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화
448화
어째서 ‘은밀한 모략가’는 지금까지 우리의 설화를 지켜본 것인가.
“대답해라.”
그는 이계의 신격의 왕이었고, 자신의 ‘결’을 본 존재였다.
나를 제거하고 싶었다면, 막대한 개연성을 희생해서라도 나를 죽일 힘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유중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너무나 깊고 광활해서 내가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쓴다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나는 ‘은밀한 모략가’를 이해할 것 같았다.
―내 소설이 멸살법의 표절이라면, 너는 무엇의 표절이지?
1863회차의 한수영은 내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그 물음의 답을 알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863회차에서 한수영이 만든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살아온 회차보다도 완전했다. 원작의 모든 일행들이 생존했고, 서울은 최종 시나리오에 대항할 인프라를 갖추었다.
그 그림에 유일하게 없었던 것은 ‘유중혁’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을 배제하고, 원작을 베껴 만들어진 세계가 올바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복제는, 원작을 능가한다.」
그럼에도 나는 한수영이 만든 세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이야기에, 내가 목표로 했던 것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삶에도 저작권이란 것이 존재할까.
하나의 삶을 저작(著作)이라 표현해도 좋은 것일까.
【구원의 마왕.】
다른 세계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준 존재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결말’을 볼 자격이 있는 사내.
그럼에도 원하던 결말을 볼 수 없었던 이가, 유중혁의 [흑천마도]를 손으로 붙잡은 채 말했다.
【제대로 된 ‘결’을 맺지 못한 이야기는, 실패한 이야기인가?】
날에 베인 손가락에서 설화가 흘러내렸다. 내가 잘 아는 설화들이었다.
내가 십여 년에 걸쳐 읽어 온 이야기.
【정말로, 세상에 ‘제대로 된 결말’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유중혁이 [흑천마도]를 재차 휘두르자, ‘은밀한 모략가’의 신형이 훌쩍 멀어졌다.
‘정신 차려라, 김독자. 이번엔 제대로 온다.’
[특성, ‘마왕살해자’가 발동합니다!]
[특성, ‘별들의 공포’가 발동합니다!]
마왕과 성좌를 베기 위해 만들어진 검이 울부짖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울부짖습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삶으로 ‘거대 설화’를 완성한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까가가가가가각!
우리는 다가오는 설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통천하의 물길이 뒤집히며 강의 바닥이 드러났다.
우리는 강의 바닥을 지지대로 삼은 채,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절기(絶技).
파천유성결(破天流星決).
하늘을 찌르는 낙뢰가 [흑천마도]의 끝에서 솟구쳤다. 마왕의 격과 성좌의 격, 그리고 초월좌의 격이 더해진 검강의 다발이 산개하는 유성우처럼 허공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쪽에서도, [진천패도]가 움직였다.
콰콰콰콰콰!
이쪽이 가지고 있는 기술은 저쪽도 가지고 있다. 똑같은 모양의 유성우가 허공에서 부딪치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기술이 똑같을 때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숙련도, 그리고 설화의 격이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회상합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우리는 어느 쪽도 앞서지 못한 상태였다.
‘김독자!’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영원불멸의 지옥도」를 운용하는 동시에, 다른 설화들을 방출했다.
[설화,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저쪽이 격의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것은 ‘마왕살해자’와 ‘별들의 공포’의 특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쪽도, ‘이계의 신격’에 대항할 수 있는 설화들을 풀면 된다.
쿠구구구구구구!
격과 격이 충돌했다. 유중혁의 코에서 주륵 피가 쏟아졌다. 하지만 유중혁은 물러서지 않았다.
유중혁뿐만이 아니라, 설화들도 알고 있는 듯했다.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면, 모든 이야기가 끝나버린다는 것을.
【소용없다.】
‘은밀한 모략가’의 격이 움직였다. 막연한 파형으로 존재하던 ‘거대 설화’의 기세가 변화하고 있었다. 거신의 형상을 이룬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우리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유중혁이 반발하듯 외쳤다.
“이쪽에도 거대 설화는 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눈앞에 거대 설화의 정경들이 흘러갔다.
마왕 선발전, 수르야와 맞서 싸웠던 「마계의 봄」.
‘기간토마키아’를 겪으며 얻은 「신화를 삼킨 성화」.
거대한 사자와 용의 형상을 띤 두 개의 거대 설화가, 거신의 손바닥을 물어뜯으며 저항했다.
[41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666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안에서, 수많은 유중혁들이 이 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666]과 [999]를 떠올렸다. 그들도 저 안에 있을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와 함께, 이 세계선의 처음부터 나를 지켜봐 준 녀석들.
그들이 두 유중혁의 결투를 보며 동요하고 있었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하늘이 갈라지며, 빛과 어둠이 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빛과 어둠의 계절」은 우리의 ‘거대 설화’였다. 하지만 동시에, ‘은밀한 모략가’의 거대 설화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거대 설화에서, 유중혁은 ‘은밀한 모략가’에게 패했다.
【너희는 이길 수 없다.】
「무대화」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패한 역사는 또다시 패한 역사를 만들 뿐이다.
「백색 코트의 사내가 창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흑색 코트의 사내가, 그 시선을 마주했다.」
‘은밀한 모략가’의 동공이 흔들렸다.
분명 그때와 같은 ‘유중혁’의 싸움이었음에도, 뭔가가 달랐다. ‘은밀한 모략가’가 자신의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흑색 코트.
그때와는 코트의 색깔이 정반대가 되었다.
「빛과 어둠이 충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감시자만이, 그 모든 이야기를 지켜보았다.」
유중혁의 오른팔에 거대한 격이 모여들고 있었다. 녀석이 사용하려는 기술은 명백했다.
지금의 유중혁이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기술.
유성참(流星斬).
묵시룡 전(戰)에서, 유중혁은 이 기술로 ‘은밀한 모략가’를 꺾지 못했다.
[화신 ‘정희원’이 자신의 거대 설화 지분을 일시적으로 양도합니다.]
멀지 않은 전장에서, <김독자 컴퍼니> 모두가 우리에게 힘을 보태고 있었다. 거대 설화에 지분을 가진 모든 존재가, 이 전장에 동참하고 있었다.
[화신 ‘한수영’이 자신의 거대 설화 지분을 일시적으로 양도합니다.]
[화신 ‘신유승’이 자신의 거대 설화 지분을 일시적으로 양도합니다.]
[화신 ‘이길영’이 자신의 거대 설화 지분을 일시적으로 양도합니다.]
유중혁의 [흑천마도]에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설화가 모여들었다.
점점 더 불어나는 유중혁의 설화를 보며, ‘은밀한 모략가’가 자신의 격을 쏟아부었다.
똑같은 유중혁이었지만, 두 사람이 만든 설화는 전혀 달랐다.
「유중혁은 누구인가.」
그들이 가진 설화가, 그 질문의 대답이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설화는 1회차, 2회차, 다시 100회차와 1000회차의 유중혁이었다. 오직 한 사람의 존재가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설화.
「모든 비극이 무료해지고, 오직 하나의 존재만이 비대해졌다.」
휘두르는 [흑천마도]의 검격이 그 설화에 대항했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이것이, 유중혁의 대답이었다.
[설화, ‘과거와 미래의 아이’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유중혁은 신유승이었다.
[설화, ‘멸망의 심판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정희원이었고.
[설화, ‘거짓 구원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한수영이었으며.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나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유성참이 ‘은밀한 모략가’의 거대 설화와 부딪쳤다. 그야말로 백중지세의 싸움이었다. 잠깐의 방심이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전장. 우리가 가진 모든 설화들이 몰아쳤다. 그리고
[666회차의 ‘유중혁’이······.]
그 전장의 틈새에서, 아주 작은 변화가 있었다.
[362회차의 ‘유중혁’이······.]
귀가 멀 듯한 굉음이 터졌고, 폭발한 강물이 희뿌연 안개를 이루었다. 밀려온 강물이 비틀거리는 유중혁의 몸을 휩쓸었다. 유중혁의 정신이 흐려지고 있었다.
나는 유중혁 대신 화신체를 움직여 근처의 부유물로 몸을 끌어 올렸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부유물이 아니라, 죽은 ‘이계의 신격’들이 쌓여 만들어진 작은 섬이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와 나의 차이는 하나뿐이다.】
뿌옇게 피어오른 강물의 안개가 사라지자, 시체들의 섬 위에 주저앉은 ‘은밀한 모략가’의 모습이 보였다.
【너는 운이 좋았고, 나는 운이 없었다.】
츠츳, 츠츠츳.
엉망으로 찢어진 흑색 코트.
그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1562회차의 ‘유중혁’이······.]
[1321회차의 ‘유중혁’이······.]
그의 안에서 ‘유중혁’들이 반발하고 있었다. 그들이 ‘은밀한 모략가’의 뜻을 거부하고 있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 1864회차의 끝을 보고 싶어 합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격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그의 몸이,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부풀어 있던 근육이 작아지고, 키가 줄어든다.
격을 상실한 ‘은밀한 모략가’는, 어느새 소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유중혁의 몸을 일으켰다.
“너······.”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절대 다수의 관객들이 당신의 결투에 전율합니다!]
[일부 관객들이······.]
우리가 이겼다.
머릿속으로 무수한 간접 메시지들이 날아들었지만, 그중 어느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홀로 섬 위에 주저앉은 ‘은밀한 모략가’.
바닥에 꽂힌 [진천패도]만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흑천마도]를 꾹 쥔 채 녀석에게 다가갔다.
어째서, 같은 유중혁임에도 이토록 다른 생을 살아야 했는가.
왜 저 녀석은, 홀로 이 모든 비극을 겪어내야 했는가.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더듬거립니다.]
그에게는 동료가 없었기 때문인가.
동료······.
[41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없지 않았다.
그에게도 동료는 있었다.
하나둘,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꼬마 유중혁’들이 그곳에 있었다.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그의 주변을 둘러싼 꼬마 유중혁들. 그리고 다시 그 꼬마 유중혁들의 주변을 둘러싼 ‘이계의 신격’들이 보였다.
【하나뿐하나뿐하나뿐】
‘은밀한 모략가’가 살아온 역사.
그가 살아온 ‘멸살법’의 모든 것이,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죽이지마죽이지마죽이지마죽이지마】
‘결’에 도달하지 못해 버려진 이야기들.
나는 유중혁의 몸을 움직여 그들을 향해 자세를 낮추었다. 손을 뻗자, 작은 ‘이계의 신격’들 중 하나가 유중혁의 손끝을 물었다. 새빨간 피가 손가락 끝에 맺혀 떨어졌다.
이 세계선이 새로운 이야기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여전히 유중혁의 이야기는― ‘멸살법’은 끝나지 않았다.
‘김독자.’
정신이 들었는지, 유중혁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유중혁에게 대답하지 않은 채, ‘이계의 신격’들을 헤치며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다가갔다.
소년이 된 ‘은밀한 모략가’가, 이계의 신격들에게 둘러싸인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흑천마도]를 그러쥐는 나를 보며, 유중혁이 말했다.
‘후회할 거다.’
「후회 안 해.」
들어 올린 [흑천마도]를, 나는 천천히 칼집에 집어넣었다.
「너도 안 죽일 거잖아.」
유중혁의 대답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죽여봤자, 놈은 다시 회귀할 뿐이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유중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비극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선택은 설화를 쌓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것이 1864번에 달하는 삶의 티끌조차 위로하지 못함을 안다.
하지만.
“은밀한 모략가.”
내 부름에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 세계가 원작과 달라졌다고 해도, 이 세계가 더 이상 소설이 아니라 해도······ 녀석이 살아온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김독자도 이 자리에 없다.」
나는 분명 그에게 빚을 졌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이었다.
“한 번 쓴 문장은 바뀌지 않는다고 했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문장은 바뀔 수 있다.
‘멸살법’에도 수정본이 존재하는 것처럼.
【내 설화는 이미 끝났다.】
“······그리고?”
【······그다음은 없다. 끝이란 그런 거니까.】
“어떤 이야기는 끝이 나야 비로소 새롭게 시작하기도 해.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매년 올해가 완결입니다, 라고 해놓고 10년 넘게 같은 이야기를 연재한 사람도 있었어.”
그 이야기가, 나를 살게 만들었다.
“분명 500화 완결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어느새 1000화를, 2000화를 넘긴 이야기였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그 이야기는 3149화까지 쓰였고······ 3150화는 쓰이지 않았어.”
마침표를 찍어도 다음 문장을 쓰는 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은밀한 모략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이야기를 계속해 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난 그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는 기분이 들어. 그리고 어쩌면, 정말 계속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놈은―】
“왜냐하면 난 성좌니까.”
굳어진 ‘은밀한 모략가’의 표정을 보며, 나는 서늘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성좌는 그런 존재거든.”
이것이 내가 선택한 대답이었다.
놈을 상처입혀도, 놈을 기만하지 않을 방법이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두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이 본 그 이야기가.】
이글거리는 목소리가,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결국 너를 죽이게 될 것이다. 네게 최악의 결말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너의 성운을―】
“상관없어.”
이것이 무책임한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내 알량한 속죄가, 다른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때마다, 나도 최선을 다해 맞서 싸울 테니까.”
‘은밀한 모략가’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나는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먼 우주의 끝을 가늠하는 표정. 그런 표정으로, ‘은밀한 모략가’가 전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전장의 비가 그치고, 제천대성이 불러온 먹구름이 물러가고 있었다.
‘천계대전’이 끝나가고 있었다.
쓰러진 <황제>의 성좌들이 제천대성과 요괴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짙은 패배감만이, 이 전장의 승패를 대변했다.
[현재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 설화방이 ‘경전’을 획득한 상황입니다.]
[경전을 1시간 동안 수호하면 시나리오는 자동 종료됩니다.]
[현재 시나리오 종료까지 10초 남았습니다.]
마침내, 길었던 시나리오가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신 <스타 스트림>의 창공. 그곳에서 마지막 시나리오를 관장할 ‘대도깨비’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 설화방이 시나리오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눈부신 메시지와 함께, 어마어마한 보상들과 성좌들의 축하 메시지가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멀리서 비유를 머리에 얹고, 경전을 흔들며 달려오는 신유승이 보였다.
신유승이 쥔 경전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
“아저씨!”
[해당 시나리오에 ‘이계의 신격’의 지분이 막대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이계의 신격’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이계의 신격’들이 정식으로 시나리오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요괴들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손오공을 중심으로 모여든 요괴들은 마치 하나의 군체처럼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나는 그들의 울음을 들었다.
(그것은, 낯선 나라의 노래처럼 들렸다.)
내 화신체를 업고 손을 흔드는 정희원의 모습이 보였다. 잘못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드디어 붙잡았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도 들렸다.
석존의 후예가 된 유상아와, 탈진한 이길영을 업은 장하영도 보였다.
곁을 돌아보자, ‘은밀한 모략가’가 나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유기를 여기서 끝마친다.)
하나의 시나리오가 끝나도, 여전히 이야기는 계속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도 반드시 결말은 있다.
[새로운 ‘거대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 ‘단 하나의 설화’의 네 번째 조건이 일부 완수되었습니다!]
그렇게 아주 조용히.
[당신의 거대 설화가 ‘결(結)’의 전반부를 완성하였습니다!]
이 세계의 끝을 예고하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당신의 성운이 ‘마지막 시나리오’의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