 자신의 힘을 각성하고, ‘강철의 주인’의 격과 의지를 계승하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지금 이 광경은 원작과는 완전히 달랐다. 왜일까. 우리가 원작을 많이 바꿨기 때문인가? 하지만 이곳은 <오즈>다. <김독자 컴퍼니>가 바꾼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행성은 아니었다. “요정 같은 애들이 몰려와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면서 우리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냐? 요정은커녕 파리 한 마리도 없네.” 부서진 테마파크의 알림판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폐장한 놀이공원 같은 분위기였다. 아이들은 그마저도 신나는 모양인지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중얼거렸다. “약간 흉가 체험 같아요.” 우리는 일단 바닥에 표시된 노란 길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원작에 따르면 이 길의 끝에는 에메랄드 성이 있다. 실제로 얼마간 걸음을 옮기자, 높다랗게 솟아오른 녹색 탑이 보였다. 그리고 그 탑의 주변으로 자그마한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모든 여정이 저문 곳에 낡은 성을 하나 지었으니」 「그대들은 기꺼이 방문하여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해주기 바란다」 도시의 입구에, 어쩐지 감상적인 느낌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유중혁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나는 여기서부터 따로 행동한다.” “뭐? 왜?” “이곳의 난쟁이들 중에는 뛰어난 대장장이가 있다.” 그 말에 떠오르는 문장이 있었다. 「오즈의 금속에는 가장 오래된 마법이 깃들었으니」 <오즈>는 이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오래된 설화가 깃든 금속의 원산지였다. 본래 원작 유중혁의 무기는 이곳의 강철로 강화된다. <오즈>의 금속과 유중혁의 설화를 뒤섞어 성유물로 거듭난 최강의 패도. 그것이 바로 후반부의 유중혁이 사용하는 성유물 [진천패도]였다. 물론 그건 원작의 이야기고, 이번에 강화할 건 아마 [흑천마도]가 되겠지만. “오즈의 강철은 <스타 스트림>에서 제일 단단하다. 지금은 병기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렇게 선언한 유중혁은 허락조차 구하지 않고 떠났다. 그냥 둬도 괜찮냐는 듯 일행들이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어차피 <오즈>에 온 목적이 한 가지가 아니었으니, 일행을 나눌 필요는 있었다. 이현성을 구하는데 모든 일행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나는 곁에서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는 이지혜를 향해 말했다. “너도 따라가. 전함 업그레이드해야 되잖아.” “아싸!” 신이 난 이지혜가 총총걸음으로 달려갔다. 나는 유상아를 보며 말했다. “유상아 씨도 몰래 따라 가주시겠어요? 저 둘만 보내긴 불안해서. 그리고 애들도······ 아마 꽤 구경할 만한 것들이 있을 거예요.” “얼른 가요! 얼른!” 유상아의 손을 한쪽씩 붙잡은 아이들이 번화가 쪽으로 사라졌다. 시끌벅적하던 일행들이 흩어지자, 약간 허전한 기분이 되었다. 이제 남은 일행은 나와 정희원, 그리고 한수영뿐.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도로시와 똑똑한 허수아비, 겁쟁이 사자가 남았네.” 『오즈의 마법사』에서 주요 구성원은 총 넷이다. 주인공인 도로시, 양철 나무꾼, 똑똑한 허수아비, 그리고 겁쟁이 사자. 내가 물었다. “굳이 ‘똑똑한 허수아비’라고 한 걸 보면 그게 너겠지.” “정답이야.” “나머지는 굳이 묻지 않으마.” “넌 겁쟁이 사자야.” “고맙다.” 우리는 시시덕거리며 도심으로 진입했다. 만약 이곳이 여전히 테마파크였다면, 정말 그런 일행 구성이 되는 것도 재미있었을 것이다. 우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정희원이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몇몇 원숭이 무리가 도시 곳곳에 숨어 우리를 흘끗거리고 있었다. 환영하는 분위기 같지는 않았다. 환영도 마중도 없는 세계. 동화라기보다는 호러 소설이 어울리는 분위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에메랄드 탑 앞에 도착했다. 한수영이 말했다. “꼭 마탑처럼 생겼네.” “실제로 마법사가 사는 탑이니까.” 지금도 살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탑의 입구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딱딱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건을 말하라. “‘강철의 주인’을 뵈러 왔습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굳게 닫힌 문. 아무래도 잘못 말한 모양이었다. 나는 ‘멸살법’을 떠올렸다. 999회차에서는 뭐라고 말했더라? 내가 생각하는 사이, 정희원이 검을 뽑아 들었다. “현성 씨 영혼 돌려줘. 탑 쪼개버리기 전에.” 그녀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대천사의 격. 강렬한 [지옥염화]의 불길이 그녀의 강철검 위에서 활활 타오르는 순간, 머뭇거리며 문이 열렸다. [에메랄드 성이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어차피 시간도 없으니 잘됐다 싶었다. 기회를 잡은 한수영이 감탄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역시 도로시.” “닥쳐. 나 여기 장난치러 온 거 아냐.” 슬그머니 내 쪽으로 붙은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로 속삭였다. ―겁나 무섭네. 저게 사랑의 힘인가? 허공에 강철검을 휘휘 그으며 전진하는 정희원. 본래도 타고난 패기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그 기세가 정말 대단했다. ―그런가 보다. 탑의 내부는 심심했다. 딱히 눈에 띄는 장식물도 없었고, 말 그대로 필요한 것들만 배치되어 있는 정경이었다. 마치 이현성의 군용 배낭 속 같았다. 그렇게 5분쯤 더 걷자, 알현실로 보이는 방이 등장했다. 우리는 바로 열고 들어갔다. 화려한 조명이 켜지며, 알현실의 중앙에 커다란 은빛 마스크가 떠올랐다. 우리 쪽을 응시하는 텅 빈 두 눈이 그곳에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인가.] 알현실 전체에 울려 퍼지는 강철의 진언.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자가 바로 이현성의 배후성인 설화급 성좌 ‘강철의 주인’이다. 아마도 상징체겠지. “그렇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쪽이 ‘구원의 마왕’이로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 은빛 마스크가 말했다. [방문한 목적이 뭐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가.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성의 영혼을 돌려주십시오. 소유권이 당신에게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왜죠?” [그의 영혼은 이 행성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 이건 예상 밖의 말이었다. 돌아보니 정희원이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배후성 계약이 원래 그딴 식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만, 현성 씨는 우리 동료입니다. 당신도 우리 이야기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요.” [······.] “그리고, <오즈>는 이미 충분히 많은 거대 설화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현성 씨의 영혼을 동력으로 사용할 이유가 없을 텐데요?” 『오즈의 마법사』는 지구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설화다. 요즘에야 많이 시들해졌다지만, 한때는 전 지구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야기. 지구에서도 그 정도인데, <스타 스트림>에선 오죽할까. 결코, 동력이 부족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강철의 주인’은 완고했다. [돌아가라. 영혼은 돌려줄 수 없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