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449화
Episode 85. 최후의 벽
[95번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시나리오가 종료된 후, 제천대성과 ‘이계의 신격’들은 통천하의 중심에 모여 축연을 벌였다.
[거대 설화 「서유기」가 엑스트라들의 신분을 해방합니다.]
<관리국>과 <황제>의 억압 속에서 시나리오의 노예가 되었던 이계의 신격들이 풀려나고 있었다.
【오오오오오오오오】
【원숭이왕원숭이왕원숭이왕】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은밀한 모략가’를 따르다가 뒤늦게 시나리오에 참전한 쪽이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격이 약해지며, 새로운 외신으로 등극한 제천대성 쪽으로 자연히 넘어온 이들.
[보상 분배가 시작됩니다!]
허공에서 내려오는 95번 시나리오의 보상품들을 보며 화신들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들의 시선은 어마어마한 보상품을 받는 화신들의 무리를 향했다.
“와, 저건······.”
“나도 저 설화방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었다. 인당 무려 일백만 코인에 달하는 개별 보상에 이어, <황제>의 성유물을 획득한 이들도 보였다.
모두 절차에 맞게 분배되고 있었기에 항의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성운, <황제>가 관리국에 시나리오의 공정성을 항의합니다!]
아니, 있긴 했다. 바로 주최측인 <황제>였다.
기껏 꾸린 대형 시나리오의 보상이 통째로 소성운에게 넘어가버렸으니, 그들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스타 스트림>이 <황제>의 항의를 묵살합니다.]
분기를 이기지 못한 <황제>의 일부 성좌들이 자신의 격을 발출하려는 순간, 뜻밖의 존재들이 그들을 막았다.
“그만들 하십시오. 우리가 졌습니다.”
<황제> 최강의 화신, 페이후.
“신화급 성좌들께서 지금의 우리를 본다면 뭐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이번 서유기 시나리오에 <황제>의 신화급 성좌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이 모든 것을 관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명예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십시오.”
단호한 화신의 목소리에 <황제>의 성좌들도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정희원과 이지혜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의외네요.”
“그러네.”
지금껏 만났던 거대 성운의 실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쪽의 시선을 깨달았는지, 페이후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화신 정희원.”
정희원은 긴장하며 강철검을 쥐었다. 페이후는 지금껏 그녀가 상대한 적들 중 손에 꼽을 정도의 강자였다.
페이후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신 정희원, 이번 승부는 아주 인상적이었소.”
“······아, 네.”
“기회가 된다면, 꼭 그대를 중국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함께하고 싶소.”
자세히 보니 페이후의 구레나룻 사이로 희미한 홍조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이지혜가 [전음]으로 감탄했다.
―······와, 세상이 멸망하는데도 이런 사람이 남아 있네.
정희원은 멍한 얼굴로 페이후를 마주보았다. 자신과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페이후.
이지혜가 정희원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언니, 뭐해요? 그래도 지금까지 우리가 본 남자들 중엔 제일 낫다고요. 얼굴이야 우리 사부보다 한참 못하지만······.
“죄송하지만.”
정희원은 무림의 고수처럼 공손한 목소리로 응대했다.
“전 검과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몸이라.”
“나도 마찬가지요.”
“······네?”
“내 꼭 그대를 중국으로 초대하여 밤새도록 깊은 검무를 나눠보고 싶소.”
뜨거운 눈빛을 불태우며 장광설을 늘어놓는 페이후를 보며, 정희원은 살짝 질리는 느낌이었다. 곁을 돌아보니 눈을 빛내며 응원하던 이지혜도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혹시나 이 모든 게 기우면 다행이겠지만, 아니라면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츠츠츠츳······.
보다 못한 그녀의 배후성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됐어요, 우리엘. 가만히 계세요.’
괜히 여기서 우리엘까지 나서면 꺼져가던 전쟁의 불씨가 활활 타오를 염려가 있었다. 맘 같아서야 지금 당장 일대일로 붙어서 꺾어버리고 싶지만, 주변 성좌들의 시선도 있고······.
“죄송하지만, 저는 이미······.”
거기까지 말하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쥔 강철검이 파르르 떨렸다. 이현성이 변신한 강철검. 정희원은 괜스레 원망스러운 기분이었다.
왜 이 검은 말도 못하는 검이란 말인가.
“뭐야 이건, 비켜!”
그런 정희원을 도와준 것은 한수영이었다. 대체 언제 시나리오에 진입한 것인지, 페이후를 밀치고 나타난 한수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김독자 어딨어?”
······김독자?
정희원은 지금껏 자신이 업고 있던 사내의 화신체를 돌아보았다.
도중에 끼어든 한수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는 페이후. 그런 페이후와 김독자의 화신체를 번갈아 보던 정희원의 머릿속에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주군!”
마치 ‘깃발 쟁탈전’을 회고하듯, 김독자를 품에 안은 정희원이 열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허여멀건 김독자의 화신체가 정희원의 품에서 흐느적거리며 흔들렸다.
“왕이시여!”
모두가 정희원을 보고 있었다. 이지혜는 입을 딱 벌린 채, 그리고 한수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리고 페이후는.
“아······.”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군요, 화신 정희원. 그런 것이었습니까······?”
페이후의 시선이 정희원을, 한수영을, 그리고 이지혜를 돌아보더니 마지막으로 김독자의 얼굴을 향했다. 슬그머니 깨무는 입술. 선택받은 주인공을 부러워하는 비운의 엑스트라처럼 천천히 고개를 숙인 페이후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지혜가 정희원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됐어요, 언니. 이제 갔어요. 뭔가 재수 없는 오해를 한 것 같지만.
하지만 정희원은 그만두지 않았다.
“주군! 일어나보십시오! 주군! 일어나지 않으면 죽이겠습니다!”
찰싹! 찰싹! 찰싹! 찰싹!
정희원의 손바닥에 맞은 김독자의 왼쪽 뺨이 탱탱 붓기 시작했다.
한수영은 그런 정희원을 한심한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너 지금 뭐하냐?”
“복수.”
한수영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정희원을 대신해서 김독자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야.”
“······.”
“내가 새 수식언 지어준다고 했잖아. 근데 그새를 못 참고 새 수식언을 얻어?”
“······.”
“내가 쓴 내레이션은 들었냐? 마지막 지문 들었어? 어땠어? 솔직히 말해도 돼 인마. 감동했잖아. 그치?”
하지만 김독자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인상을 찌푸린 한수영이 아직 붓지 않은 다른 쪽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신유승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다들 대체 뭐하는 거예요!”
“걱정 마. 숨은 붙어 있어. 안 죽었다고.”
소란에도 불구하고 김독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일행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분명 일부러 안 일어나는 거야. 자기가 지은 죄가 있으니까.”
“하긴. 그럼 참지 못할 정도의 고통을 줘 보는 게······.”
“다들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상황에서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의식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일행들의 표정도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뭐지?”
결국 일행들은 이 사태를 대신 설명해 줄 인물을 찾아냈다.
김독자의 바로 곁에서 기절해 있던 유중혁이었다.
“야, 유중혁! 정신 좀 차려봐! 김독자 이 자식 왜 안 깨어나는데?”
찰싹! 찰싹! 찰싹! 찰싹!
단단한 유중혁의 뺨은 김독자처럼 쉽게 부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유중혁이 희미하게 실눈을 떴다.
“나는 유중혁이다······.”
“빌어먹을, 이 자식은 또 왜이래.”
유중혁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유상아가 한수영을 말렸다.
“중혁 씨 채근하는 건 그만두세요. 설화 때문에 기억 혼선이 와서 제정신이 아닐 테니까.”
“상아 언니!”
뒤늦게 재회의 기쁨을 누리게 된 일행들이 유상아를 향해 모여들었다.
무사히 환생한 유상아의 전신에서는 예전과는 또 다른 기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한수영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석존의 후예라더니, 빡빡머리가 아니네?”
“요즘 종교들은 제법 트렌디하거든요.”
“잘 돌아왔어. 좀 늦었지만.”
“당신이 말썽부릴 참에 맞춰 오느라 힘들었어요.”
“······말썽부리는 건 내가 아니라 얘라고.”
어깨를 으쓱한 유상아는 기절해 있는 김독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김독자의 머리에 씌워진 ‘긴고아’가 환한 금빛을 발했다.
정희원이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 씌워놨네요. 이제 어디 도망은 못 가겠다.”
“······안타깝게도, 이미 도망간 것 같네요.”
“네?”
“영혼체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김독자에게 채워진 긴고아로부터 창공을 향해 희미한 실선이 뻗어 나갔다. 어디론가 이어진 실선. 유상아가 그 실선의 끝을 가늠하며 말했다.
“걱정마요. 멀리는 못 갔으니까. 그리고 자의로 떠난 것 같지도 않고요.”
자의로 떠난 것이 아니다. 그 말의 의미는 명료했다.
주변을 황급히 돌아보던 한수영이 물었다.
“‘은밀한 모략가’ 어디 갔어?”
*
차원 통로의 전경이 빠르게 곁을 스쳐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해제하는 순간 무언가가 내 영혼체를 붙잡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은밀한 모략가’와 함께 포탈을 넘어가고 있었다.
보통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좀 케이스가 특별했다.
[당신은 ‘존재 맹세’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영혼체가 일시적으로 존재 맹세의 계약에 묶입니다.]
[당신의 계약자가 24시간 동안 당신의 영혼체에 대한 소유권을 가집니다.]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존재맹세]에 이런 활용법이 있는 줄은 몰랐네.
[존재 맹세].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동안 <김독자 컴퍼니>에게 접촉하여 정체를 밝히지 말 것.
이 시나리오에서 내가 유일하게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이었다.
도중에 시나리오 내용이 변경된 만큼 이견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스타 스트림>은 내가 맹세를 어겼다고 판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날 죽일 거냐?
소년의 모습이 된 ‘은밀한 모략가’의 전신에서는 여전히 강렬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그의 설화 속에서 수많은 유중혁들이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적의가 느껴지는 설화는 아니었다.
나를 죽일 생각이 아니라는 건 명백했다.
앞서 유중혁이 말했듯, 그가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기회는 이미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포탈은 닫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내게 익숙한 장소였다. 무성한 어둠으로 뒤덮인 숲.
‘은밀한 모략가’의 거처인 ‘은가이의 숲’이었다.
【들어가라.】
그 말과 함께, 내 영혼체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눈을 끔뻑이자 눈이 움직였다. 하지만 팔도 다리도 없는 상태. 대체 뭐로 변한 건가 싶어 근처를 돌아보자, 벽면의 유리에 내 모습이 비쳤다.
······나는 작은 무림 만두가 되어있었다.
아무래도 [999]가 사용하던 상징체인 것 같았다.
“만두가 되니 기분이 어떠냐!”
대체 언제 튀어나온 것인지 달려온 꼬마 유중혁들이 나를 발로 걷어차며 린치를 가했다. 겨우 꼬마 유중혁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만두피가 터지지 않도록 몸을 웅크리며 외쳤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너는 나를 막을 수 없어. 어차피 24시간만 지나면 나는 다시 화신체로 돌아가게 되어있다고. 날 죽이고 싶다면 지금 죽여버리는 게 좋을걸?
물론 정말 나를 죽이기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나는 옥좌에 앉은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물었다.
―‘은밀한 모략가’. 네 목적은 뭐지? 대체 왜 날 살려두는 거냐?
내 질문에 꼬마 유중혁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외신이자 성좌. 모든 유중혁들 중 가장 강한 유중혁.
―네가 전력을 다했다면, 우릴 이길 수 있었다는 걸 알고 있어.
아무리 1864회차의 기억을 되찾은 유중혁과 내가 힘을 합쳤다 해도, 순수한 설화의 격으로 ‘은밀한 모략가’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의 모든 역사의 총합이었고, 심지어는 그 이후로도 아득한 세월을 견딘 유중혁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은밀한 모략가’는 우리는 죽이는 대신 패배를 택했다.
“네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한 것은 이야기를 듣던 [41]이었다.
“네놈이, ‘최후의 벽’의 마지막 파편을 가진 인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