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44화 깃발이 손에 휘감기는 순간 몸속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용솟음치는 게 느껴졌다. 원래는 3회차의 유중혁이 가져야 했던 거지만······ 별 상관없겠지. 그놈이야 원래 세잖아? [‘김독자’가 ‘흰색 깃발’을 차지하였습니다.] [앞으로 5분간 흰색 깃발의 소유주가 변하지 않으면, 충무로역은 그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깃발을 빼앗으면 소유주는 바뀌며, 5분 타이머는 리셋됩니다.] 뒤이어 허공에 타이머가 떠올랐다. [5:00] 공필두의 안색이 허옇게 질리며 나를 가리켰다. “깃발을 빼앗아! 5분 안에만 빼앗으면 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연합원들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오호, 그러시겠다? 이현성이 나를 보았다. “독자 씨!” “현성 씨!”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내 손에서 날아간 [헤라클레스의 방패]가 이현성의 손에 착, 하고 감겼다. “이, 이건?” “깔쌈한 걸로 하나 뽑았습니다. 이전에 쓰던 건 버리세요.” 이현성의 얼굴에 함지박 같은 웃음이 걸렸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특수 스킬 ‘광역 방어’를 발동합니다!] 헤라클레스의 방패를 중심으로 펼쳐진 반투명한 방어막이, 우리 일행을 조그맣게 둘러쌌다. 역시, A급 아이템쯤 되면 쓸만한 보조 스킬이 붙어 있단 말이지. “우왓, 이거 뭐야!” 허공에 생겨난 방어막에 부딪친 사람들이 신음을 흘렸다. 낡은 병장기로 퉁탕퉁탕 방어막을 두드려 보았지만, 고작 E급이나 F급의 장비로 방어막을 부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연합원들이 의지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필두 씨!” “모두 비켜!” 그새 [무장 지대] 레벨이 제법 올라갔는지, 벌써 소규모 무장지대가 공필두의 발밑에 펼쳐지는 것이 보였다. 지대를 국지화해 쿨타임을 줄여 보려는 속셈인가 본데, 제법 머리를 쓰는군. 이거, 아무래도 제대로 굴려줘야 정신을 차리겠는걸. “필두야, 내가 아직 일어나라고 안 했는데?” “으헉?” 공필두가 바닥에 머리를 쾅, 박더니 다시 한번 납죽 엎드렸다. [계약 조항에 따라 ‘명령권’이 발동합니다!] “내가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바닥에 머리 처박고 있어.” 공필두의 비명에, 당황한 연합원들이 소리쳤다. “피, 필두 씨?!” “이, 이거 일으켜 줘! 빨리!” 들러붙은 연합원들이 허겁지겁 공필두를 일으키기 위해 애썼지만, 워낙 덩치가 큰 공필두라 그런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그 포탑도 거슬리니까 좀 끄고.” [등장인물 ‘공필두’의 ‘무장지대 Lv.6’가 해제됩니다.] “이, 이 개새······!” “걸레 문 입도 좀 닥치고. 30분만 묵언수행 해라.” [계약 조항에 따라 ‘명령권’이 발동합니다!] “읍읍읍읍읍!” 단지 몇 마디에 믿었던 공필두가 무력화되자, 건물주 연합원들은 완전히 패닉에 빠진 얼굴들이었다. 물론 놀란 것은 이현성이나 유상아, 정희원을 비롯한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자, 상황 파악은 다들 하신 것 같고, 이제 이야길 좀 해볼까 하는데······.” 주춤주춤 물러나는 사람들이 보인다. 대충 숫자를 세어보니 남은 인원은 총 스물 아홉. 건물주 연합원이 스물, 나와 내 일행을 비롯한 소수 인원이 아홉이었다.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처음부터 인원이 너무 많으면 관리하기 까다롭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지금 여러분들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편을 가를 시간이다. “하나는 충무로를 나가서 다른 역으로 가는 거고. 둘은 저와 같이 이곳에 남는 겁니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그냥 대답만 하세요. 여기에 남을 거냐,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갈 거냐.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에 결정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니면 여러분들 모두, 목숨이 위험해질 테니까요.” 사람들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나를 보았고, 누군가는 공필두를 보았고, 또 누군가는 다른 역으로 가는 터널길을 보았다. 시선만으로도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을 때가 있다. “굳이 떠나겠다는 사람은 잡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남는다면, 여러분들 모두 제 통제에 따라 주셔야 합니다.” “통제······?” “‘건물주 연합’과 같은 행태는 더이상 용납하지 않습니다. 소수 그룹의 횡포도 허락할 수 없고요.”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소수 인원들이 하나둘 내 쪽에 붙기 시작했다. 건물주 연합에 호되게 당했던 그들이야, 차라리 나한테 붙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좋은 판단이다. 연합원들 중 몇 명이 외쳤다. “결국 네가 왕 노릇 하겠다는 거 아냐!”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래도 누구처럼 세금이나 생존비를 걷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 그룹에 들어가면 우리 안전은 보장되는 겁니까?” 연합원이었던 사내 중 하나가 물었다. 하긴, 세입자들을 그렇게나 괴롭혀 댔으니 그런 걱정을 할 법도 하지. “외부로부터의 안전은 어느 정도 보장하겠지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 간섭하진 않을 겁니다. 개인 간의 다툼은 알아서 해결하셔야 합니다.” “그, 그런······.” “1분 주겠습니다. 그때까지 모두 결정하세요.” 1분을 모두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이미 사람들은 제각기 결심을 마친 얼굴들이었으니까. 연합원들 중 몇 명은 굳게 결심한 듯 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비교적 젊은 축들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못한 과거가 있긴 하지만, 부디 너그러운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해요. 용서는 저한테 빌어야 할 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그룹 내의 일부 인원이 당신에게 신뢰감을 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몇몇 인원들은, 결국 충무로를 떠나기로 결심한 듯했다. 그들은 쓰러진 공필두를 일으켜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 애썼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아, 공필두는 두고 가시죠. 그 녀석은 내 소유거든요.” “그게 무슨······!” “결정했으면 빨리 떠나시죠.” 냉정한 선언에 다섯 명의 연합원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러섰다. “강 씨! 정말 같이 안 갈 거야? 그놈 밑에 있어 봐야 좋을 거 하나 없어!” “다들 얼른 가자고! 진짜 저놈 따까리로 살 거야? 어떤 놈인지 잘 봤잖아!” 그러나 더 이상의 이탈자는 나오지 않았다. 욕설을 내뱉은 다섯 명의 사내들이 미련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몇 번 돌아보더니, 이내 명동 쪽 터널길로 나아갔다. 다른 곳에 터전을 잡고 새로운 ‘건물주’가 되려는 속셈이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의 계획은 실패할 것이다. 네 번째 시나리오에서 저런 ‘방랑자’들은 포식자들의 좋은 먹잇감이니까. 마침 5분이 경과했는지,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서브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1000코인을 보상으로 받았습니다.] [흰색 깃발의 효과로 충무로역의 진정한 ‘대표’가 되었습니다.] [현재 당신의 무리 : 24명] [왕의 칭호를 얻기에 아직 당신의 명성이 미약합니다.] 왕의 칭호라······. 하긴, 흰색 깃발로 ‘왕’의 칭호를 얻는 건 힘들겠지. 제대로 된 ‘왕의 길’을 걸으려면 깃발의 색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물론 흰색도 나름대로의 ‘권한’은 있다. [흰색 깃발의 효과로 충무로 그룹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반발하는 그룹원에게 ‘징벌’을 내릴 수 있습니다.] [현재 5명의 탈주 인원이 발생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사내들에게 ‘징벌’의 효과를 조금 보여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공포 정치는 사람들을 다스리는데 유효하지만, 그런 폭정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이현성은 존경스런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유상아와 정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직은 오합지졸의 인원들이지만, 이 정도면 첫 출발로서는 나쁘지 않다. 잠시 후, 허공에서 비형이 나타났다. [오호라, 대표가 뽑혔군요. 그럼 이제 본 게임으로 들어가 보자고요!] [네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활성화되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4 ― 깃발 쟁탈전 > 분류 : 메인 난이도 : C 클리어 조건 : (내용이 많아 창이 숨겨져 있습니다) 제한시간 : 12일 보상 : 2000코인 실패시 : ??? + 나는 클리어 조건을 눌러 보았다. 그러자 장문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 [클리어 조건] 1. 모든 역은 ‘깃발 꽂이’를 점거할 수 있는 ‘깃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 깃발은 오직 역의 ‘대표’만이 소지할 수 있습니다. 2. 다른 역의 그룹으로부터 ‘깃발 꽂이’을 지켜야 합니다. 역내의 ‘깃발 꽂이’에 다른 그룹의 깃발이 꽂힐 시 역을 빼앗기며, 역을 빼앗긴 그룹의 처우는 ‘깃발 꽂이’를 점거한 그룹에 의해 결정됩니다. 3. 다른 역의 ‘깃발 꽂이’에 ‘깃발’을 꽂을 수 있습니다. 깃발 꽂기의 권한은 오직 각 역의 ‘대표’에게만 있으며, 도중 무력 충돌로 인해 대표가 사망할 경우 가장 먼저 깃발을 집는 사람에게 ‘대표’의 권한이 양도됩니다. 만약 다른 역의 그룹에게 ‘깃발’을 빼앗길 경우, 깃발을 빼앗긴 그룹의 처우는 깃발을 빼앗은 그룹에 의해 결정됩니다. 4. 정해진 시일 내에 반드시 ‘표적 역’의 ‘깃발 꽂이’를 점거해야만 합니다. 이에 실패할 시, 당신의 그룹원은 전원 사망합니다. 5. 당신의 그룹이 점거해야 할 ‘표적 역’은 [창신역]입니다. + 정희원이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깃발이랑 깃발 꽂이를 지키면서, 다른 역에 우리 깃발을 꽂아라, 뭐 그런 말 같은데. 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 “저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우리가 깃발을 꽂아야 하는 역은 창신역이고요.” 이현성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이어서 내가 말했다. “그런 것 같네요. 다들 이해력들이 좋으시군요.” 내 말에 정희원이 슬쩍 눈을 흘겼다. 다 알면서 뭘 모른 척 하냐는 투다. 하긴, 내가 미래를 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제 내 모습이 얄미워 보이겠지. 나는 그런 정희원을 향해 씩 웃어주었다. 유상아가 어깨를 감싸 쥐며 말했다. “또······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건가요?” 잠시 생각하던 이현성이 답했다. “해당 역의 ‘깃발 꽂이’만 점거하면 그 역의 그룹원에 대한 처우를 결정할 수 있다고 했으니······ 잘만 하면 사상자를 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앗,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역을 빼앗긴다고 해서 바로 사망한다는 말은 없군요? 처우를 결정할 때 해당 역의 그룹원들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예, 누구도 죽지 않고 클리어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이현성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지만, 그걸 보는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가끔 보면 유상아나 이현성은 무슨 천상의 논리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것 같다. 아무도 죽지 않는 시나리오 같은 건 없다. 네 번째 시나리오는, 지금껏 있었던 그 어떤 시나리오보다도 많은 사상자를 낼 것이다. 내 마음을 아는 듯, 정희원이 살짝 인상을 쓰며 말을 끊었다. “창신역이 몇 호선이죠? 일단 그것부터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노선표를 확인한 이현성이 말했다. “6호선입니다. 터널로만 이동한다면 약수 쪽으로 돌아가서 환승길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럼 그룹을 나눠야겠네요. 몇 명은 이곳을 지키고, 몇 명은 그쪽을 정찰하러 떠나는 게 어떨까요?” 내가 딱히 말하지도 않았는데 활발히 의견 교환을 하는 일행들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흐뭇한 심경이다. [시나리오 활성화로 인해 ‘충무로역’의 안전 결계가 해제됩니다.] [이제 다른 역과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집니다.] 일행들이 제각기 의견을 나누는 동안, 나는 공필두를 향해 다가갔다. “공필두, 이제 말해도 돼.” 그러나 명령이 해제되었음에도, 공필두는 나를 향해 으드득 이를 갈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나한테 악감정이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당신도 적응해야지. 건물주였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고.” “······.” “당신이 왜 그렇게까지 ‘땅’에 집착하는지는 알고 있어. 하지만 적당히 해. 앞으로도 살아남고 싶다면 말이야. 당신에겐 해야 할 일이 있잖아?” 흔들리는 공필두의 눈빛.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은 이곳을 지키는 역할을 맡을 거야.” 공필두는 세 번째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네 번째 시나리오에서도 매우 유용한 말이다. 적어도 공필두가 이곳을 지키는 한, 유중혁급의 미친놈이 오지 않는 이상 충무로는 안전할 테니까. “내가 왜 네놈 말을······.” “이번엔 억지로 명령하진 않겠어. 그리고 네가 내 부탁에 따라준다면, 그만한 보상도 있을 거야.” “······.” “잘 생각해 보라고. 떨어져 있을 가족 생각도 좀 하고.” 내 마지막 말에 공필두의 눈이 커졌다. “너, 어떻게······!” 터널 쪽에서 소음이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빠아앙―! 시끄러운 경적 소리와 함께 동역사로 가는 4호선 철길에 헤드라이트가 비쳤다. 바이크의 엔진 소리와, 매캐한 배기음. 무언가가, 충무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