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45화
······시나리오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원작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지만, 이렇게 빨리 침탈이 시작되었던 기억은 없었다. 변수가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곧 어둠 속에서 헤드라이트가 꺼지며,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아, 드디어 충무로 뚫렸네.”
“그 참, 겨우 그런 시나리오 깨는데 오래도 걸린다니까.”
“야, 조용히 해. 다 들리겠다. 그리고 역마다 시나리오 차이 나는 거 몰라?”
내가 눈짓을 보내자, 일행들이 병장기를 들고 일어났다.
전투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자리를 선점하는 것이다.
내가 제일 앞으로 나섰고, 이현성과 정희원이 그다음, 마지막으로 유상아가 따라왔다. 이길영은 아직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다.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 속에서 네 명의 남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입을 열었다.
“거기 멈추시죠.”
“엇? 이런, 이런.”
그는 내가 겨눈 칼날을 보고 깜짝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하얗게 빛나는 바이크의 외견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병장기를 빼는 소리가 들렸지만, 사내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잠깐만요. 진정들 하십시다. 이것 참, 무서워서 얘기도 못하겠구만.”
“무기 내려놓고,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시죠.”
사내는 순순히 자신의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을 든 채 이쪽으로 다가왔다. 불빛이 비치는 곳에서 보니, 사내의 인상은 썩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호감형의 인상. 얇은 눈매가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너무 경계하지 마십시오. 저흰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럼 뭐하러 온 겁니까?”
“일단 제 소개부터 하죠. 저는 ‘동대문 그룹’에서 부대표를 맡고 있는 강일훈이라고 합니다.”
강일훈? 역시 곧바로 떠오르는 인물은 아니다.
게다가 동대문의 부대표라······ 이거, 뭔가 일이 이상하게 풀리는데.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스킬이 작동하는 걸 보면, 일단 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확실한 것 같다.
<인물 정보>
이름 : 강일훈
나이 : 31세
배후성(背後星) : 넉살 좋은 잡담꾼
전용 특성 : 소문 전문가 (일반)
전용 스킬 : [무기연마 Lv.2], [화술 Lv.3], [소문 퍼뜨리기 Lv.1]
성흔 : [소란 피우기 Lv.1]
종합 능력치 : [체력Lv.12], [근력Lv.13], [민첩Lv.13], [마력Lv.10]
종합 평가 : 불행히도 배후성을 잘못 만나 개화하지 못했지만, 적당한 병졸로 쓰이기엔 준수한 능력치를 가진 인물입니다. 진실과 거짓을 가리지 않고 소문을 퍼뜨리므로, 주의를 요합니다.
소문 전문가라······.
벌써 이런 놈들이 활개 칠 때가 왔나.
강일훈이 살짝 초조한 기색으로 나를 보았다.
“그쪽 분은 성함이······?”
“김독자입니다.”
“아, 김독자 씨······?”
내 이름을 들은 강일훈의 표정에 일순 의아한 빛이 스쳐 갔다.
그러나 정말 잠시뿐이었다.
“반갑습니다, 김독자 씨. 깃발을 갖고 계신 걸 보니, 역 대표이신 모양이죠?”
“그렇습니다.”
그는 내 행색을 유심히 보더니, 이내 주변 일행들을 훑듯이 살펴보았다. 아마 우리 측의 전력을 확인하는 듯했다. 눈썰미가 제법인 녀석이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를 잘못 만났다.
“다 구경하셨으면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하핫. 실례했습니다. 저희 쪽도 안전을 염려할 필요가 있어서 말입니다.”
강일훈은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뭐랄까, ‘좋은 제안’을 드리러 왔다고 하면 어떨까요?”
나는 강일훈 쪽 일행들의 행색을 살폈다.
놈의 일행들 중 깃발을 가진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을 어떻게 믿죠?”
“흠, 규칙을 확인하셨다면 아실 텐데요? 저희가 싸우러 왔다면 대표와 함께 왔을 겁니다. ‘깃발 꽂이’가 가능한 건 각 역의 대표뿐이니까요.”
사실이다. 분명 사실이긴 한데.
“제안이 뭡니까?”
“저희는 동맹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동맹이라는 말에 충무로 쪽 그룹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일훈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 충무로역은 방금 개방되었을 테니 잘 모르시겠군요. 사실 ‘네 번째 시나리오’는 이미 이틀 전부터 진행 중입니다.”
“···이틀 전?”
유상아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강일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세 번째 시나리오는 역마다 내용과 기간이 조금씩 다른데······ 혹시 모르셨습니까?”
“아······.”
이제 막 세 번째 시나리오가 끝난 참인데, 그런 것까지 알 턱이 없었다. 원작에서도 충무로는 다른 역들에 비해 후발주자로 시나리오에 참가한다.
즉, 정보 면에서 조금 손해를 보고 시작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일훈의 동맹 제안은 시기적절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이쪽은 정보가 필요하고, 저쪽은 우리의 힘이 필요하다.
문제는 저쪽의 흉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군요. 그쪽에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흐음, 확실히 독자 씨 말씀이 맞습니다. 대뜸 동맹하자는 말부터 꺼내면 믿지 않으실 테니, 먼저 저희 패부터 공개하는 게 좋겠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충무로역’은 저희의 표적 역이 아닙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죠?”
“믿으셔도 좋고, 안 믿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충무로가 저희 표적이었다면, 본대를 전부 끌고 왔을 겁니다. 솔직히 ‘깃발 꽂이’가 제일 취약한 때는 역이 개방된 직후거든요.”
설득력이 아주 없지는 않군.
“만약 우리 쪽의 표적 역이 ‘동대문’이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하, 그런 걱정은 없습니다. 저희 역을 표적으로 삼고 있는 역이 어딘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괜히 여러분을 찾아온 게 아닙니다.”
“일리 있는 소리군요. 각자 노리는 표적 역이 다르니, 서로서로 도와가며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자······ 그런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럴 땐 서로 돕고 살면 좋지 않겠습니까?”
강일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잠시 침묵하는 사이 입을 연 것은 유상아였다.
“저,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강일훈이 유상아를 향해 씩 웃었다.
“네, 뭐죠 예쁜 아가씨?”
“왜 충무로로 오셨나요? 동대문에서 오셨다면 다른 역들과도 동맹을 맺을 수 있었을 텐데요.”
뜻밖에도 예리한 지적이었다.
실제로 강일훈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 그건······ 말씀드렸다시피 충무로역이 ‘방금’ 개방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음, 다른 역들은 이미 동맹 관계가 형성되어 있거든요. 하지만 충무로는 아닐 거라 생각했고······ 하하,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벌써 동맹을 맺은 역이 있으십니까?”
흐음······.
“아뇨, 없습니다.”
내 말에 강일훈이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희 동대문과 동맹을 맺으시죠.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무엇보다도 저희에겐 이번 시나리오에 대한 ‘필승 해법’이 있거든요.”
“필승 해법이요?”
“예, 사실 저희 그룹은 이번 시나리오의 숨겨진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싱긋 웃어 보인 강일훈이 마지막 못을 박았다.
“자세한 건 저희와의 동맹에 찬성하시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
잠시 후, 나는 유상아와 이현성, 정희원을 한데 앉혀 놓고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유상아가 먼저 말했다.
“어떻게 하죠? 일단 저 사람들과 동맹을 맺는 게 좋을까요?”
“난 반대에요. 저 사람들 못 믿겠어요. ······뭔가 찜찜한 느낌도 들고요.”
정희원이 말하자, 이현성이 곧장 토를 달았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저들과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확실히 희원 씨 말대로 신뢰는 안 가지만······.”
마지막으로 일행들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일단은 말입니다······.”
결정을 끝낸 우리는 충무로역 곳곳을 구경 중인 강일훈과 동대문 그룹을 불러들였다.
“일단 그쪽 대표를 만나 보고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아, 그러시겠습니까?”
“대표는 어디 있습니까?”
“동대문 쪽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안내해드려도······.”
“그렇게 하시죠.”
우리는 그들이 타고 온 바이크의 뒷좌석에 탑승했다. 내가 데려가는 인원은 이현성과 유상아, 그리고 정희원이었다. 이길영은 일부러 공필두 곁에 두고 왔다. [다종 교감] 때문에 심력을 많이 쓴 터라,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길영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걸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부르르릉, 하는 시동 소리와 함께 바이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초쯤 지났을까. 내가 입을 열었다.
“근데 말입니다, 강일훈 씨.”
“예?”
“그 사람들이, 충무로에 대해 다른 말은 안 하던가요?”
“예? 그게 무슨······.”
“가령, 거기 가면 ‘유중혁’이란 이름을 가진 엄청 무서운 남자가 있을 거라든가······.”
“하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내 말을 신호로, 우리 일행은 거의 동시에 바이크의 뒷좌석에서 점프했다.
“유상아 씨!”
뻗어 나간 유상아의 [실 묶기]가 바이크 네 대의 바퀴살을 한꺼번에 묶었다. 서로 노선이 엉킨 바이크가 굉음을 내며 서로 충돌했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달려나가던 동대문 그룹원들은 그대로 비명을 흘리며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우리 일행은 유상아가 천장에 묶어둔 실을 붙잡고 허공에 안전하게 매달린 상태였다. 일종의 안전벨트라고나 할까. 유상아의 배후성이 스파이더맨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묘기였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바닥을 뒹굴던 강일훈이 외쳤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나는 터널의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습을 하려면 은신 레벨을 좀 더 높혔어야지.”
이건 뭐, [절대 감각]이 없는 나한테도 걸릴 지경이니.
뭔가 잘못된 것을 눈치챈 강일훈이 소리를 질렀다.
“쳐라!”
그와 거의 동시에, 터널의 사방에 은신하고 있던 인원들이 튀어나왔다.
그럴 줄 알았지. 역시 내 깃발을 노리고 있었군.
[등장인물 ‘정희원’이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해당 스킬 사용에 동의합니다.]
[‘심판의 시간’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어? 안 될 줄 알았는데······ 완전 지들 맘대로 잖아?”
정희원이 의외라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나쁜 놈 찾기 더럽게 힘드네.”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달려간 정희원의 검이 어두운 터널 속을 누볐다. 보이는 것은 [귀살]이 일렁이는 붉은 색 눈동자뿐. 어둠 속에서 핏빛 검광이 몰아치며 사람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뭐, 뭐야!”
“저 미친년이... 으아아악!”
서걱! 서거걱!
열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숫자였지만, 정희원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베어 나갔다. ‘히든 던전’을 클리어한 후, 정희원의 능력치가 얼마나 상승했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나 역시 [백청강기]를 전개해 손쉽게 강일훈을 제압했다.
몇 시간 전까지 무려 유중혁을 상대하던 몸인데, 이런 잔챙이 하나 제압하는 게 어려울 리 없다.
“독자 씨, 충무로가······!”
이현성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니, 충무로에서도 한창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떠나자마자 충무로를 기습한 놈들일 것이다. 나는 유상아에게 부탁해 강일훈을 포박한 후, 곧장 충무로로 달려갔다.
플랫폼에서는 이미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새끼들 뭐야!”
명동 쪽에서 달려온 수십 명의 그룹원들이 충무로의 사람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놈들이 들고 있는 무기가 뭔가 익숙했다.
“저, 저거 김 씨가 들고 있던 무기야!”
아무래도 명동 쪽으로 향했던 ‘건물주 연합’은 이미 저 녀석들에게 당한 모양이었다. 하긴, 저놈들에게 그룹을 잃은 방랑자들은 살아 있는 코인 덩어리로 밖에는 안 보일 테니까.
달려드는 적들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머리에 붉은색 깃발을 두건처럼 두른 녀석이었다.
“제압은 나중에 해! 깃발만 꽂으면 끝난다!”
그렇군. 저놈이 ‘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