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화
440화
전장의 중심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인근의 공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몰려가는 요괴들의 대열과 강림하는 <황제>의 성좌들.
페이후는 그 대열을 눈으로 좇다가, 자신의 앞을 막은 적수에 눈을 돌렸다.
“······정말 강하군. 한국에는 너 같은 화신들이 많은가?”
정희원의 전신은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녀의 격은 여전히 건재했고, 투지는 들끓고 있었다.
페이후는 그녀의 강철검에 잘려나간 자신의 가슴팍과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페이후는 혼자 싸우는 게 아니었다. 이랑진군에 나타 태자, 거기다 성운의 지원까지 받고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다른 설화방의 ‘우마왕’으로 강림한 화신 하나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잔말 말고 덤벼.”
이글거리는 정희원의 눈동자를 보던 페이후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겨우 한 명을 상대로 이토록 고전했다는 것부터가 이미 우리의 패배다.”
페이후는 더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 자신의 병장기를 집어넣고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진짜 전장은 여기가 아닌 것 같으니.”
그 말과 함께 페이후는 이랑진군, 그리고 나타 태자와 함께 경전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정희원이 다급히 반응하려는 순간, 소환된 함선이 그들을 태우고 쾌속하게 멀어졌다.
[‘심판의 시간’의 발동이 종료됩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조금만 더 싸움이 지속되었더라면, 패배한 것은 그녀였을 것이다.
과연 페이후.
괜히 <황제>의 전속 화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전장의 중심을 걱정스레 살핍니다.]
정희원의 양쪽 어깨에서 대천사의 날개가 자라났다.
그녀는 반쯤 날듯이 물 위를 달려갔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곳곳에서 다른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정희원은 어느 쪽으로 먼저 달려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황제>의 함선들을 상대하는 이지혜. 이십팔수 별자리들과 싸우는 유중혁. 구요성관과 맞서는 이길영······.
창공에서는 수십 개의 [그레이트 홀]이 열리고 있었고, 홀을 통해 넘어온 이계의 신격들은 요괴로 변하여 성좌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유승아!”
별을 향해 손을 뻗는, 한 소녀가 있었다.
*
신유승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황제>의 성좌들을 응시했다.
[성운 <황제>의 열두 원신(元辰)이 강림합니다!]
[성운 <황제>의 사해 용왕(龍王)이 강림합니다!]
(하나둘, 손오공의 숙적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삼장이 경전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된다!]
[군을 나눈다. 한쪽은 놈에게서 경전을 빼앗아라. 그리고 다른 한쪽은 삼장을 제압해!]
신유승은 청룡으로 화한 키메라 드래곤의 갈기를 붙들었다. 그녀를 향해 황제의 주요 전력들이 달려들었다.
김독자는 너무 멀리 있었다.
[<황제>의 ‘열두 원신’들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콰아아아앙!
눈앞에서 빛이 폭발했다.
키메라 드래곤이 몸을 감싸 그녀를 보호했다. 화끈한 열기가 전신을 관통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폭발이 연이어 작렬하고, 키메라 드래곤이 비명을 질러댔다. 이를 악문 신유승이 키메라 드래곤의 등을 밟고 도약했다.
[배후성의 가호가 당신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당신의 놀라운 재능이 개화합니다!]
[당신은 스스로 ‘바람의 길’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순간, 신유승은 강 위를 달리고 있었다. [바람의 길]의 가호가 그녀의 발끝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발끝이 닿은 자리마다 황금빛 파문이 번졌다.
「신유승은, 김독자처럼 달렸다.」
그것이 그녀의 배후성이 달리는 방식이었다.
허공에서 검과 창이 뒤섞인 날붙이들이 날아들었다.
왼쪽에 셋, 오른쪽에 하나.
아래쪽에 둘.
신유승은 아슬아슬하게 그 칼날들을 피해냈다. 하지만 피할수록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수백개의 날붙이들이 위협적인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마치 수백 개의 이빨을 가진 괴물이 입을 벌린 듯한 풍경.
그 괴물 앞에서, 신유승은 품속의 단도를 꺼내 들었다.
「신유승은 유중혁처럼 판단했다.」
언젠가 유중혁에게 배웠던 것.
[설화, ‘패왕의 제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너는 언젠가 ‘비스트 로드’가 된다. 무수한 괴수종들이 너의 발밑에 군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괴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김독자가 없었던 3년의 시간.
유중혁은 신유승에게 사냥을 가르쳤다.
덩치가 큰 괴수종을 상대하는 법. 표피가 단단한 괴수종을 사냥하는 법과, 접근전이 힘든 괴수종을 죽이는 법.
「“죽일 수밖에 없을 때는 망설이지 말고 숨통을 끊어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 건 네가 될 테니까.”」
호흡을 멈춘 순간, 날붙이들 사이로 틈이 보였다.
바람이 진 폭풍의 눈.
신유승은 자신의 모든 격을 발출하며 그 틈을 향해 단도를 던졌다.
콰콰콰콰콰콰콰!
바람이 결이 흩어지며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날붙이들이 일제히 산개했다.
하지만 모든 날붙이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이의 작은 몸을 스치는 검극과 창날. 소녀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신유승은 이현성처럼 엎드렸다.」
부유물의 뒤에 엎드린 신유승의 머릿속으로 이현성의 얼굴이 스쳐갔다.
「“이렇게 숨는 거야. 항상 주변의 엄폐물을 먼저 파악하는 걸 잊지 마.”」
늘 곤란하다는 듯한 웃음을 띤 채, 곰 같은 몸을 움직여 포복 자세를 취하던 아저씨. 그런 이현성의 말에 한마디를 얹던 정희원의 목소리까지.
「“적들이 너무 많을 때는 숨을 곳이 없을 수도 있어.”」
「“음, 맞는 말씀입니다.”」
사해 용왕의 힘이 강을 통제하고 있었다.
물로 만들어진 뾰족한 창들이 신유승의 사방을 노리고 급습했다. 부유물들이 연이어 파괴되며, 더 이상 강 위에는 그녀가 숨을 곳이 없었다.
「“그럴 때는 적들을 이용해. 이렇게.”」
엎드린 이현성의 머리를 척 들어 올리며 말하던 한수영의 모습. 그런 한수영을 노려보던 정희원과, 킬킬 웃던 이길영의 목소리.
그 모든 풍경을 떠올리며, 신유승은 그녀를 공격하던 화신 하나를 붙잡아 방패로 삼았다.
“무, 무슨······ 크아아악!”
「신유승은 한수영처럼 비정해졌다.」
비참하게 꿰뚫린 화신체를 내버리며, 신유승은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약삭빠른 꼬마로군.]
[놓치지 마라!]
이제 김독자와의 거리가 제법 가까워졌다.
“아저씨!”
신유승의 말을 들은 듯, 김독자의 신형이 멈칫했다.
그 텅 빈 동공을 보며, 신유승은 유상아의 말을 떠올렸다.
「“이런 세계라서 우리가 미안해.”」
하나둘 모여든 일행들의 모습이 보인다.
「“상처받게 해서 미안해. 네게 의존해야 하는 무력한 어른이라서. 그래도 하나는 약속할게. 우린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네가 이런 기술들을 쓰지 않아도 되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그 말을, 신유승은 기억한다.
「“네가 어떤 존재인지, 잊지 않도록.”」
스팟!
긴 창날 하나가 신유승의 뺨을 스쳤다. 무의식중에 만진 뺨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주변 어디에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일행들을 지키던 유중혁의 등도, 언제든 의지가 되던 정희원의 검도 없다.
방심을 뚫고 날아든 긴 팔뚝이 신유승의 멱살을 잡아챘다. <황제>의 열두 원신들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꼬마였을 줄은.]
[고작 어린애에게 이런 배역을 맡긴 건가?]
항거할 수 없는 <황제>의 격이 전신을 내리눌렀다.
평소였다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적이었다. 달아나는 것이 당연했고, 동료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신유승은 도망가지 않았다.
[축적된 설화가 이상 현상을 일으킵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신유승이 눈을 떴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차분해졌다. 신유승의 두 눈에서 서슬 퍼런빛이 흘러나왔다.
[화신 ‘신유승’의 특성 진화가 임박하였습니다.]
[특성 진화의 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나는 그냥 어린애가 아냐.”
[····뭐?]
신유승이 원신의 왼손을 붙잡았다. 아이의 손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악력에, 원신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내 이름은 신유승.”
[전설급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은 ‘비스트 로드’가 되었습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신유승이다.”
눈처럼 흰 순백의 격이 강 위를 몰아쳤다.
비명을 지른 원신들이 성큼 물러났을 때, 그들의 눈앞에는 흰 코트를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야수왕의 감수성].
41회차의 신유승이 사용했던 ‘비스트 로드’ 최강의 방어 스킬.
주변의 강물이 범람하며 그 안에 서식하던 모든 요괴와 괴수종들이 한꺼번에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오오오오오오!
마치, 그들의 왕을 경배하듯이.
[미친······ 어디서 이런 것들이······!]
[쳐라! 저 짐승들부터 죽여!]
<황제>의 성좌들이 포격을 개시했다.
솟아 오른 괴수들이 그녀를 보호했다.
“키메라 드래곤!”
그아아아아아―!
그녀의 특성에 영향을 받은 [키메라 드래곤]의 몸집이 더욱 커졌다. 이무기처럼 강 속을 헤집은 키메라 드래곤이 원신들을 집어삼키며 포효성을 터트렸다. 그 날카로운 송곳니에 찢겨 나간 원신들이 소리쳤다.
[빌어먹을 도마뱀이······!]
신유승은 그런 원신들을 무시하고 달렸다.
【오오오오오오오】
【유승유승유승유승유승유승】
요괴들이 그녀를 위해 길을 터주었다.
이제, 별은 코앞에 있었다.
“아저씨!”
김독자를 향해 외친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김독자는 미동도 없었다.
대도깨비들과 대적하던 혹부리 왕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늦었다. 그는 이제 ‘위대한 모략’의 것이니까.]
그 말을 기점으로, 창공의 하늘이 크게 흔들렸다.
츠츠츠츠츠츳!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의 [그레이트 홀]이 열리고 있었다.
강 위의 대요괴들이 일제히 몸을 웅크렸다. [야수왕의 감수성]의 털코트가 솜털처럼 비죽 솟아오르고 있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지금 강림하는 것은, <황제>의 성좌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존재다.
그리고 김독자는, 이제 저 존재의 소유다.
“그렇게는 안 돼.”
[삼장 법사가 ‘긴고주(緊箍咒)’를 외웠습니다!]
신유승이 스킬을 발동하는 순간, 김독자의 머리 위의 금테가 빛나기 시작했다.
[아이템 ‘긴고아(緊箍兒)’가 반응합니다!]
긴고아는 손오공을 억제하는 보패.
요괴화든 뭐든, 긴고주를 읊는 동안 손오공의 모든 변화는 일시적으로 멈춘다.
[어리석은 짓이다······!]
혹부리 왕의 격이 신유승의 전신을 압박해왔다. 입안 깊은 곳에서 핏물이 느껴졌다. [야수왕의 감수성]으로 빚어낸 코트가 미친듯이 펄럭거렸다. 신유승은 김독자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다가가고, 또 다가갔다.
엉망이 된 김독자의 얼굴. 수척한 뺨. 고요히 눈을 감은 그의 배후성.
“아저씨!”
[당신의 새로운 설화가 발아하고 있습니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섭섭했던 것들을 이야기할 것이고.
지금의 아저씨는 엉망이라고 말할 것이다.
처음으로, 솔직하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것이다.
“제발, 제발 내 목소리 좀 들어요!”
모두 함께 PC방에 가고 싶다고 말할 것이고.
피자랑 콜라를 잔뜩 사 들고 한강에 가자고 조를 것이다.
이제 많은 것이 불가능해진 세계에서, 불가능한 소원들을 이야기하며
행복해질 것이다.
시야가 흔들렸고, 눈물이 쉴 새 없이 흩날렸다.
마침내, 신유승의 손이 김독자의 손끝에 닿았다.
상처로 덮인 손이, 역시나 상처로 덮인 손을 감쌌다. 상처와 상처가 닿은 자리가 쓰라렸다. 그럼에도 신유승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준신화급 설화, ‘별의 구원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별의 구원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직 못 말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상아 언니와 역사를 공부하던 시간.
중혁 아저씨와 사냥감을 요리하던 시간.
희원 언니에게 검술을 배우고.
지혜 언니와 스케이트 보드를 연습하고.
현성 아저씨를 이용해 비행기를 타고.
이길영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젠 영영 다음 권이 나오지 않을 만화책을 읽던.
“내가 얼마나······.”
그 풍경에, 아저씨도 있었으면 했다고.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라는 말은 끝내 할 수 없다.
세계의 개연성이, 빌어먹을 <스타 스트림>이 그걸 용납지 않으니까.
“그냥, 평범하게······.”
하늘의 별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별들이 제각각의 설화를 노래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수의 관객들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실은 알고 있다.
이 세계에서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행복은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것을.
그렇기에 평범한 행복은.
멸망한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사치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그럼에도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성좌, ‘고려제일검’이······.]
신유승은 연이어 들려오는 간접 메시지를 들으며 김독자의 손을 더 강하게 쥐었다.
또렷한 간접 메시지 한 줄이 귀에 꽂힌 것은 그때였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붙잡은 김독자의 손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손오공의 금테로부터 눈부신 황금빛 격류가 솟아오르더니, 어마어마한 개연성의 스파크가 몰아쳤다.
<황제>의 성좌들이 경악하며 외쳤다.
[서, 설마? 말도 안 되는······!]
창공의 곳곳에서 뇌전 같은 격류가 김독자의 전신을 향해 모여들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유기의 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은퇴한 손오공이,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고쳐먹었다.)
[심사위원, ‘투전승불’이 당신의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