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화

461화 “정 동력이 필요하다면 저희 쪽 설화와 교환하시죠. 동력으로 쓸만한 설화들을 공급해드리겠습니다.” [돌아가라고 했다.] 역시, 뭔가 이상했다. 단순히 이현성을 동력으로 사용하려는 거라면, 내 제안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영혼은 반드시 받아가야 하겠습니다. 곧 마지막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당신의 안위만 챙길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격을 개방하자 ‘강철의 주인’은 당황한 듯했다. [감히 이곳 <오즈>에서 나와 대적하겠다는 것인가?]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알현실의 허공에 스파크가 튀었다. ‘강철의 주인’은 설화급 성좌다. 그리고 원작에 따르면 이곳 <오즈>에 한해서 그의 격은, [그대들을 들여준 것만으로도 호의를 베풀었거늘······!] 가히 신화급 성좌에 맞먹는다. 쿠드드드드! 행성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심장처럼 거칠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한수영이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김독자, 돌았어? 여기서 싸우면 어쩌자는······. 나는 설화들을 개방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주력 거대 설화들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알현실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나는 거친 울림을 딛고 앞으로 나아갔다. ‘강철의 주인’이 외쳤다. [물러서라! 물러서지 않으면······!] 역시나. 나를 제압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었는데도, ‘강철의 주인’은 경고만을 반복할 뿐 딱히 아무런 제재도 취하지 않았다. 마치 겁쟁이 사자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대로 마스크를 관통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알현실 뒤쪽의 벽면에 도달했다. ‘강철의 주인’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벽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다음 순간 허공에 홀로그램처럼 떠 있던 은빛 마스크가 사라졌다. “이봐, 원숭이.” 뻥 뚫린 벽의 구멍 너머로, 겁에 질린 채 덜덜 떨고 있는 원숭이 한 마리가 보였다. “진짜 ‘강철의 주인’은 어디에 있지?” * 잠시 후, 우리는 원숭이에게서 정보를 얻어냈다. 한수영이 말했다. “그러니까 ‘강철의 주인’은 여기 없다는 거네.” [이, 이런 짓을 하면 ‘강철의 주인’께서 네놈들을 용서······.] “진언 스위치 꺼. 진언 같지도 않으니까.” “······하실 것 같습니다.” 시무룩해진 원숭이가 말했다. 아마 이 원숭이는 ‘강철의 주인’의 심복일 것이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그는 성좌 행세를 하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의 간접 메시지도 다 네놈이 보낸 거냐?” “그, 그렇습니다. 그래도 ‘강철의 주인’님의 의사를 적극 반영했습니다.” “의사를 반영해?” 내 물음에 원숭이의 시선이 알현실의 가장자리를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강철검이 십자가처럼 꽂힌 제단이 있었다. 나는 그 검의 외관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본래는 저 제단을 통해 주인님의 의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소식이 끊어지면서······.” 나는 제단의 강철검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찌릿, 하고 올라오는 느낌이 있었다. 그 느낌은 일전에도 겪은 적이 있었다. 아주 희미하지만, 이것은 분명 다른 세계선과 맞닿아 있는 감각이다. 그렇다면 ‘강철의 주인’은 다른 세계선의 존재란 뜻이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알기로 ‘강철의 주인’은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양철 나무꾼’인데······ 혹시 다른 누군가가 ‘강철의 주인’의 성좌명을 약탈한 건가?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한수영이 물었다. “너네 행성이 이 모양이 된 것도 그거랑 상관있는 거냐?” “······그렇기도 하고, 관리 소홀 문제도 있습니다. 모든 설화들은 언젠가 쇠락하기 마련이니까요. <오즈>에 마법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곳의 설화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알고는 계신 겁니까?” “몰라.” “<오즈>에는 이제 관광객이 오지 않습니다. 월평균 관광객 두 자리 수를 찍은 게 벌써 삼 년 전의 일이란 말입니다.” 원숭이의 눈빛이 아련하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한때의 영광을 되새기는 것처럼. “한때 <오즈>는 <스타 스트림> 제일의 테마파크 중 하나로······.” 정희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얘기 듣고 싶은 게 아냐. 그래서 현성 씨 영혼은 돌려줄 거야 말 거야?” “그, 그건 좀······.” “왜!” “그나마 관광객 두 자리 수가 유지되는 게 바로 그 ‘이현성’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대체 뭔 소리야?” 한참을 망설이던 원숭이가 말했다. “최근 들어 오래된 거대 설화들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 아십니까?” “거대 설화들의 영향력이 약해져······?” “<오즈>뿐만이 아닙니다. 기존에 거대 설화를 구성하고 있던 다수 설화들이, <오즈>와 비슷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 “왜지?” “최근에 떠오른 어떤 설화가, 다른 설화들의 지분을 잡아먹기 시작했으니까요.” 고개를 든 원숭이가, 원망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당신들의 설화 말입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에메랄드 성에서 얻은 수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원숭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현성을 데리고 가셔도 좋습니다. 대신, <오즈>의 홍보를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도와주면 되냐는 말에, 원숭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이현성이 있는 곳에 가 보시면 압니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였다. 멀리서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 관람차와 낡아 빠진 회전목마가 보였다. 완전히 망해버린 테마파크의 전형이었다. 《오즈에는 마법사가 없다》 본래 이게 테마파크의 이름이었나 보다. 제법 멋들어진 이름이었다. 문제는 그 밑에 붙어 있는 부제였다. 《하지만 이현성은 있다》 ―이현성 ‘기억 체험관’ 전격 오픈! ―체험관 어딘가에 숨어 있는 이현성의 영혼을 찾아내시는 분께 소정의 상품을 드립니다. ······이건 대체 뭐지? 매표소로 향하자 우리를 기다리는 가격표가 있었다. * 입장권 4000코인 * 자유이용권(50% 할인) 3000코인 이건 그냥 자유이용권을 사라는 뜻이다. 매표소 직원이 물었다. ―몇 명 입장하십니까? “셋이요.” ―화신은 한 사람당 3000코인. 성좌는 6만 코인입니다. ······내가 방금 잘못 들었나? 처음 당한 무자비한 차별에 넋이 나간 사이, 정희원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건 회사 돈으로 비용 처리 되죠? 임무잖아요.” “······물론입니다.” “화신 한 장 주세요.” 가볍게 회사 카드를 긁어버린 정희원이 ‘기억 체험관’으로 입장했다.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한수영도 앞으로 나섰다. “여기 화신 한 장―” “잠깐만.” “뭐야, 왜?” “할인 요금제가 있어.” 나는 가격표의 옆에 작게 붙어 있는 문구를 가리켰다. * 성좌 X 화신 커플 할인권 출시! * 자신의 화신과 함께 방문한 배후성을 위한 커플 할인권입니다! 화신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쌓으며 달콤하고 아늑한 시간을 보내세요! 문구를 모두 읽은 한수영이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영이 물었다. “돌았냐?” “아무리 코인이 많아도 여기 쓸 코인은 없어.” 이글거리며 나를 노려보던 한수영은 속으로 뭔가를 계산하는 듯 손가락을 셈하더니, 이내 가격표와 나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뭐 줄 건데?” . . . “······두 사람 지금 뭐하는 짓이죠?” 한수영과 나를 발견한 정희원이 말했다. 그럴 법도 한 게, 지금 우리는 똑같은 모양의 늑대 귀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해당 아이템은 ‘기억 체험관’에 머무르는 동안 벗을 수 없습니다.] [다른 성좌들에게 당신과 화신의 돈독한 관계를 과시하세요!] 한수영이 뻔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데이트 알바 중이야.” “일단 현성 씨부터 찾죠.” 원숭이의 말이 맞다면, 이 ‘기억 체험관’ 어딘가에 이현성의 영혼이 방목되고 있을 것이다. 대체 왜 이런 곳을 돌아다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시간도 있겠다. 우리는 차분한 마음으로 ‘기억 체험관’을 돌아다녔다. 기억 체험관이란 게 대체 뭔가 싶었는데 곧 알 수 있었다. [이현성, 5.4kg의 초대형 우량아로 태어나다!] [5세 이현성, 왕따 당하던 친구를 구하다!] 이곳은 이현성의 삶을 체험하는 곳이었다. [‘자유이용권’ 소지자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입장 시 빙의 체험이 시작됩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여기 들어가면 우량아의 기분을 알 수 있는 건가? 누가 이딴 걸 돈 주고 체험해?” 테마파크는 놀이공원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우리는 각 체험관에 들어가 이현성 또는 이현성의 주변 인물에 이입하여 삶을 체험할 수 있었다. 정희원이 말했다. “우리가 유명해지긴 한 모양이네요. 이런 게 다 만들어지고.” “······저거 궁금한데?” 우리는 어느새 홀린 듯 이현성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짜로 성좌가 된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니 난 정말 성좌다. [17세 이현성, 콩닥두근 첫사랑에 실패하다!] 정희원은 오랫동안 그 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들어가 보시려고요?” “아뇨.” 우리는 계속해서 이현성을 찾아다녔다. 이현성의 영혼은 특유의 설화 반응이 있다. 분명 근처에서 반응이 느껴지는 건 확실한데······. [이현성, 멸악의 심판자와 조우하다!] 계속 돌아다니다 보니, 체험관 중에는 <김독자 컴퍼니>와 관련된 것들도 있었다. [순정강철 이현성! 멸악의 심판자를······.] 정희원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우리는 열심히 정희원의 뒤를 쫓아갔다. 하지만 이현성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체험관 한 줄을 다 확인한 뒤 돌아서는데, 누군가가 그곳에 있었다. 이현성은 아니었다. “어? 아저씨?” 여우 귀 머리띠를 쓴 이지혜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내 질문에, 이지혜가 간단히 설명을 시작했다. 유중혁과 유상아, 아이들을 데리고 대장간에 갔는데 설화금속이 다 떨어져 있었다는 이야기. 허탈한 마음을 안고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이곳을 찾았다는 이야기. 아이들의 보챔에 어쩔 수 없이 ‘가족 할인’을 받아 입장했다는 이야기까지······ 가족 할인? “네놈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돌아보니, 역시나 여우 머리띠를 쓰고 있는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유중혁은 나와 한수영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이현성의 영혼은 되찾았나?” “지금 찾으러 온 거야. 너야말로 설화 금속 안 찾고 여기서 뭐하는 거냐?” “대장간은 휴업 중이었다. 설화 금속이 다 떨어졌다더군.”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것도 같았다. 어쩌면 그것도, <오즈>의 거대 설화가 약화된 것과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유상아의 모습. 그리고 잠자리 날개를 연상시키는 머리띠를 쓴 신유승과 이길영의 모습도 보였다. “언니, 다음에는 저기 들어가 봐요! 저기!” “어머, 저긴 18세 이용가야.” 졸지에 일행들이 다 모인 셈이 됐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이현성을 찾는 편이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정희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다들 이쪽으로 와봐요!” 우리는 곧바로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 다른 체험관보다 주의 사항이 유독 많은 체험관이 있었다. * 이 체험관은 만 18세 이상만 이용 가능합니다. * 가혹행위로 인한 빙의 체험자의 심적 고통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 한국 출신 남성체 화신의 이용에 주의를 요합니다. 나는 기억 체험관의 이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찾은 것 같군요.” 틀림없다. 이현성 특유의 둔하고 느릿한 설화가, 이 체험관으로부터 분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 안에, 이현성이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체험관의 이름을 확인했다. [실수로 탄피를 잃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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