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화

446화 1864회차. 이곳은 3회차가 아니라, 1864회차의 세계선이었다. 특성창을 본 순간, 지금 당장 소화하기엔 벅찰 정도의 깨달음이 덮쳐왔다. 「······이 ‘유중혁’이 1863회차에서 사라졌던 그 ‘유중혁’이라고?」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지?」 「하지만 그 유중혁은 [등장인물]에서 벗어났는데?」 「1863회차의 유중혁이 등장인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3회차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녀석이 처음부터 3회차의 유중혁이었다는 것은 대체······.」 무수한 의문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와중,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tls123와의 대화였다. 「독자님한텐 감사의 인사로 특별한 선물을 좀 보내드릴까 해요.」 그때 작가가 말한 ‘선물’이란, 어쩌면······. 콰콰콰콰콰콰! 넘치는 설화의 힘. 지옥도의 전경이 변화하고 있었다. 세계가 절규하고, 비탄에 젖은 이계의 신격들이 울부짖었다. 그 절망의 무대 위에 아주 작은, 실낱같지만 명백한 한 줄기의 빛이 있었다. [흑천마도]의 검극이었다. 【기억을 되찾은 건가?】 ‘은밀한 모략가’가 물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이유를,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폭발적인 기억들이 유중혁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독해는 완전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읽었더라도, 그리고 유중혁이 그걸 함께 했더라도, ‘1863회차의 유중혁’을 온전히 복원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비틀거리던 유중혁의 머릿속으로 기억의 잔재가 흘러갔다. 「“흙을 먹어라, 유중혁.”」 「“행복한 기억! 행복한 기억!”」 「“유중혁, 앉아.”」 “이 자식······.” 「지금 그딴 거 생각할 때 아냐 멍청아!」 나는 황급히 유중혁을 일깨웠다. 코앞에서 지옥도의 격을 담은 [진천패도]가 짓쳐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까가강,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검이 다시 한 번 부딪쳤다. 여전히 무거운 일격이었다. 하지만 이전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너와 싸워보고 싶었다.】 시종일관 고요하던 ‘은밀한 모략가’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감정의 빛이 번지고 있었다. 내가 읽은 ‘원작’을 살았고, 마침내 그 끝을 보았던 유중혁― ‘은밀한 모략가’가 말하고 있었다. 【네놈은 아무 말도 없이 그 ‘너머’로 사라졌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유중혁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허겁지겁 읽어낸 독해는 불안정했고, 때문에 유중혁의 기억에는 구멍이 많았다. 유중혁이 짓씹듯 말했다. “이해할 수 있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야겠군.”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우리가 가진 설화들이 동시에 [흑천마도]에 실렸다. 이어진 연격이 다시 한 번 [진천패도]와 부딪쳤다. 두 개의 지옥도가 부딪치는 충돌의 순간, 그 사이에서 우주가 열렸다. 기억의 빅뱅이었다. [지나치게 유사한 두 존재가 충돌합니다.] [‘끊어진 필름 이론’이 발동합니다!] 우주의 정경을 보는 순간, 나는 무슨 현상이 벌어지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이것은 [끊어진 필름 이론]이었다. 서로 다른 세계선의 두 신유승이 만났을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새로운 세계선이라고?】」 한없이 유사한, 그러나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두 유중혁이 부딪치며 불러낸 기억. 「【이런 세계선이 있을 리 없다.】」 그것은, ‘은밀한 모략가’의 기억이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이 3회차를 발견했던 그 날의 일. . . . 【흥미롭군. 이게 3회차라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3회차의 이야기에, ‘은밀한 모략가’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가 모르는 인물이, 3회차의 자신과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성공은 불가능하겠지만.】 어떤 것은 그가 아는 방식이었고, 어떤 것은 그조차 생각해 보지 못한 방식이었다. 가끔은 무모해보였고, 가끔은 운이 좋았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설화. 은밀한 모략가는 마치 빨려들 듯 그 세계선의 설화를 들여다 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그들의 설화를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은밀한 모략가’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성좌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흡수한 유중혁들이 말하고 있었다. ―잊었는가? 위대한 모략이여. ―우리는 ‘죽음’을 원한다. ―어차피 저 회차의 성공은 불가능할 것이다. 죽음. 그것은 회귀의 저주에 걸린 모든 유중혁의 소망이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오직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존재했다. ―‘가장 오래된 꿈’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다시 회귀하게 된다. ―죽음이 불가능하더라도, 한없이 그것에 가까워진다면 어떨까. 한수영의 아바타를 1863회차로 보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3회차에서 발견한 이레귤러를 이용해, 죽음을 완수하는 것. 그는 [끊어진 필름 이론]을 이용해 모든 유중혁의 봉인을 계획했다. 1863회차의 유중혁과 하나가 되어, 끝도 없는 영원한 잠에 빠져드는 것. 그러나 그 계획의 완수를 앞두고, 심경의 변화가 발생했다. 「“저는 ‘종장(終章)’을 향해 가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을 찾은, 한 성좌 때문이었다. 종장. 그가 그토록 원했으나 단 한 번도 얻지 못했던 ■■의 이름. [41회차의 ‘유중혁’이 경악합니다.] [416회차의 ‘유중혁’이 경악합니다.] [967회차의 ‘유중혁’이 경악합니다.] [1472회차의 ‘유중혁’이 경악합니다.] ······. 그의 안에 있는 모든 회차의 유중혁들도 그 광경을 보았다. 어떤 유중혁은 경탄했고, 어떤 유중혁은 절망했다. 그리고 어떤 유중혁은, 분노했다. ‘은밀한 모략가’는 그중 마지막 유중혁이었다. 【······또 다른 종장이 존재할 리가 없다.】 이미 그의 세계는 끝났다. 1863회차의 시행착오를 거쳐 도달한 ‘결’. 그는 모든 것을 잃었고, 시나리오의 마지막을 보았다. 벽에 도달했다. 그는 틀리지 않았다. 그것을 인정받고 싶었다. 【너의 방식으로 모든 것의 마지막에 도달해 세계를 구한다고 치자. 그러면 ‘다른 세계’는 어쩔 셈이지?】 【네가 구원하지 못한 그 세계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래서 ‘은밀한 모략가’는 김독자를 1863회차로 보냈다. 그곳에서 이야기의 마지막을 보게 만들었다. 이것이 진짜 ‘원작’이라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내가 정한 세계의 마지막이라고. 「“내가 너의 이야기를 끝내줄게.”」 하지만 김독자는 「“나는 3회차로 돌아가지 않겠다. 여기 남아서, 이곳의 사람들과 함께 결말을 보겠어.”」 그것을 바꾸었다. 츠츠츠츠츠츠츳! 유중혁의 봉인은 실패했고, 정해져 있던 이야기의 방향은 틀어졌다. [1863회차의 유중혁이 당신과의 합의를 거부합니다.] 「“나는 살고 싶다.”」 봉인되었어야 했던 유중혁이 ‘회귀’를 선택했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갔다. ‘은밀한 모략가’는 죽은 유중혁의 기억들을 수거한 뒤,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눈부신 세계선의 별빛을 지나, 기억들을 흩트리며 나아가는 백색 코트의 유중혁을 쫓았다. [등장인물]의 탈을 벗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유중혁. 【멈춰라! 너는 다음으로 갈 수 없다!】 오직 ‘은밀한 모략가’만이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1863회차는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이다. 이 다음은. 「나는 ‘그 세계’를 보고 싶다.」 【돌아와라.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다! 너는―】 은밀한 모략가는 외쳤다. 설령 ‘가장 오래된 꿈’이 저 회귀를 허락한다 한들, 결국 유중혁은 악몽을 반복하게 될 뿐이다. 심지어 기억까지 잃은 채로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플레이해봤자······. 「놈이 분명히 말했다. 그곳은 존재하는 우주라고.」 [‘가장 오래된 꿈’이 그 이야기를 궁금해합니다.] 유중혁이 손을 뻗고 있었다. 상상하고 있었다. 그곳은 아주 먼 세계. ‘멸살법’의 우주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 간발의 차이로 ‘은밀한 모략가’가 유중혁의 영혼체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가 붙든 것은 흰 코트뿐. 이미 유중혁의 몸은 사라지고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멍청한······.】 기억을 잃은 유중혁은 결국 회귀에 성공했다. 이미 시작과 끝이 정해진 부질없는 이야기. 그곳에서 또다시 영겁의 악몽을 반복하게 된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는 세계선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 잘난 녀석이, 기억까지 잃으며 사라진 세계선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처참하게 망가져, 후회 속에서 시나리오를 이어 나가는 그 모습을 봐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리고 ‘은밀한 모략가’는 그 세계선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그 세계선은,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세계선이었다. 【······이럴 리가 없다.】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고 있었다. 그가 알지 못했던 세계선이 갑자기 나타났던 이유. 3회차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전혀 다른 세계선이 존재했던 이유. 그가 살아온 모든 회차를 제물로 만들어진 ‘벽 위의 세계선’. [‘가장 오래된 꿈’이 최후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결과가 원인에 간섭하여 만들어진 불가능한 세계선. 그의 우주가 흔들리고 있었다. . . . 폭음과 함께 유중혁과 ‘은밀한 모략가’의 신형이 떨어졌다. 우리는 [흑천마도]를 고쳐 쥔 채 눈앞의 적을 노려보았다.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이젠 알았겠지. 존재해선 안 되는 우주였다.】 이제는 ‘은밀한 모략가’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이 세계선이 탄생하게 되었는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863회차의 유중혁이 회귀하면서 선택했던 ‘너머’. 그곳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회차였다. 【잔혹한 일이다. 간신히 악몽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난 네가 선택한 일이, 또다시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라니.】 짙은 비감이 어린 말투. ‘은밀한 모략가’의 목소리에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깊이의 원한이 담겨 있었다. 【같은 책을 수백 번 읽으면, 해석은 바뀔지도 모르지. 하지만 문장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미 끝난 일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의 [진천패도]가 허공에 궤적을 새기고 있었다. 1863회차의 무게가 담긴 궤적이었다. 한때 유중혁이었고, 이제 ‘은밀한 모략가’로 살아가는 자. 세상 모든 유중혁의 ‘죽음’을 꿈꾸는 존재. 그가 말하고 있었다. 【너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존재가, 자신의 역사를 휘두르고 있었다. 【너희는 지하철에서, 극장 던전에서 죽었어야 했다. 니르바나에게 죽었어야 했고, 암흑성에서 죽었어야 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마계에서 죽었어야 했다. ‘기간토마키아’에서 죽었어야 했고, ‘성마대전’에서, ‘서유기’에서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죽었어야 했다.】 그의 삶이 없었다면, 그의 실패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어째서 살아남은 것이지?】 그가 우리에게 묻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아니라 너희들인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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