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화

444화 봉인에서 깨어난 제천대성은 그야말로 야차에 가까웠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경악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멍하니 전장을 응시합니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눈을 부릅뜹니다.] [성좌, ‘흙으로 사람을 빚은 대모신’이 눈을 떼지 못합니다.] 최상위격 설화급 성좌들은 물론이거니와, 신화급 성좌들까지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힘. 신외신을 통해 불어난 손오공의 분신들은 수백, 수천으로 불어나 성운의 대군을 감당하고 있었다. 주먹에서 날아간 우레에 일대의 위인급 성좌들이 격멸당했고, 휘두른 여의봉에 얻어맞은 십여 개체의 설화급 성좌가 추락했다. 통천하 전체가 그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울부짖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 이것이 장대한 ‘서유기’의 결말을 완성한 손오공의 힘이었다. 츠츠츠츠츳! 전신에 쉴 새 없는 스파크가 튀었다. 이곳이 그의 설화 영역인 ‘서유기’인데도, <스타 스트림>이 그의 힘을 억제하고 있었다. 어긋난 개연성은 손오공들과 내게 고스란히 돌아왔고, 그로 인해 나는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과도한 개연성의 뒤틀림이 당신의 정신을 침식합니다!] ‘막내가 감당하긴 힘들어 보이는군.’ ‘내보낸다.’ [네 명의 손오공이 ‘구원의 마왕’을 분리시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출아(出芽)하듯 자라난 내 몸이 허공에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웨에에엑― 하고 올라오는 헛구역질과 함께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통천하의 부유물 위에 늘어져 있었다. 창공에서는 방금전까지 내가 들어있었던 손오공이 <황제>의 성좌들을 상대로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아저씨!”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 이어서 크고 작은 인형 같은 것들이 내 품으로 부딪쳐 왔다. [바앗! 바아아아앗!]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자, 내게 매달린 신유승과 비유가 보였다. 요괴들의 피와 살점으로 더럽혀진 내 팔을 껴안은 채 신유승이 울고 있었다. 나는 피 묻은 손을 외투에 닦은 뒤, 아이를 조심스레 안아주었다. [제4의 벽]이 있었음에도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독자 씨.” 고개를 들자, 새하얀 법복을 입은 유상아가 그곳에 있었다. 삼장의 화신체로 부활한 유상아. 화신체가 달라졌음에도, 그녀의 외형은 내가 아는 유상아 그대로였다. 나는 그녀를 향해 힘겹게 웃었다. “돌아오셨군요.” “내가 없는 사이 독자 씨가 한 일들, 잘 봤어요.” 나도 모르게 흠칫 어깨가 떨렸다. 혼나려나 싶었는데, 유상아는 인자하게 웃었다. “힘들었죠?” 내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유상아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더 힘들어 봐요.” 응? 내가 입을 열려는 찰나, 살포시 손을 뻗은 유상아가 내 머리 위에 뭔가를 씌웠다. [당신은 ‘긴고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긴고아’의 효과로 당신에게 새로운 수식언이 발생합니다.] [당신은 ‘긴고아의 죄수’가 되었습니다!] 나는 눈앞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흐음, 이걸 어떻게 할까.” 내 이마에 대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유상아의 모습에 나는 희미한 공포를 느꼈다. 긴고아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나중에, 제대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지금은, 저쪽이 우선이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본 곳의 하늘에 [그레이트 홀]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홀의 중심에서, 일생일대의 격전을 벌이는 두 명의 유중혁이 있었다. * [흑천마도]를 쥔 유중혁 [999]가 초월좌의 격을 흩뿌리며 천공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그곳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유중혁의 ‘왕’이 있었다. 【결국 그런 선택을 한 것인가.】 이 우주에서 가장 오래된 유중혁. 1863번의 회귀를 뚫고, 마침내 자신의 결을 본 유중혁. [999]는 그런 ‘은밀한 모략가’를 마주 보며 오래된 자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 모든 존재에게 단 한 번만 찾아오는 끝. [999]에게도 그만의 결말이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보았던 ‘결’과는 달랐지만, 그 역시 그 편린을 목격한 존재였다. 999회차는, 다른 그 어떤 회차와도 달랐다. 한 사람이 천 번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대부분의 인간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999]는 천 번의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다시 그만한 세월을 살 수 있는 존재였다. 그랬기에 그는 「“······이번 회차는 너희를 위해 살겠다.”」 자신의 999회차를, 자신의 일행들을 위해 바쳤다. 「“대장, 날 버려! 그냥 꺼지라고!”」 38번 시나리오에서 그는 이지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왼팔을 잃었고. 「“중혁 씨! 안 됩니다! 중혁 씨!”」 55번 시나리오에서 이현성을 위해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왜, 왜 나 같은 걸 위해서······.”」 74번 시나리오에서, 신유승을 각성시키기 위해 자신의 두 눈을 희생했다. 「“너희도 그랬으니까. 그뿐이다.”」 그것이 지난 생에 대한 속죄였는지, 아니면 천 번의 삶에 한 번쯤 찾아오는 변덕이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999]회차의 유중혁은 진심으로 그렇게 살았다. 그는 처음으로 ‘결말’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대신 그가 바란 것은 「“나는 너희가 이 세계의 끝을 보길 바란다.”」 자신이 아니라도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스타 스트림>의 끝을 보는 것. 999회차의 유중혁은 그것을 위해 자신의 기억과 영혼까지 바쳤다. 일행들이 강해질 수 있다면 ‘이계의 언약’조차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끝에. 「“대장, 이제 곧 마지막 시나리오야.”」 아주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중혁 씨!”」 그는 이제 혼자의 힘으로는 걸을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를 손이 없었고, 세계를 볼 눈도 없었으며, 혈류가 모두 뒤틀려 스킬을 발동할 수도 없는 몸이었다. 하지만 그의 희생을 대가로, 일행들은 최종 시나리오의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정신 차리세요, 제발. 제발!”」 하지만, 끝내 그는 시나리오의 끝을 볼 수 없었다. 마지막 시나리오를 앞두고, ‘이계의 언약’이 그의 목숨을 거둬 간 까닭이었다. 그런 [999]를 보며,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여. 나는 너의 삶을 존중한다.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결’의 근처까지 갔던 존재니까.】 조용히 [흑천마도]를 겨누는 [999]. 그런 [999]를 향해, ‘은밀한 모략가’의 전신에서 다른 유중혁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진심인가? ―정말로 위대한 모략에게 대적할 셈이냐? ―정신 차려라, [999]! 【하지만 너는 내 일부다. 네가 아무리 많은 역사를 끌어다 써도, 결코 나를 이길 수는 없다.】 “네가 나라면 잘 알 텐데. 나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도.” 【네가 겪은 삶은 나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나마 기억도 온전치 않지. 그런데도 나와 대적하겠다는 것인가?】 [999]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기세를 키웠다. 그런 [999]에게서 뭔가를 읽었는지, ‘은밀한 모략가’의 태세가 변했다. 【네가 진심이라면.】 뭉게뭉게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은밀한 모략가’의 외피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연기 속에서 한 사내의 형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이 우주에서 가장 고독한 왕. 하얀 코트를 입은 1863회차의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나 역시, 하찮은 연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 그 말과 함께 ‘은밀한 모략가’가 자신의 코트를 벗어 던졌다. 흰 코트가 바람에 흩날려 통천하의 강 위에 떨어졌다. 새카만 어둠이 그의 어깨에 걸쳐진다 싶더니, 어느새 검정색 코트가 그의 전신을 덮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와 1863번의 회귀를 함께해온 코트. ‘은밀한 모략가’의 손에서 [진천패도]가 불길한 아우라를 뿜었다. 그와 동시에, 두 유중혁의 몸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콰콰콰콰콰콰! 두 개의 검이 부딪치는 무수한 파찰음만이 그곳의 격전을 알려줄 따름이었다. 흉포한 격의 충돌에 연이어 터지는 스파크가 하늘을 새파란 빛으로 물들였다. 난데없이 벌어진 대결에 줄곧 제천대성에 주목하던 관객들의 시선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유중혁 또한, 통천하의 강 위에서 그 결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999회차와 1863회차의 대결. 불끈 쥔 주먹이 떨리며 힘이 들어갔다. 어느 쪽도, 지금의 그가 맞서기엔 벅찬 상대였다. 착실하게 생을 쌓았다면 언젠가는 도달했을 경지. 유중혁은 눈을 부릅뜬 채 시선을 고정했다. [999]와 ‘은밀한 모략가’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는 것처럼 그들의 설화를 읽고 또 읽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득한 설화의 지옥도. 그 지옥도의 절반을 걸어온 유중혁과 지옥도의 끝을 본 유중혁이 부딪치고 있었다. 두 개의 [파천검도]가 유성처럼 궤적을 그렸다. 하나는 [진천패도]. 그리고 다른 하나는 [흑천마도]. 두 자루의 검이 초신성처럼 환하게 불타올랐다. 【그러고 보니 너는 진천패도를 주력으로 쓰지 않았지.】 [999]회차에서, 그의 [진천패도]를 물려 받은 것은 이지혜였다. ‘은밀한 모략가’가 펼친 파천유성결이 [999]의 전신을 꿰뚫고 지나갔다. 【겨우 그런 검술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순식간에 상처투성이가 된 [999]는 물러서지 않고 검을 쥐었다. 순간 ‘은밀한 모략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주 잠깐 사라진 [999]가, 어느새 그의 코앞에 있었다. 그것은 [파천검도]가 아니었다. 순살(瞬殺). “적어도, 내가 살아온 역사를 보여줄 수는 있겠지.” 그것은 이지혜의 기술이었다. 【겨우 이런―】 간발의 차이로 튕겨 나간 [흑천마도]가 유연하게 [검도]의 곡선을 그렸다. 츠츠츠츠츳! [999]의 눈에서 [귀살]의 빛이 번뜩였다. 999회차의 이지혜가 살아온 삶이, [999]의 손끝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현성처럼 단단한 발차기. 이설화처럼 날카로운 조법(爪法). 신유승의 타고난 감응력과 김남운의 전투 센스까지. [999]가 몸으로 느낀 역사가 그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순간 [999]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가 살려낸 모든 동료들의 기술들이, 그의 몸을 통해 재현되고 있었다. [검도]가 [파천검도]를 부쉈고, [흑화]와 [귀살]의 콤보가 [주작신보]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이설화의 [천령독]이 ‘은밀한 모략가’의 심장을 노리는 순간. 【잡기 따위로.】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999]의 설화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현성의 방어가 무너지고, 이설화의 손톱이 부러졌다. 김남운과 이지혜가 쓰러졌고, 신유승이 무릎을 꿇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흑천마도]가 그의 손을 떠나 통천하의 강 위로 떨어졌다. [999]는 언제나처럼 혼자 남았다. 【999. 너는 실패했다.】 한 사람이 살아낸 아득한 생 앞에, 모든 동료들의 삶이 부서졌다. [999]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다. “······어떤 우주에서는 다를지도 모르지.” [999]의 시선이 통천하의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제천대성과 <김독자 컴퍼니>가 만든 전장. 이제껏,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던 우주의 사건들. 【······너까지 이런 곳에서 실없는 희망을 본 모양이군.】 “남 얘기처럼 말하는군, 위대한 모략.” [999]는 비틀거리면서도 말을 이었다. “우리는 실패했다. 어떤 일행도 살리지 못했고, 혼자서 결을 보았지. 그게 정말 우리가 원하던 끝이었나?” 【헛된 감상이군.】 “이 우주는 다르다.” 【애초에 있어서는 안 되는 우주였다.】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은밀한 모략가’의 신형이 움직였다. 【결과가 원인에 간섭해 만들어진 우주다. 존재 자체로 개연성의 붕괴를 초래하는 우주다.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가장 오래된 꿈’의 장난―】 “위대한 모략이여, 실은 알고 있지 않은가? 잘난 ‘원작’의 닫힌 우주에서, 우리가 바랐던 이야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당신도―” 처음으로, ‘은밀한 모략가’의 신형이 주춤거렸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가볍게 휘두른 [진천패도]가 [999]의 몸통에 꽂혔다. 【돌아와라, [999]. 내겐 네가 필요하다.】 푹 꽂힌 [진천패도]가 [999]의 기억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분체로 나뉘었던 그의 자아가 회수되고 있었다. 흐려지는 [999]의 눈빛이 통천하의 강 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누가 있는지를 아는 ‘은밀한 모략가’가 조소하듯 말했다. 【그는 이미 내게 패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가,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유중혁, 검을 쥐어라!” 처절한 목소리가 통천하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닿은 곳에, [999]도, ‘은밀한 모략가’도 아닌 유중혁이 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창공을 올려다보고, 강의 부유물들 위에 떨어진 두 개의 아이템들을 바라보았다. [999]의 [흑천마도]. 그리고 ‘은밀한 모략가’가 벗어 던진 흰 코트. 「“살고 싶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내가 본 그 세계처럼······.”」 머리를 찌르는 통증. 알 수 없는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의 설화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네가 누군지 기억해내라!”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쥐었다. 오래전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감각. 그는 이어서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주웠다. 그가 싫어하는 흰색이었다. ―너는 ‘3회차’의 유중혁이 아니다. 그날, [999]는 그렇게 말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 아무리 김독자가 있다고 해도, 겨우 ‘3회차’에 네가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게 정상적으로 보이나? 익숙한 기시감 속에서, 그는 천천히 흰 코트를 입었다. 마치 언젠가 입어본 것처럼 꼭 맞는 코트. ―개소리 마라. 나는 3회차다. 나는······. 한 번도 의심 해보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는, 정말로 ‘3회차’의 유중혁일까. ―······설령 내가 ‘3회차’가 아니라도, 내가 기억하는 것은 고작 ‘3회차’의 기억뿐이다. 천천히 고개를 든 유중혁이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사라지는 [999]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네겐 동료가 있지 않나? 거울에서조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 ―너보다도, 너의 삶을 잘 기억하는 동료가. ‘은밀한 모략가’의 [진천패도]가 움직였다. 우주조차 갈라버리는 새카만 격이 그를 겨누는 순간, 유중혁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발동하였습니다!] 배후성이 강림하듯, 익숙한 별의 힘이 그에게 현현했다. 「가자.」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