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화
447화
처음 1863회차에 방문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1863회차의 유중혁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 유중혁이 내가 알던 ‘원작의 유중혁’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유년을 함께했던, 내 삶을 지탱했던 주인공.
그런데 아니었다.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유중혁은, 이미 오래전에 그 이야기를 끝낸 뒤였다. 그는 1863회차의 결말에 도달해 세계의 끝을 보고, 끔찍한 세계선의 심연을 떠돌았다. 수천 년, 어쩌면 수만 년을.
그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그렇게 보냈는지 나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그 시절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며
이제, 나를 적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너희에겐 ■■를 볼 자격이 없다.】
그 말은 맞았다.
내가 지금껏 시나리오를 헤쳐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은밀한 모략가’의 삶이 선행했기 때문이니까.
‘은밀한 모략가’의 격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주변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계의 신격’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오오오오오오······.】
뭉게뭉게 피어오른 아우라가 [진천패도]를 잠식하고 있다.
저것이 그가 1863회차를 살아오며, 그리고 그 이후의 세계선을 거닐며 얻은 힘이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무수한 ‘유중혁’들이 그의 안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41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362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666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쌓은 역사가, 죄업이 그곳에 있었다.
요피엘의 [죄업의 눈동자]로도 그 끝을 알 수 없었던 죄업 수치.
그는 <스타 스트림>이 ‘공포’로 규정하는 존재였다. 악의 범주를 넘어서, 이 세계에 불가해(不可解) 선언을 당한 존재. 이계의 신격의 왕.
하지만 그의 본질은 악도, 공포도 아니었다.
그가 <스타 스트림>에서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정의가 너무나 완고하기 때문이었다.
「“스타 스트림을 부수겠다.”」
조금의 융통성도 없는 정의를 <스타 스트림>은 좋아하지 않는다.
정의는 굽혀져야 하고, 양보해야 하고, 때로는 무너져야 한다. 하지만 ‘은밀한 모략가’의 정의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결국 ‘은밀한 모략가’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시작한 존재를, 반드시 이 손으로 없애겠다.”」
그것이 그가 바라는 이 세계의 ‘멸망’.
모든 유중혁들이 바라는 ‘회귀의 끝’.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은밀한 모략가’는 지극히 타당했다.
그에게는 누구보다······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을 볼 자격이 있었다.
해온 것이라곤 ‘멸살법’을 읽는 것밖에 없었던 나 따위보단, 훨씬 더―
‘엉뚱한 생각 하지 마라. 멋대로 공감하지도 말고.’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다른 녀석에게 양보할 셈인가? 네놈이 쌓은 설화는 순전히 저놈의 삶을 베껴서 이루어진 것이었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놈의 말에 순응하는 것은, 너와 함께 싸운 다른 동료들의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다.’
분명 처음에는 ‘멸살법’에 의존해 위험을 피해간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 후에는 달랐다. 원작에서 벌어지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났고, 원작에는 없었던 위험들이 찾아왔다. 그 위험들을 동료들과 함께 이겨냈다.
설화가 쌓이며 ‘멸살법’과의 괴리는 커졌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원작을 참고하지 않게 되었다. 최종본을 끝내 읽지 않았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다.
이미 이 세계는, ‘은밀한 모략가’가 살았던 ‘멸살법’의 세계가 아니었다.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놈이 옳을 수도 있다. 놈의 정의가 타당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네놈이 양보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도 옳기 때문이다.’
1863회차의 비극을 견딘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분명, 그 또한 ‘유중혁’이었다.
‘아직 실감은 나지 않지만, 정말로 내가 1864번의 회귀를 겪은 것이 맞다면.’
[흑천마도]를 쥔 유중혁의 시선이, 아주 잠깐 통천하의 일행들을 향했다.
이지혜의 [전함]이 사격을 계속하고 있었고,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이 브레스를 흩뿌리고 있었다. 정희원, 그리고 정희원의 손에 쥐어진 이현성도 분전하고 있었다. 이길영을 업은 장하영이 달리고 있었다.
아무도 죽지 않은 채, 모두가 힘을 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세계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서.
‘아마도 나는,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흑천마도]와 [진천패도]가 재차 충돌했다. 꺾이지 않는 두 자루의 검이 서로의 신념을 품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외쳤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건가? 네가 아무리 기억을 되찾았다 한들―】
“끈질기군. 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지?”
【······뭐?】
“패배를 인정하기를 원하는 건가? 아니면, 네놈의 삶을 이해해주길 원하는 건가?”
【이해? 너희들의 이해 따위는―】
“필요 없겠지.”
유중혁이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오직, 유중혁이기에 할 수 있는 말.
“나 또한 네게 이해받길 원하지 않는다.”
이미 서로를 이해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파찰음이 튀었다. 격과 격이 사납게 충돌하고 있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포효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지옥도가 뒤얽힌 전장.
분하게도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유중혁을 바라보는 것뿐. 이 빌어먹을 페이지를, 어떻게든 넘기는 것뿐이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승패는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은밀한 모략가’는 여유로웠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쪽은 이제 막 ‘1863회차’의 힘을 쓸 수 있게 된 상태에 불과하니까. 숙련도도, 적응도도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듯, ‘은밀한 모략가’가 물었다.
【궁금해지는군.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네가 보고 싶은 결말은 뭐지?】
“내가 왜 네놈에게 그걸 대답해야 하지?”
【설마 저 ‘구원의 마왕’이 바라는 결말과 같은가? 정말로 저 녀석을 믿는 것인가?】
허공에서 충돌한 두 개의 칼이 커다란 충격파를 만들었다.
입가의 피를 닦으며, 유중혁이 한 걸음을 물러났다.
【너는 알지 못한다. 네가 믿는 잘난 ‘동료’가,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지. 너는 저놈이 바라는 이 세계의 ‘결말’이 무엇인지 모른다.】
[파천검도]를 몰아치며, ‘은밀한 모략가’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 이 세계선이 열렸을 때, 김독자의 목표는 ‘생존’이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유상아를 보았다. 아마 이 여자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검과 검의 틈새에서, 내가 살아왔던 설화들이 숨 쉬고 있었다.
【그다음의 목표는······ 너를 이용해 강해지는 것이었지.】
「“나를 동료로 삼아. 난 당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어.”」
「앞으로 남은 무수한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 위해, 유중혁은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다.」
마치 페이지가 넘어가듯, 내가 살아왔던 설화들이 눈앞에서 영사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멈추려는 듯 유중혁이 거칠게 검을 휘둘렀지만, ‘은밀한 모략가’의 [진천패도] 앞에 모든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은밀한 모략가’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다음에는, 그래. 조금 여유가 생긴 후엔 감히 ‘이 세계의 결말’까지 꿈꾸게 되었다.】
「“형은 소원 안 빌어요?”
나는 그런 이길영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대답했다.
“어떤 소설의 에필로그를 보게 해달라고 빌었어.”」
제천대성은 말했다. 누군가를 읽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읽었듯, 다른 이들도 나를 읽고 있을 것이라고.
그 말이 맞았다.
내가 ‘멸살법’을 읽는 동안, ‘은밀한 모략가’ 또한 내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을, 그가 지켜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내가 한때 꿈꿨던 것들을 꿈꾸게 되었다. 하늘의 <스타 스트림>을 부수고, 내가 넘지 못했던 ‘벽’ 이후의 세계를 부수길 원하게 되었다. 모든 동료들을 살리기를 원했고, 심지어는······.】
「까만 밤하늘의 중심에 성운의 무리들이 보였다. <베다>. <올림포스>. <파피루스>······ 나는 네놈들이 한 짓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나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설화’를 만들 겁니다.”」
눈앞에서 기억들이 흘러간다.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도 있었고, 비틀리거나 왜곡된 것들도 있었다. 온전한 ‘설화’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김독자’라는 이야기에 대한 ‘은밀한 모략가’의 독해였다.
「이것이, ‘은밀한 모략가’의 기분이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김독자는 이제 그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이룰 수 없게 되었지.】
나는 묻고 싶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고.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설화는 허구일 수는 있어도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
‘은밀한 모략가’의 왼손이 유중혁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반사적으로 휘두른 [흑천마도]가 ‘은밀한 모략가’의 손을 쳐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설화, ‘대천사의 사랑을 받는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막 태어난 아기처럼 내가 가진 설화들이 울고 있었다.
개중에는 내게 익숙한 설화도 있었고.
[설화, ‘다섯 번째 손오공’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얻은 지 얼마 안 된 설화도 있었으며.
[설화, ‘용이 인정한 적수’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해신의 전우’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고려제이검’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대체 언제 얻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설화들도 있었다.
그 모든 설화들이 한꺼번에 말하고 있었다.
【구원의 마왕이여, 너는 <스타 스트림>을 파괴할 수 없다.】
하늘의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내가 증오했던 별들이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스타 스트림>의 세계를 관음하는 절대자들.
화신들의 삶을 유희로 삼는 존재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줄곧 지켜 보아준.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나의, 아주 오래된 적들.
【너는 이제 성좌들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밀한 모략가’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성좌들을 증오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들을 떨어트리는 것이 나의 목표 중 하나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빌어먹게도 나는 이제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저 하늘의 별들이, 모두 똑같은 빛을 발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절대 왕좌’ 시나리오에서도, ‘마계’에서도······.
그들이 모아준 개연성이 없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모든 설화는, 그들이 함께 만들어 준 것이었다.
【너는 이 세계선의 어떤 ‘상실’도 원하지 않는다. 너는, 이 이야기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너는】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듯, ‘은밀한 모략가’가 선언했다.
【절대로, 이 세계의 ■■을 볼 수 없다.】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제천대성과 <황제>의 싸움이 격화되고 있었다.
[다수의 관객들이 당신의 전장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나를 동정했고, 누군가는 나를 대신해 분노했다. 무수한 간접 메시지들이 몰아쳤다.
유중혁은 말이 없었다. 통천하를 적시는 빗물이 쏟아지는 말들을 대신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가 내 말을 빼앗았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유중혁이었다.
“김독자에겐 자격이 없으니, 네놈이 대신해서 이 세계의 ■■을 보겠다는 건가?”
‘은밀한 모략가’의 미간에 희미한 실선이 생겼다.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는 모양이군. 네가 동료로 생각하는 저 녀석은, 네가 증오하는 성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저놈은―】
“한심한 놈이지.”
유중혁이 말을 받았다.
“보잘것없는 게임 회사의 계약직이었고, 소설을 읽는 것이 취미의 전부였던 녀석이다.”
초라한 자기소개처럼 울려 퍼지는 말들.
언젠가 내가 유중혁에게 했던 말들이었다.
“시건방지게 떠드는 것이 특기고, 대책 없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상황을 타개하는 버릇이 있는 녀석이다.”
내가 모르는 나를,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이, 일행들을 여기까지 이끌었다.”
까가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흑천마도]가 [진천패도]를 밀어냈다. 싸움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유중혁이 집중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표정이 흔들렸다. 유중혁의 검격이, 처음으로 ‘은밀한 모략가’의 방어를 파고들고 있었다.
“찾아올 결말이 무엇이든, 녀석이 없었다면 이 세계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너는 아무것도―!】
“오히려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는 건 네놈인 것 같군. 네놈은 왜 이 세계선을 방해하는 거지?”
분연한 [파천검도]가 어둠을 베어낸다. ‘은밀한 모략가’의 신형이 크게 흔들리며 뒤쪽으로 밀려났다.
그 짧은 찰나를 놓치지 않고, 유중혁의 검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네놈의 목적은 대체 뭐지? 김독자가 그렇게 거슬렸다면, 왜 김독자를 진즉에 죽이지 않았나? 김독자가 네 삶을 이용해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나 역겨웠다면―”
[흑천마도]가 ‘은밀한 모략가’의 목을 겨누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화신 ‘유중혁’을 노려봅니다.]
두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유중혁이 물었다.
“왜, 아직도 이 이야기를 지켜보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