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
441화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발동 중입니다!]
흐릿한 의식.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제일 먼저 들려온 것은 [제4의 벽]을 통해 넘어온 문장들이었다.
「그 순간, 이지혜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이지혜의 전장이 그곳에 있었다.
통천하의 강을 덮은 수십 척의 배.
사격을 준비하는 <황제>의 화신들과, 수뇌부를 맡은 위인급 성좌들.
「“발포하라!”」
[터틀 드래곤]을 둘러싼 <황제>의 전함들이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다.
이지혜는 난파된 배의 흔적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어떤 포격은 받아내고, 어떤 포격은 흘려 내면서.
「“장전.”」
한편의 오케스트라 같은 광경이었다. 가히 해신의 경지에 이른 군함 통제력이 그녀의 [터틀 드래곤]과 유령함대를 움직이고 있었다.
「“발사.”」
해상제독 이지혜의 함대가 발포를 시작했다. 이지혜의 지휘에 맞춰 전열을 재편성한 유령함대는 정확히 치고 빠지는 히트 앤 런을 반복했고, 적군의 함대는 순식간에 대파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압도적인 열세를 이겨내는 지휘 능력. 멸살법 최강의 화신 중 하나인 ‘해상제독’의 진가가 비로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화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원작 후반부의 이지혜는 자신의 배후성을 넘어서게 된다.
어쩌면 이번 회차에서도 그 광경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전술을 바꾼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황제>의 선단들이 일제히 돌격을 시작했다. 철갑선을 앞세운 돌진. 포격전에서 불리해지니 백병전으로 유도할 생각인 듯했다. 그런데 녀석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 이거 독자 아저씨 만나면 한 방 먹여주려고 만든 기술인데.”」
해상제독 이지혜는, 백병전에도 능하다.
웅크린 발도 자세를 취한 이지혜를 보며, 나는 그녀가 뭘 사용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순살(瞬殺).」
‘멸살법’ 최강의 대인 스킬 중 하나인 그것을, 드디어 이지혜가 터득한 모양이었다.
콰아아아아!
뱃전을 꿰뚫는 폭음 속에, 이지혜의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베고, 베고, 또 베고. 검귀의 칼날이 물살을 가로지르며 적장의 목을 날렸다.
그렇게 얼마나 더 베었을까. 붉게 풀어진 설화들로 덮인 통천하의 전장 가운데, 모든 적을 베고 탈진한 이지혜가 드러누웠다.
어둑해진 창공을 올려다보며, 이지혜는 마치 내게 말을 걸듯이 물었다.
「······아저씨, 괜찮은 거지?」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현재 당신의 ‘전지적 독자 시점’ 숙련도가 매우 높습니다.]
[인물 시점 분할이 가능해졌습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 등장인물 ‘정희원’의 시점이 추가됩니다.]
두 번째로 보인 것은 정희원의 모습이었다.
「“비켜! 비켜! 비켜!”」
페이후의 뒤를 쫓는 정희원. 그녀의 손에 쥐어진 이현성의 검극에서 [지옥염화]의 불길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간 길마다 잿가루가 흩날렸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것 같았다. 저 ‘페이후’가 싸움을 포기하다니······. 정말 한국 최고의 화신은 정희원일지도 모른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 등장인물 ‘장하영’의 시점이 추가됩니다.]
가짜 턱수염을 붙인 장하영이 한명오를 한쪽 옆구리에 낀 채 강을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 구요성관들과 격전을 벌이는 이길영이 있었다.
「“야, 꼬맹아! 물러서!”」
<황제>의 정예군 중 하나인 구요성관.
장하영은 그들을 향해 [파천붕권]의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길영이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방해하지 마요 하영이 형.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멀리 전장의 중심을 응시하던 이길영이 이를 갈 듯 말했다.
「“······신유승한테 질 수는 없다고.”」
어둠이 철철 흘러내리는 이길영의 말투에 불길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길영의 전신에서 황색의 폭풍이 몰아쳤다.
아니, 잠깐만. 저거 설마······.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화면이 뒤바뀌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 등장인물 ‘유중혁’의 시점이 추가됩니다.]
혼자서 이십팔수 별자리를 상대하는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국은 약소 성운의 화신!”」
「“겨우 네놈 혼자서 별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이미 유중혁의 손아귀에는 잘려나간 별들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이십팔수 별자리의 합공을 받아 코트는 넝마가 되었고, 팔뚝에도 상처들이 남아 있었지만, 유중혁은 굳건했다.
「“별자리(星座)라면 이미 수도 없이 베어봤다.”」
피가 흘러내리는 이마. 성좌들의 설화로 젖은 머리카락을 흔들며, 유중혁은 악귀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너희도 추락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면이 전환되었다.
「“아저씨.”」
나의 화신이었다.
「“제발, 제발 내 목소리 좀 들어요!”」
전신이 흐느끼듯 떨려왔다.
아이의 손이 꾹 쥔 나의 손이 보였다. 힘없이 늘어진 손은 아이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아이의 말은 간헐적으로 끊어졌고, 말해야 할 것과 들어야 할 것들은 모두 맥락 사이로 사라졌다.
[설화, ‘별의 구원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몸을······ 움직이고 싶다.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무릎을 꿇고, 아이를 안은 채 말해주고 싶다. 너의 소원은
줄곧, 나의 소원이기도 했다고.
츠츠츠츠츳.
기억이, 무너지고 있었다.
주변을 떠다니는 활자들. 어둠 속에서 내 존재가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텅 빈 심연의 저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휘몰아치는 [그레이트 홀] 같은 것이 보였다. 천천히, 영혼이 그쪽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약 속 을 지 킬 시 간 이 다】
무섭다.
이 모든 것을 잊게 된다면······ 이 감정들은,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제4의 벽]은 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기억해줄까.
[바앗, 바아아앗!]
빨려 들어가던 내 영혼을 붙잡은 것은 비유였다.
비유는 안간힘을 쓰며 나의 영혼체를 붙들고 있었다.
[바아아아앗!]
어쩔 줄 모른 채로 그런 비유를 바라보았다.
나도 저기로 가고 싶지 않다.
【위 대 한 모 략 의 곁 으 로 오 라】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저쪽으로 가려는 건가?]
츠츠츠츠,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기류가 변했다. 흩어지던 활자들이 멈췄고, 영혼체를 끌어당기던 인력이 사라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격으로 내 소멸을 억제하고 있었다.
[이 손 선생이 물었다.]
돌아본 곳에, 익숙한 성좌가 있었다.
은은하게 흐트러진 백금발에 빛나는 긴고아.
“······제천대성.”
장난스럽게 웃는 제천대성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손 오 공 너 무많 아」
[저게 말로만 듣던 ‘최후의 벽의 파편’인가? 시끄러운 녀석이군.]
[흠······ 흥미로운 심상 세계인데.]
카우보이 복장을 한 잘생긴 원숭이와, 호랑이 가죽 팬티에 손을 넣고 벅벅 긁고 있는 나른한 표정의 원숭이······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곧바로 깨달았다.
“······필마온과 미후왕이십니까?”
그리고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허공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원 숭 이 의 왕 이 여】
【우 리를 방 해 할 셈 인 가】
[닥쳐.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중이잖아.]
짜증난다는 듯 미후왕이 힘을 발출하자, ‘이계의 신격’들의 파장이 한순간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격이었다.
[구원의 마왕,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다.]
그 질문을 한 것은 제천대성도, 미후왕도, 필마온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존재가 있었다. 이국적인 외모. 성별이 불분명한 신비함이 감도는 얼굴. 짧게 깎은 검은 머리카락과 고아한 법복.
손오공만이 가질 수 있는 여의금고봉을 가진 것으로 봐서, 그 또한 틀림없는 손오공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의 머리 위에는 손오공의 긴고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독자가 알기로, 그런 ‘손오공’은 세상에 하나뿐이었다.」
“투전승불(鬪戰勝佛).”
츠츠츠츠츳!
내 말에 반응하듯, 허공에서 옅은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무표정한 얼굴의 투전승불이 물었다.
[너의 이야기를 줄곧 지켜보았다.]
“······송구스럽습니다.”
[의미 있는 설화더군. 무수한 ‘서유기’가 반복되는 동안에도, 죽어가는 요괴들의 고통에 주목한 설화는 없었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미후왕이 “또 설법쟁이 성격 나오시는군”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투전승불은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당연한 것이다.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너는 모든 요괴들이 피해자인 것처럼 말했지만, 그들 모두가 억울한 것은 아니다. 요괴들 중에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이도 있고, 악의를 가지고 다른 생명을 해치는 이도 있다. 그런 요괴들이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맞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억울한 이들도 분명 있습니다. 아니, 사실은 꽤 많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에 무수한 설화들이 있는 것이다. 거대 설화만이 좋은 설화는 아니다. 거대 설화의 규모에서는 한낱 미물인 자들도, 다른 설화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맞는 말이었다.
정말로, 맞는 말이었지만.
“그건 설화에 참가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죠.”
이 세계에는, 그 ‘설화’에 참가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오직 설화의 소모품으로만 쓰이며, 단 1퍼센트의 지분도 나눠 받지 못하는 자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라오라오라오라오라오라】
“실패한 이들에게도, 설화는 허락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조차 잊은 이들은, 이제 시나리오의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다.
<스타 스트림>이 그들의 입을 틀어 막고, 그들의 언어를 불가해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진심인가?]
여전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투전승불이 나를 보며 물었다. 정확히는, 내 몸 전체에서 일렁이는 혼돈의 힘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의 몸을 바쳐 ‘이계의 신격’이 되겠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곁에서 따분한 표정으로 하품을 하던 제천대성이 말했다.
[확인 끝났냐? 말했잖아. 진짜로 이런 놈이라니까.]
[······그렇군.]
[하여간 보살 놈 설득하는 게 제일 힘들어.]
대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를 흘끗 본 네 명의 손오공이 떠들고 있었다.
[그럼 누가 할 거야?]
[내가 하지. 어차피 나는 보살이 되며 기억을 대부분 잃었으니까.]
[······네가 땡중인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구만.]
다음 순간, 주변에서 환한 빛이 일렁이더니 흩어지던 나의 기억들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개연성의 스파크와 함께, 전신이 감전된 것처럼 빛났다.
[누군가가 당신을 대신해 ‘이계의 신격화’의 페널티를 감당합니다.]
······뭐?
[구원의 마왕, 너의 생각엔 한 가지 틀린 것이 있다.]
혼돈의 힘을 내뿜는 투전승불이 말하고 있었다.
[네가 ‘요괴’가 된다고 해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네겐 그들을 대표할 자격이 없다.]
그의 말은 맞았다.
나는 서유기의 요괴로 고통받아온 ‘이계의 신격’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배역 손오공일 뿐이니까. 미후왕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네놈의 주제를 알아야지.]
그에 필마온이 덧붙였다.
[네 주제(主題)가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말한 것은 제천대성이었다.
[요괴들의 일은 요괴들에게 맡겨라. 그리고 너는 네 설화를 살아라.]
그제야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거대 설화, ‘서유기’가 당신을 위해 이야기합니다.]
대체 왜? 대체 왜 이들이 나를 위해서?
씩 웃으며, 제천대성이 말했다.
[네놈의 설화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뿐이다.]
멀리서 외신들의 고함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계의 신격의 힘이 점차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그는그는그는그는】
【우리거야우리거야우리거야우리거야】
[미안하지만 이 녀석은 줄 수 없다.]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왕이온다왕이온다왕이온다왕이】
어둠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그레이트 홀].
무언가가 이 세계로 강림하고 있었다.
저 모든 ‘이계의 신격’들의 왕.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긴고아의 죄수’를 노려봅니다.]
그 메시지에, 제천대성이 환히 웃었다.
[그래, 언젠가 네놈과는 붙어 보고 싶었지.]
네 명의 손오공이 나를 둘러싼 채 섰다.
[메인은 누가 할 거지?]
[당연히 나, 제천대성이다.]
[멍청한 손오공이 탄생하겠군.]
[야, 손가락 그렇게 들지 마. 이게 퓨전인 줄 아냐?]
다음 순간, 나를 둘러싼 손오공들이 서로의 손을 붙잡았다.
[<스타 스트림>이여! 우리는 ‘구원의 마왕’을 우리의 ‘다섯 번째’로 받아들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